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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55 (上)]청계산 횡단길

과천 매봉 지나 이수봉 길, 소헌왕후가 중창한 원통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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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92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4.08.21 09:20:55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청계산(淸溪山),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과 함께 서울 시민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강남의 명산이다. 청계산을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로부터 왜 청계산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느냐고 은근한 협박을 받은 지 오래 되었다. 사실 누구나 잘 아는 산이라서 굳이 쓸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고, 또 청계산에 있던 여러 절터는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을뿐더러 사라진 절의 이름과 이야기도 전해지는 것이 없으니 감히 붓을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아무런 내력도 모르고 길을 걷는 것보다는 부족한 내용이라도 알면서 산길을 걷는 것이 좋을 듯해 붓을 든다.

청계산은 흔히들 옛골이나 원터골에서 출발하여 원점회귀하거나 말굽형으로 돌아내려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산행을 하면 청계산의 진면목을 알 수가 없다. 청계산은 높이도 만만치 않을뿐더러(618m) 앉은 자리 또한 큼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마치 중량급 문어가 다리를 펼치듯 북으로는 서울 서초구 강남구, 동으로는 성남시, 남으로는 의왕시, 서로는 과천시로 다리를 펼치고 의연히 앉아 있을 뿐 아니라 광교산, 백운산으로부터 한남정맥(漢南正脈)의 기운을 받아 관악산, 인릉산, 구룡산, 대모산으로 전하고 있으니 그 기운 또한 호락한 것이 아니다. 이런 청계산의 기운을 알려면 적어도 동서로 한 번, 남북으로 한 번은 산줄기를 종주할 필요가 있다.

동서로 잇는 길은 과천 매봉에서 이수봉 지나 철쭉능선(목배등)을 거쳐 옛골로 내려가는 횡단길이다. 남북으로 잇는 길은 하우재에서 국사봉 오르고 이어서 이수봉 석기봉 지나 정상 망경대에서 북녘을 우러른 후 혈읍재 매봉 옥녀봉에 이르고 이어서 양재동 화물터미날( 또는 과천 과지초당이나 신원동 원터골)로 하산하는 길이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청계산의 넉넉한 품을 헤아릴 수 있다. 본고는 동서와 남북 두 번에 걸쳐 산길을 걷게 될 것이다. 우선 동서로 잇는 횡단길이다.

4호선 전철은 동작교(동재기 나루) 지나 땅속으로 사당동(승방평)을 통과한 후 남태령과 과천 시내를 거쳐 과천역에 도착한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찾아가던 길이며, 이도령이 암행어사 되어 춘향이를 그리며 신바람 나게 날아가던 길이며, 강남제비 박씨 물고 흥부네 집 찾아가던 길이며, 충무공이 백의종군하러 회한을 안고 지나가던 남도행 길이며, 무수히 많은 조선의 관리와 민초들이 지나갔던 삼남대로 길이었다.

▲매봉 능선


과천역 5번 출구를 나오면 현충탑이 보이고 그 앞으로 과천도립도서관과 청계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사이로 작은 숲길 통로가 있는데 ‘멘토의 거리’라고 이름 붙여 놓았다. 청계산에 있는 과천 매봉길은 이 길을 통하여 가게 된다. 이 길이 끝나고 횡단보도를 건너 6단지와 7단지 사이 길을 직진하면 과천대로 밑으로 지나게 되고 우측으로 보훈종합회관이 보인다. 길 건너편으로는 ‘공원마을 어린이집’ 500m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이 가리키는 화살표 방향 다세대주택 사이 길을 지나면 이윽고 산길로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부터 길은 한 갈래로 매봉으로 향한다. 1.5km 쯤 오른 위치에 약수터 갈림길 안내판이 서 있다. 매봉약수1, 2로 표시되어 있는데 샘은 좌측 샛길 100m 지점에 있다. 시원한 물맛이 상쾌하다. 이제부터 길은 가파르다. 수녀님도 아침 운동길에 오르셨다. 등산로 아래쪽에 수녀원이 있기에 쉽게 산길에 오르셨으리라.

땀 한 번 흘리고 과천 매봉에 도착한다. 매봉, 전국에는 매봉이 수도 없이 많다. 청계산에만 해도 두 개의 매봉이 있다. 이 곳 매봉과 혈읍재에서 옥녀봉 가는 중간에 또 하나의 매봉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옥녀봉 쪽 매봉을 그냥 ‘매봉’이라 부르고 이 곳 매봉은 ‘과천 매봉‘이라 부른다. 매봉은 흔히 한자로 응봉(鷹峰)이라 쓰고 예전에 매(鷹)가 살던 봉우리라는 설명이 따른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흔치 않고 사실은 마을 앞 눈에 제일 자주 띄는 우뚝한 봉우리를 그냥 ’뫼(山)‘라 한데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뫼가 어느 날부터 뫼봉이 되었다가 매봉이 되었다 한다. 선비들이 지명을 기록하자니 매(鷹)자를 써서 응봉(鷹峰)이 되었다는 것이다.

▲청계사 절마당


비밀스런 원통사 터엔 시간을 머금은 기와 편

과천 매봉에는 나무데크를 깔았고 전망대도 설치해 놓았다. 앞으로는 관악산이 바라보이고 눈 아래로는 대공원의 전경이 펼쳐진다. 119위치표지판(1.2)에는 이수봉 3.2km 남았음을 알리고 있다. 매봉을 떠난다. 잠시 후 또 한 번 오르막이다. 매봉에서 1.2km 지나 온 오르막 위에는 헬리콥터장이 자리잡았다. 여기에도 위치 표지판이 서 있는데 절 고개 600m, 청계사 920m라고 적혀 있다. 헬기장 앞쪽 안부(鞍部) 숲에는 벤치가 놓여 있는 쉼터가 있는데 오른 김에 앞쪽 작은 등성이까지 오른다.

여기에서 절고개로 가는 길은 주등산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어지는데 이 길을 버리고 반대편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작은 오솔길이 나타나면서 길은 급격하게 고도를 떨군다. 약 300∼400m 왔을까 평탄한 능선길로 바뀌면서 높은 고압선 철탑을 만난다. 철탑 번호가 적혀 있는데 154kv는 13번, 345kv는 14번이다. 능선길을 버리고 좌측 갈림길로 내려서면 평탄지에 비밀스러운 절터가 나타난다.

아직도 어제인 듯 남아 있는 석축과, 기둥을 받쳤을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절터, 그 곳에 깨어져 흩어진 기와 편들이 시간을 머금고 있다. 아마도 사유지가 되었는지 누군가의 비닐하우스가 있는데 밭뚝에 자생한 쑥과 들나물 내음이 짙다. 혹시 체력이 약한 이들은 인덕원역 2번 출구에서 청계사행 마을버스 10이나 10-1번을 타고 종점에서 내려 탱골 골짜기 길로 들어서면 큰 힘 들이지 않고 이곳(청계동 산18)에 올 수 있다.

▲청계사


이 절은 동국여지승람이나 읍지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봉은본말사지 청계사 편에 절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원통사지(圓通寺址): 절 서쪽 5정(550m) 쯤에 있는데 석축이 남아 있다’고 했다. 다행히 최근에 의왕문화원에서 수원대에 이곳 원통사지에 대한 학술조사를 의뢰하여 문헌과 명문 기와편을 찾아내는 의미 있는 조사연구가 이루어졌고 아울러 학술대회도 열렸다. 그 결과는 세종대왕 비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가 발원해 중창한 조선왕실 원찰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조선 초 신미(信眉)대사의 동생인 김수온(金守溫)의 문집 식우집에 소헌왕후가 발원해 중창하고, 막내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이 크게 중창한 사실이 ‘원통암중창기’(圓通菴重創記)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중창기에 따르면 원통사(당시 원통암)는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홍희(洪熙) 을사(乙巳)년, 즉 1425년(세종 7년)에 한 도인(道人)이 암자를 중건하려고 서울로 와 시주를 구하던 중에 내전에서 알게 되어 소헌왕후가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내탕금을 출연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 사업을 주관할 사람으로 승려 해당(海幢)을 대표로 뽑았다 한다.

소헌왕후 사후에는 영응대군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흔적이 남은 곳이라 해서 용문사 주지 출신인 대선사(大禪師) 계안(戒眼)을 초빙해 사찰 면모를 대대적으로 일신해 1462년(세조 8) 음력 8월에 중창 낙성식을 기념한 대규모 법회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나아가 이번 지표조사에서는 홍희(洪熙)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홍희는 명나라 인종(仁宗) 때 연호로 인종이 단 1년 제위에 그쳤으니 그 해는 우리나라 세종 7년(1425년)에 해당한다. 아마도 원통사가 중창되던 해였을 것이다.

원통사 터는 비스듬한 경사지에 층을 이루어 평탄지를 조성했다. 대찰(大刹)이기보다는 견실한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밭을 일군 것 말고는 절터가 온전히 보전되어 있다. 절터에서 바라보이는 전망은 건너편 산들이 지긋이 절터를 수호하는 형상이다. 편안한 자리임에 틀림없다. 과천매봉이나 청계사를 지나 이수봉으로 가려는 이라면 잠시 다리품을 팔아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서울 근교에 이렇게 온전히 남아 시간의 자취를 전해 줄 수 있는 절터도 많지 않으니.

▲어느 스님의 흔적일까. 청계사에서…


청계산 대표 고찰 청계사, 평양조씨 조인규가 창건

내려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가파르게 내려온 길이라 다시 가파르게 오른다. 등성이에 올라 동쪽 주능선 길을 간다. 꼬불꼬불한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정취있는 길이다. 500m 지나면 절 고개에 닿는다. 청계사 280m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다. 반대편 대공원 펜스 안쪽으로는 아마도 기록에 전해지는 북암지(北庵址)가 있을 것이다. 아쉬움을 안고 청계사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 대략 200m 지점에 조그맣게 터 밭을 일구어 놓았는데 곰곰 살펴보면 오랜 기와편이 보인다. 아마도 청계사 부속 암자가 있던 곳이리라.

잠시 후 이윽고 청계사(淸溪寺)에 닿는다. 청계산을 대표하는 고찰(古刹)이다. 봉은본말사지에는 사적비(事蹟碑)를 빌어 편년을 기록해 놓았다. 고려 충렬왕 10년(1284년) 충숙공 조인규(趙仁規)가 절을 창건했다는 것이다. 충숙공 시중 조인규는 어떤 이였을까? 그는 권문세가 출신은 아니었는데 ‘나면서부터 영이하고 명민하였고 웅위하였으며 말이 적고 풍채는 수려하였다(穎異 明敏 雄偉 寡言語 美風儀)’는 것이다. 이런 그가 몽골어를 익혀 통역관이 되었다. 당시에는 온통 원나라의 세상이었다. 그는 빼어난 몽골어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원나라로 가는 세자 심(諶 훗날 충렬왕)을 수행하여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때 원나라 세조(世祖)는 그를 보고 ‘그대는 말하는 것이나 행동거지가 동국(고려)사람 같지 않다(汝 辭氣擧止 絶不類東人也)’ 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존심 상하는 말이나 그 당시에는 그에 대한 찬사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일인들은 한국인을 칭찬할 때 ‘조선인 같지 않다’고 했으니 국력 약한 백성은 자신의 나라를 부정하는 말로 칭찬 받아야 했던 것이다.

▲청계사 동종


거두절미하고, 충렬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그의 딸이 충선왕비가 되었다. 그는 청계산 계곡에 작은 소당(小堂)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내다가 1284년(충렬왕 10년) 사재(私財)를 들여 청계사를 세우고 집안(평양조씨 平壤趙氏)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1407년(태종 7년 12월)에는 고을에 복을 빌던 자복사(資福寺)를 명찰 청계사로 정(定)하였으니 광주(廣州)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또한 세종실록 1445년(세종 27)에는 광평대군(廣平大君)과 평원대군(平原大君)이 이곳에서 불경(佛經)을 읽었는데 신하들이 금할 것을 요청했지만 세종은 그 말에 따르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같이 청계사는 평양조씨의 원찰로만 머물지 않고 이 지역에 주요 사찰이 되었는데 연산군(燕山君) 때에는 도성 안의 모든 사찰을 폐쇄되자 봉은사(奉恩寺)를 대신하여 선종(禪宗) 본찰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 한 번 왕실과의 인연은 정조 때의 일이다. ‘청계사법당중건대공덕주’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의 원찰은 용주사를 지정하기 이전에 청계사를 먼저 지정하였다고 한다. 이 일과 관련 있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무인 조심태(趙心泰)였다. 그는 청계사를 창건한 조인규의 후손이다. 흔히 정조의 측근을 떠올릴 때면 번암 채제공과 다산 정약용을 떠올린다. 그러나 조심태 또한 그에 못지않았을 것이다. 수원부사(水原府使) 때 사도세자의 무덤 영우원을 수원에 이전하여 현륭원(顯隆園)이 되게 하였으니 이때까지는 용주사가 지어지기 전이라 자연스레 청계사를 사도세자 원찰로 삼게 했을 것이다. 더욱이 정조의 원행(園幸)길이 청계사에 가까운 인덕원을 지나는 길이기에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정조의 신임 하에 조심태는 수원화성 축성에 실질적인 현장 책임자였다. 우리 역사 기록문화의 정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는 그의 노력의 결실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이다. 정조실록에는 의궤에 대한 정조의 마음을 조심태에게 이야기하는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신뢰했기에 친위부대의 대장 장용대장(壯勇大將)도 맡겼을 것이다.

▲어둔골 절터


정조의 신임 각별했던 수원화성 책임자 조심태

한 때 잘 나가던 청계사도 화재의 피해도 입고 조선 후기 시주도 줄어 사세가 급격히 쇠락하던 때(1854년)에 어머니 손에 끌려 이 절에 온 9살 소년이 있었다. 계허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았는데 14살까지 글 한 줄도 배우지를 못했다. 그 해 여름 박처사라는 선비가 청계사에서 여름을 소일하게 되었다. 심심풀이로 애숭이 사미승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보니 가르치는 대로 터득하는지라 통사(通史)를 가르쳤는데 하루에 6장씩 외워 버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비상하구나. 천리마가 백락을 만나지 못했구나. 훗날 세상 사람들을 제도하리라’.

얼마 후 계허스님은 환속하였는데 이 때 사미승을 동학사 만화(萬化)화상에게 보냈다. 10년 뒤 사미승은 23세에 동학사 강원에 강백이 되어 한국 불교를 다시 일으키는 큰 법등이 되었다. 그가 바로 경허대선사(鏡虛大禪師)였다. (鏡虛集 중 鏡虛和尙 行狀 참조)

최인호씨의 소설 ‘길없는 길’의 출발 배경이 되었던 법당으로 오른다. 청계사 본당은 극락보전(極樂寶殿)이다. 아미타불이 정좌해 계신다. 아마도 조씨의 원찰로 시작하였기에 서방정토로 인도할 부처를 모신 것 같다. 연등이 절 마당에 가득하다. 법당 옆에는 종각(鐘閣)이 있다.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숙종 27년(1701년) 화주 사당, 신찬 등이 700근의 대종을 만들었다 한다. 문화재(보물 11-7)로 지정되어 있다.

같은 기록에 의하면 광해군, 인조 연간에 많은 불경 경판을 판각했는데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 역시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 30년(1448년) 인출(印出)했다는 대장경은 안타깝게 전해지지 않는다. 근년에 봉안한 부처님 열반상(와불 臥佛)을 보고 하산 길을 내려온다.

절 아래 300여m 내려오면 우측으로 평양조씨보본단(平壤趙氏報本壇)이 있다. 시원한 잔디밭에 북(北)으로 몇 개의 기념비가 보인다. 보본(報本)이란 근본을 잊지 않고 보답한다는 말이니 평양조씨 문중에서 조상의 근본을 잊지 않으려고 마련한 단(壇)인 것 같다. ‘조정숙공 사당기’와 ‘조견선생과 망경대’ 안내판이 서 있다.

이제 청계산 등산길에 오른다. 능선길을 버리고 보본단 앞 계곡길로 들어선다. ‘청계산 맑은 숲 공원’을 조성하여 예쁜 나무 데크길도 조성해 놓았다. 계곡으로 내려서니 골짜기에 떠내려 온 돌절구가 눈에 띈다. 아마도 청계사 동쪽 3정(330m)에 있었다는 잊혀진 이름의 절터에서 떠내려 왔는가 보다.

▲옛터에 우물은 남고. 어둔골에서…


최인호 소설 ‘길 없는 길’ 배경, 경허대선사 일화

잊혀진 절은 계곡 옆으로 평탄지만 남았는데 그래도 아쉬워 돌절구 하나 남겼나 보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우측 길을 택해 오르면 임도에 닿는다. 임도를 가로 질러 오른다. 가파른 길 숨 좀 모으다 보면 국사봉에서 이수봉으로 가는 능선 길에 도착한다.

길 안내판에는 좌측 이수봉, 우측 국사봉, 온 길 방향 청계사라고 쓰여 있다. 벤치도 있어 한 숨 돌리며 바람 맞을 만하다. 이제 이수봉 방향으로 출발이다. 시원한 능선 바람 맞으며 가다 보면 재미있는 안내판과 만난다. ‘말레이 곰 꼬마’가 포획된 자리를 알리는 안내판이다. 그렇다, 기억난다.

말레이 곰이 대공원에서 빠져나와 청계산으로 도망친 일이 있었다. 그 때 혹시나 사람을 해칠까 해서 등산도 금지하고 천 몇 백 명이 곰 잡으러 나선 일이 있었다. 그것이 2010년 12월 열흘 동안 벌어졌던 일이었구나. 다행히 사람 해치지 않고 여기에서 잡혔구나.

드디어 이수봉(貳壽峰) 정상석이 서 있는 이수봉 앞 봉우리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국가관측시설물이 자리하고 있다. 어떤 이들 말로는 이 자리가 본래 이수봉이라 한다. 확인은 할 수 없으나 타당성은 있다. 국가시설물이 있어 등산로는 우회한다. 이제 하산이다. 지명유래를 알 수 없는 목배등(철쭉능선)을 내려오다가 이정표 2.2가 서 있는 목배등 삼거리에서 좌측 계곡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안내판에는 옛골 1.6km, 지나온 이수봉은 1.7km를 알리고 있다. 가파르게 비탈길을 내려오면 옛 마을이 있던 여둥골(어둥골, 어둔골)이다.

신군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농사짓고 살던 산골마을이었다. 미군부대 사격장 가까운 마을이라고 모두 소개(疏開)시켰다. 이곳에서 농사짓고 있는 주민들 말은 이곳을 절골이라 불렀다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청계사 동쪽 10리쯤에 정금사지(井金寺址)가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 때 정비해 놓은 샘에 하늘이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묻고 싶다. 정금사 샘 맞는거요? 길 따라 옛골로 내려온다.


교통편 - 4호선 과천역 5번 출구

걷기 코스 - 과천역 ~ 과천 매봉 ~ 원통사지 ~ 절고개 ~ 암자터 ~ 청계사 ~ 평양조씨보본단 ~ 계곡길 절터 ~ 국사봉능선 ~ 이수봉 ~ 목배등(철쭉능선) ~ 목배등삼거리 ~ 여둥골(추정 정금사지) ~ 옛골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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