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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55 (下)] 청계산 종주길

나라를 생각하는 봉우리, 국사봉…고려시대 충신 조윤의 숨결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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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94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4.09.04 09:25:10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청계산을 남북으로 잇는 종주길에 오른다. 출발은 하우현성당이다.

이곳으로 오는 버스편은 여러 곳에서 출발한다. 303번(분당~인덕원), 103번(사당~판교), 1303번(안양~분당), 1550-3(수지~과천) 등이다. 모두 4호선 인덕원역을 경유하는데 하차지점은 원터골이다. 예전 하우현 고개를 넘기 전 쉬어가는 동양원(洞陽院)이 있었기에 마을 이름도 원터가 되었다. 

이 마을 곁에는 유서 깊은 천주교성당이 있다. 하우현성당이다. 이제는 유명해졌으나 10년 전만 해도 아주 고즈넉한 작고 사랑스런 성당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앉아서 미사를 볼 수 있게 한 소반만한 작은 상에 얹어져 있던 성경은 신자가 아닌 필자조차 그곳에 앉아 묵상을 하게 만들었으니, 그 날의 감동은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전히 큰 변화는 없는데 예전과는 달리 무언가 광(光)을 낸 것 같은 낯섦도 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이래 신자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공소가 생겼다한다. 1894년 10간의 목조강당이 세워진 이래 1965년 지금과 같은 아담한 교회당이 지어졌다 한다. 한편 눈길을 끄는 것은 1906년 세워진 한옥 사제관이다. 신선한 느낌을 주는 아담한 건물이다. 이제는 경기도기념물이 되어 보호받고 있다. 오래오래 변하지 않고 이곳을 지키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작은 행복을 주었으면 좋겠다.

길을 나서 하우현 방향(판교쪽)으로 올라간다. 길은 구도로이다. 인덕원과 판교를 잇는 신도로와는 달리 구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하다. 구도로 길 끝에서 돌아보면 신도로 아래로 굴다리처럼 연결된 구간이 보인다. 이 굴다리 밑 길로 잠시 돌아가자. 그 곳에는 ‘도깨비 도로’가 있다. 도로가 착시(錯視)현상을 일으켜 브레이크를 풀어 놓은 차가 마치 언덕을 오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다시 길을 돌아 하우현 방향으로 오른다. 하우현에는 우담산과 청계산을 잇는 육교가 놓여 있다. 이 길은 광교~청계 종주길이며 성남시계를 잇는 산길이기도 하다. 10여 년 전 ‘청계산’이라는 ID를 쓰는 산악인이 광교산에서 출발하여 청계산까지 이어 종주하는 코스를 소개했는데 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 근교에서 27km에 이르는 육산(肉山: 흙산)의 종주길을 만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하우현을 넘을 방법이 없었기에 위험한 자동차길을 무단 횡단하거나 멀리 하우현성당 앞 굴다리를 통해야 했다. 이제는 육교가 놓여 광교~청계 종주코스는 수도권 트레커들에게 꽃이 되었다.

▲운중동 저수


하우현은 해동지도 광주부편이나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에는 학현(鶴峴)이라 기록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에서 시작되는 개울을 학고개천(鶴古介川)이라 했으니 예부터 민초들은 학고개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청계산 종주길은 이곳 하우현에서 능선길로 국사봉(國思峰)으로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오늘은 국사봉 계곡길로 올라 보련다. 서울외각고속도로가 생기지 않았던 15년 전까지는 계곡길을 통해 국사봉에 오르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국사봉 남쪽 계곡은 여름이면 물도 제법 있어 계곡에 발 담그러 오는 이들도 많았다. 이제는 이곳을 찾는 이들이 드물다.

하우현에서 한국학연구소가 있는 운중동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운중농원 안내석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잠시 더 내려간 곳 좌측 언덕에 비스듬히 공사장이 보인다. 공사장 방향으로 올라 왼쪽으로 꺾는다. 길은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통과하는데 81이라는 번호가 쓰여 있다. 잠시 후 국사봉에서 발원한 아담한 계곡수를 만난다. 계곡을 끼고 길은 제법 확연히 보인다. 산나물을 채취하거나 계곡에 발 담그러 온 이들이 지난 발자취이다.

▲망경대


국사봉으로 향하는 길은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데 오를수록 점점 희미해져 간다. 때로는 바위구간도 있어 잠시 길을 찾기 어렵기도 하다. 그럴 때면 계곡을 끼고 오르면 다시 길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30여 분 오르니 잠시 등산로와 계곡 사이로 평탄지가 나타난다. 이름은 잊혀진 절터이다(운중동 산 70-2, GPS N37도 23분 58초/ E127도 02분 52초). 절터에는 잡석의 축대가 일부 남아 있고 숲 속에 기와편도 보인다. 한 때 굿당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국사봉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아마도 그럴 개연성도 있다.


국사봉 주변엔 기와편, 계곡수도 만나

길은 인적이 드물어 숲은 자연으로 돌아갔다. 문득 반가운 망태버섯도 만난다. 예전에는 청계산에 많았는데 이제는 거의 찾을 수 없게 된 버섯이다. 반갑구나, 이곳에 숨어 있었구나. 한참을 땀 흘리면서 가파르게 올려치니 위쪽에서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올라 온 곳은 운중동 쪽 국사봉 바로 아래 능선길이다. 국사봉(國思峰)으로 오른다. 국사봉은 특이하게도 생각 사(思)자를 쓰고 있다. 나라를 생각하는 봉우리란 뜻이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서 나라를 생각했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은 국사봉 정상에 세운 정상석(頂上石)에서 찾을 수 있다. 정상석 설명문에는 國思峰 540m라 쓰고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청계산에 의거하던 고려의 충신 조윤(趙胤)이 멸망한 나라를 생각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의왕의 전통과 문화 중에서)’라 하였다.

그런데 청계사 앞 ‘평양조씨보본단’에는 평양조씨 문중에서 세운 조견(趙狷: 초명 胤)선생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국사봉에 대한 기록은 없고 망경대(望京臺)에 대한 기록뿐이다. 봉은본말사지 청계사편에는 국사봉의 이름이 國師峰으로 기록되어 있고 ‘속칭 길마재이며 본래 굿봉이니 고대 제단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 기록을 읽은 날 필자는 국사봉 주변을 곰곰이 살펴보았다. 깨진 기와편들이 여럿 눈에 띈다.

▲국사봉 표지석


그렇다, 국사봉 정상에는 제(祭)를 지내는 당집(堂집)이 있었을 것이다. 서울 남산 정상에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모시던 국사당(國師堂)이 있었듯이 이곳에도 당집이 있어 제를 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이 봉우리 이름은 굿봉 또는 國師峰이 제 이름일 것 같다. 아래 골자기를 오르다 지나온 옛절터도 한국사지총람의 기록처럼 ‘예전에 굿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했으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개명한 오늘날에도 북한산 북녘, 정릉골, 아차산 등 많은 산자락에서 굿당이 민초들의 힘든 삶을 위로하고 있으니 그 옛날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국사봉 이정표는 이수봉까지 1.5km를 알리고 있다. 이수봉으로 가는 능선길은 조금씩 오르락내리락 하며 재미있게 이어진다. 청계사 갈림길 지나고 2010년 말레이곰 꼬마가 대공원을 탈출했다가 다시 잡힌 능선도 지나면 국가관측시설이 자리한 봉우리 좌측 능선에 이수봉(貳壽峰)이 자리하고 있다. 이름도 특이하게 두(貳) 목숨(壽) 봉우리(峰)라니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일까? 고맙게도 아랫마을 상적동 주민들이 정상석을 세우고 유래를 기록하였다.

‘이수봉(545m): 조선 연산군 때의 유학자 정여창 선생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이 연류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때 이 산에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 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 그랬었구나.

무오사화는 조선 연산군 때 발생한 최초의 사화(士禍: 선비들이 정치적으로 화를 입은 사건)였다. 연산군의 선왕 성종 때에는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파 김종직(金宗直)과 그 제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 등이 대거 핵심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니 기성세력 훈구파는 큰 위협을 느께게 되었다. 성종 승하 후 성종실록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項羽가 신하로서 楚의 義帝를 폐한 것을 빙자해 세조가 단종을 폐위, 사사한 사건을 비유한 글)이 이 때 문제가 되었다.

훈구파의 유자광은 상소를 올려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한 것은 대역부도(大逆不道)한 행위라고 연산군을 흔들었다. 결과는 이미 죽은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파내어 다시 벰)하고,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무록(誣錄)했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凌遲處斬)을 당하였다. 정여창 등도 불고지죄(不告之罪)로 곤장 100대에 3000리 밖으로 귀양을 가는 등 많은 신진사류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이었다. 이 때 곤장 100대를 맞고 귀양길에 오른 정여창은 죽음을 모면했는데 그 후 이 산에 은거했는가 보다.

▲하우현성당 사제관


연산군 무오사화의 비극이 담긴 이수봉

이수봉을 지나 능선길을 직진하면 과천 매봉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니 헬기장 지나 조금 내리막 헬기장 갈림길(이정표 1.5)에서 우측길로 내려서자. 갈림길에는 막걸리 파는 아저씨가 있고 층층길 아래는 넓게 평토해 놓은 평탄지가 있다. 여기서부터는 동자샘 지나 옛골로 내려가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있다. 표고 510m를 알리는 절고개 능선이다. 이정표에 이수봉 500m, 청계사 1000m, 망경대 1300m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앞쪽(북쪽) 오르막길 뒤로 석기봉이 보인다. 땀 한 번 흘리고 오른다. 석기봉이라 할 만큼 기이한 돌이 있는 봉은 아니다. 이정표(1.8)가 서 있는데 지나온 이수봉과는 1.0km, 앞쪽 망경대까지는 500m 남았다. 석기봉 뒤로는 잔디 덮힌 헬기장이 있고 눈앞으로는 망경대가 선뜻 다가온다.

이곳에서는 어느 길로 갈지 등산로를 정해야 한다. 망경대(望京臺)를 올랐다 갈 것인지 아니면 우회하여 혈읍재,  매봉 방향으로 갈 것인지를. 왜냐하면 망경대를 올랐다가 좌측으로 우회해 가는 길은 쾌적하게 다듬어져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종주길은 망경대 올랐다가 가야한다.

주능선길 500m 비스듬히 올라 잠시 우람한 바위를 잡고 오르면 일망무제(一望無際: 막힘없이 트인 전경) 주변 산들이  다가온다. 과연 만경대(萬景臺: 온 경관을 다 볼 수 있는 곳)로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 되고 고려 충신 조윤(趙胤: 狷으로 개명)이 이곳에 온 후 이름이 바뀌어 망경대(望京臺: 서울을 바라 보는 곳)가 되었다 한다. 평양조씨보본단에는 이 때의 일을 기록해 놓았다. 요약하면 이렇다.

▲도깨비도로


이 봉우리의 본래의 이름은 ‘만경(萬景)’이라 했는데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만경(萬景)이 ‘망경(望京)’으로 바뀌었으니 고려 충신 조견(본명은 조윤 趙胤)으로 인해서였다. 조견은 청계사를 창건한 충숙공 조인규(趙仁規)의 증손이며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趙浚)의 아우로 고려를 빛낸 충신이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으로 은거하였다.

이 때 이름을 견(狷)으로 고치고 자(字)도 종견(從犬)이라 했으니 나라가 망했는데 죽지 않음은 개와 같고 또 개는 주인을 알아보고 의를 지키므로 그렇게 했다. 두류산에서 청계산으로 거처를 옮겨서는 청계사에 의거했는데 매일 상봉인 망경대(望京臺)에 올라 송도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서쪽 아래에 있는 마왕굴(일명 오망난이굴)에서 흘러 나오는 찬물로 갈증을 달랬다는 것이다. 

조견이 청계산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태조 이성계는 친히 청계산을 찾아 그에게 조선왕조에 들어와 함께 일하도록 권유했으나 따르지 않자 조견의 마음이 금석(金石)같음을 알고 그를 위해 석실을 지어주도록 했는데 지금 원통동(圓通洞) 석축이 그 흔적이라 한다. 그 후 공은 수락산 기슭 송산마을로 다시 은거하였다.

그런데 이 때 조견 선생이 올랐던 망경대는 오늘 필자가 오른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본래 청계산 최고봉 망경대(618m)는 이곳이 아니라 앞쪽 군부대가 있는 곳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상에 있다는 금빛물 금정수(金井水)도 그곳에 있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금정수는 석기봉 옆이라고도 한다)

▲혈읍재


망경대 암봉을 돌면 바위샘물(1.9)이라 쓴 이정표를 만나다. 눈비비고 보아도 샘은 찾아지지 않는데 다듬은 넓적한 돌에 작은 돌절구 모양(凹) 글자가 파져 있다. 이 산봉우리에 무슨 돌절구가 있을 리는 없고 샘물과 관련된 도구는 아니었을까? 적어도 1000cc는 들어갈 공간이다. 혹시 금정수라 한 샘이 이 ‘바위샘물’이라 써놓은 곳과 어떤 관련이라도 있는 것일까? 온갖 생각이 일어나지만 궁금함만 더할 뿐이다.


망경대 암봉 돌면 돌절구 바위샘물

좌측(과천쪽) 마왕굴 쪽으로 내려서서 망경봉을 우회한다. 길을 정비해 놓지 않아 산객의 발길에 만들어진 길이다. 군부대가 있는 망경봉을 270도 돌면 비로소 혈읍재로 내려가는 능선에 닿는다. 여기서 조심할 일은 180도 돌아 직진하면 혈읍(血泣)재로 갈 수 없다는 점이다. 고개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피(血) 눈물(泣)을 흘린 고개라니... 이곳에서 700m 직진하면 매봉에 닿고, 서쪽 과천쪽으로 내려가면 마왕굴로,  동쪽으로 내려가면 옛골에 이른다.

다행히 혈읍재에는 ‘과천문화를 사랑하는 모임’에서 지명에 대한 설명판을 붙여 놓았다. 내용은 이러하다.  ‘조선조 영남 사림의 거유인 일두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성리학적 이상국가의 건설이 좌절되자 은거지인 금정수터를 가려고 이 고개를 넘나들면서 통분해서 울었는데 그 피울음 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 하여 후학인 정구(鄭逑)가 혈읍재라 명명하였다’는 것이다. 이수봉과 함께 이곳도 일두 정여창 선생에서 비롯한 지명이었구나.

능선길 700m 지나 매봉에 도착한다. 자연석 정상석에 582.5m라 썼고 뒷면에는 유치환 선생의 詩 행복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건마는
머리 위에 항시 푸른 하늘 우러렀으매
이렇듯 마음 행복되노라’

문득 마음이 상쾌해진다. 매봉을 뒤로 하고 100m 내려오면 전망 좋은 바위에 또 하나 비석이 서 있다. ‘청계산 매바위  578m’. 이곳에서 잠시 내려온 능선 50m 안쪽에 ‘특전용사 충혼비’가 있다. 1982년 6월 작전 훈련 중 악천후로 수송기가 이 청계산 능선에 추락하여 53인의 용사가 산화하였다. 마음 아프구나.  또 마음 아픈 것은 비석이 너무 왜소하고 짜임새 없다는 느낌이 드는 점이다. 충혼비를 돌아보고 내려와 돌문바위를 한 바퀴 돈다. 마치 문(門)처럼 뚫려 있어 돌문바위라 부른다.


만경봉 지나 혈읍(血泣)재 가는 길

이제 옥녀봉(玉女峰)을 찾아 간다. 여기에서 옥녀봉까지는 3km가 넘는 하산길인데 갈림길도 많고 이정표도 옥녀봉으로 쓰여 있지 않아 초행자는 길을 잃기 쉽다. 길을 잃지 않을 노하우는 갈림길에서 모두 좌측길을 택하면 옥녀봉으로 갈 수가 있다. 옥녀봉은 특이한 봉우리는 아니다. 고도 375m의 흙산일 뿐이다. 그곳에는 서초구에서 세워 놓은 안내판이 있는데 ‘봉우리가 예쁜 여성처럼 보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궁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근세에 과천에는 우산 신종묵(愚山 愼宗默)이란 분이 계셨다. 그 분은 과천의 풍광을 군동팔경(郡東八景)이라 이름 붙이고 8개의 멋진 풍광을 이야기했다. 중국 호남성 동정호 일대의 명승을 그린 그림이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인데 남송, 북송 아울러 대유행을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 그림이 그려졌다. 시문과 소리에까지 소상팔경은 퍼져나갔고 이를 모방하여 ‘OO팔경’이라는 표현이 정형화 되어갔다. 군동팔경도 이와같은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과지초당


그 내용을 보면,  ‘한천수류(寒川垂柳, 한내에 드리운 버들)’, ‘부림석연(富林夕煙, 부림의 저녁연기)’, ‘선암어적(仙岩漁笛, 선암 어부의 피리소리)’,‘금평운가(金坪耘歌, 황금들에 김매는 소리)’,‘옥봉추월(玉峯秋月, 옥녀봉의 가을 달)’, ‘관악백운(冠岳白雲, 관악산 흰 구름)’, ‘남령청설(南嶺晴雪, 남태령의 개인 눈)’,‘청계취우(淸溪驟雨, 청계산 소낙비)’이다. 옥녀봉의 유래로 삼을 만한 내용이다.

이제 옥녀봉을 떠나 양재화물터미날로 내려간다. 약 2km의 평탄한 외길이다. 긴 청계산 종주길 끝에는 양재역으로 가는 08번 마을 버스가 있다. 

한편 종주길은 2가지 선택 여지가 있다. 하나는 옥녀봉 마지막 갈림길인 일송정 쉼터에서 우측길을 따라 신원동 원터골로 내려가는 코스다. 원터골에 닿으면 길옆 미륵당에 미륵불이 세월을 건너 뛰어 앉아 계시고 앞마당에는 고졸한 삼층석탑이 있다. 아마도 잊혀진 고려 때 절터일 것이다.

또 하나의 옵션은 옥녀봉 전 200m 지점에서 과천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하산하면 삼부골마을인데 이 길은 경마장으로 이어지는 추사로와 만난다. 추사로를 따라 서울 방향 1km 남짓 가면 추사의 마지막 몇 년을 보낸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닿는다. 과지초당은 옥녀봉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

추사의 부친 김노경의 묘소도 70년대까지 옥녀봉 기슭에 있었다. 추사도 생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지내며 봉은사에 자주 들렸다. 운명하기 3일 전 쓴 봉은사 ‘板殿’도 이런 인연에서 비롯한 것이다. ‘七十一果 病中作’이라 썼는데 果는 과천을 뜻하는 말이니 추사의 과천은 옥녀봉 기슭이다. 추사는 생의 마지막 기간을 옥녀봉 곁에서 살았던 것이다. 추사를 기념하여 초당 옆에는 최근에 추사박물관이 들어섰다.


교통편 - 4호선 인덕원역 2번 출구 버스 303 환승 외(1303, 103, 1550-3)

걷기 코스 - 하우현성당 ~ 도깨비도로 ~ 하우현 ~ 국사봉계곡길 ~ 국사봉 ~ 이수봉 ~ 석기봉 ~ 망경대 ~ 혈읍재 ~ 매봉 ~ 옥녀봉 ~ 양재화물터미널(또는 원터골 / 과지초당 )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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