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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59)] 관악산 문원폭포 ~ 육봉 ~ 불성사 ~ 팔봉 절터

관악산 골짜기 속 ‘비밀의 절터’, 법등 밝혔을 석축·돌층계 흔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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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05-406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4.11.27 08:50:38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관악산의 옛절터를 생각하면 흔히 일명사지와 관악사지가 떠오른다.(이야기가 있는 길 (25) 참조) 그러나 관악산에는 비밀스럽게 숨어 있는 또 다른 절터가 있다. 산객들의 발길이 자주 들리지 않는 골짜기에 숨어 궁금증을 더하게 하는 절터. 이런 늦가을에 찾아가기에는 제격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험한 산길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4호선 전철을 이용하여 정부청사역 6번 출구를 나선다. 앞쪽 수자원공사 방향으로는 기술표준원, 국사편찬위원회, 공무원교육원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이 방향으로 우향우. 한적한 가을 길에 은행잎이 노랗게 길을 덮었다. 이렇게 약 1km 오르면 기술표준원 펜스가 끝나는 지점에 백운사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용운암 마애승용군이라고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문화재를 알리는 안내판도 붙어 있고 晨鷄覺世道祖聖墓(신계각세도조성묘)라고 쓴 비석도 길을 지킨다. 이제 안내판이 가리키는 대로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펜스 사이 길로 들어간다. 50m쯤 갔을까 펜스가 끝나면서 관악산의 남쪽 줄기와 만난다.

좌측으로는 마애승용군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는데 이 방향으로 숲 사이 앞쪽 바윗길을 잠시 오르면 철분(鐵分)이 많은 바위에 승려(僧侶)인 듯 보이는 다섯 어른의 얼굴상이 있고 그 중 한 어른은 작은 애기를 안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다섯 어른 상을 승려로 보아 마애승용군(磨崖僧容群 바위에 새긴 승려 얼굴들)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팔봉능선 뒤 절터


필자는 이 다섯 어른상이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으로 설법하고 비구(比丘)가 되게 한 교진여 등 오비구(五比丘)상이 아닐까 의문도 던져 보았지만(이야기가 있는 길 (25)) 아기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래의 인물상을 볼 때 더욱 흥미로운 주제를 던지는 인물상으로 느껴진다. 과연 다섯 어른과 한 아이는 누구일까?

적어도 고려 때 새겨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들이 던지는 수수께끼는 무엇일까? 답을 하기에 내게는 아직 상상력이 부족하다.

승용군을 보고 되돌아 내려와서 등산로로 들어선다. 잠시 후 길안내 표지판2-3을 만나는데 그 곳에는 성묘(聖墓)라 부르는 묘가 있다. 길 입구에 서 있던 비석은 이 묘를 알리는 것이었다. 안내판의 설명은 이 곳이 각세도(覺世道)라는 종교를 세운 리선평(李仙枰)이라는 분의 묘라는 것이다. 계곡 옆길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남양 홍씨 묘가 자리잡고 있다.

▲팔봉능선. 예전에는 불성봉이라 했다.


정부 청사가 이전되기 전 이곳 문원리(文原里) 일대는 남양 홍씨들의 집성촌이 있었다. 지금도 길 이름을 ‘홍촌말로’로 지은 길이 있으니 아마도 묘가 있는 이곳 일대는 남양 홍씨 소유였을 것 같다. 묘 주변을 살펴보면 아직도 분청사기(粉靑沙器)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무덤 일대는 옛 분청 가마가 있던 곳이었다. 아쉽게도 도요지의 흔적은 흩어진 파편으로만 남았다.

다시 이곳에서 등산로 따라 100여m쯤 오르면 우측 숲 사이로 바위산이 시작되는데 조심스레 살피면 사람들이 바위로 다가간 발자취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곳이 있다. 그 안쪽 바위에는 ‘미륵보살’이라 쓴 선각(線刻)의 민불이 새겨져 있다.

▲육봉능선. 국기봉이 보인다.


분청사기 파편이 알려주는 도요지 흔적

불교의 미륵불 형상은 아니고 민간신앙으로 새긴 듯한데 목에는 일원상(一圓相)의 메달을 걸고 좌로는 ‘미륵보살’ 우로는 ‘밀양박씨 고업’이라고 선각되어 있다. 아마도 아랫마을 어느 밀양 박씨가 치성을 드렸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돌에 이름을 적어 미륵보살 발치에 쌓아 놓았다. 아직도 영검함이 만만치 않으신가 보구나.

이곳에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나무다리(木橋)를 지나 이내 마당바위에 닿는다. 마당바위 아래 위로는 두 개의 아담한 폭포가 있다. 흔히 사람들이 아래 문원폭포, 위 문원폭포(서 문원폭포)라 부르는 폭포들이다.

마당바위는 널찍하여 쉬어가기 좋은 곳이고, 비라도 좀 오는 계절에는 두 문원폭포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이곳에서의 일반적 등산로는 우측으로 올라 일명사 터를 거쳐 연주대로 향하는 것인데 오늘은 반대방향으로 길을 잡아 두 군데의 숨은 절터를 찾는 길을 선택한다. 

▲문원계곡 절터


그런데 문제는 이 길이 관악산 등산로 중 상당히 험한 길이라는 점이다.  서 문원폭포 위 계곡길 옆 약 100m 지점에는 옛절터가 있다. 이 절터를 들려 관악 주능선으로 나아가는 루트는 육봉능선을 오르거나 문원계곡(문원폭포 위 계곡, 육봉능선과 장군봉 능선 사이 계곡)을 통과하는 루트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관악산 등산에 필요한 등산화는 목이 길고 바위 접착성이 좋은 바닥을 가진 것(주로 리찌화)이 바람직한데 특히 오늘의 코스를 오르려면 목이 긴 리찌화를 신을 필요가 있고, 단독 등정은 삼가하시기를 권한다. 이렇게 준비가 되었으면 마당바위에서 서 문원폭포 방향으로 향하지 말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앞쪽(북쪽) 작은 골짜기로 들어서자. 이내 바로 좌측 장군봉 방향으로 오르는 산길로 이어진다. 이 길은 서문원폭포 위를 지나 바로 계곡을 끼고 이어진다.

그 계곡길로 100m 쯤 나아가면 고즈넉한 옛절터를 만난다. 석축과 돌층계와 기와편이 언젠가 법등(法燈)을 밝혔을 옛터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아쉽게도 절 이름도 언제 세워졌다가 언제 법등이 꺼졌는지 기록도 기억하는 이도 없다. 그저 흔적만 남은 절터…잠시 이제 주능선으로 가는 길을 잡아야 한다.

첫째, 육봉능선으로 오르는 길이다. 아슬아슬한 구간이 이어지는 6개 봉우리를 넘는 코스인데 리찌 등산 경험이 있으면 스릴 넘치는 코스가 되는 반면 고소공포증이 있는 이는 이 코스는 택하지 말아야 한다. 이 길을 오르는 출발점은 올랐던 마당바위로 다시 돌아와 서문원폭포 쪽으로 잠시 오르면 좌로 평탄지가 보이면서 119 안내목 2.5-1이 서 있다. 이곳에서부터 올라 6개 바위봉을 넘어가는 코스이다. 다 오르면 약 1시간 뒤 태극기 휘날리는 제1국기봉에 도착한다.

▲옛도요지의 흔적


둘째, 문원계곡으로 오르는 코스이다. 절터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계곡길을 따라 오른다. 8부 능선까지는 등산로가 확실한데 그 위로는 이 길로 오르는 사람이 적은 관계로 등산로가 불분명해진다. 이럴 때는 되도록 좌측방향을 택해 오르면 육봉능선길과 가까이 가는 계곡코스가 된다. 마지막에는 상당히 가파르고 길도 흐릿한 점을 감안해야 하는 코스이다.

셋째, 험한 코스 산행에 자신이 없는 이는 절터에서 하산하여 버스를 타고 안양 관양동 코스로 오르기를 권한다. 제1국기봉으로 오르는 가장 수월한 코스이다.

필자는 이 길을 이 주에 걸쳐 육봉능선 코스로 한 번, 문원계곡 코스로 한 번 올랐다. 험하기는 하여도 이렇게 올라 (제1)국기봉에 닿으면 관악의 팔봉능선, 주능선, 학바위 능선길이 확 눈으로 들어온다. 눈으로 들어온 그 풍경들은 이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혹시 마음이라도 찜찜한 날이 있었다면 이런 경험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국기봉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그 아래에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다. ‘관14 제1국기봉 관악산 정상 2.02km, 불성사 0.45km’. 또 다른 이정표도 서 있는데 ’2-8 국기봉 정부청사역 3km, 연주암 1.1km’이라고 쓰여 있다. 아! 4호선 정부청사역에서 내려 이곳까지 3km를 왔구나.

흔히 산길 이정표의 거리는 도상거리(圖上距離)로서 지도 위에서 평지처럼  계산한 거리이므로 실제 고도나 산길의 난이도 굴곡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산행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동절기 늦은 시간 산길에 오른 이들은 더욱 신경 써야 한다. 가령 설악산 공룡능선길은 도상거리 5km인데 산행시간이 일반적으로 4시간 내외가 소요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오늘 오른 국기봉코스도 관악의 공룡능선 같은 곳이다.

▲아기를 안고 있는 보살


팔봉능선 아래 아늑하게 자리잡은 불성사

국기봉 이정표에서 보면 앞쪽 팔봉능선을 배경으로 바로 눈 아래 아담한 절이 납작 엎드려 있다. 450m 아래 불성사(佛性寺, 佛成寺, 佛聖寺)이다. 옛 기록에는 불성사 뒤 팔봉능선 봉우리를 불성봉(佛成峰, 佛聖峰), 의상대(義湘臺)라 불렀다.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 불성사편에는 불성사의 동봉(東峯)은 인봉(金+刃 峰), 나한봉(羅漢峰)이며 남봉은 문필봉(文筆峰) 원효대(元曉臺)라 하였다. 산 이름, 봉우리 이름도 시대에 따라 그 시대 사람들이 부르기 좋은 스타일로 바뀌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가파른 내리막길로 불성사에 닿는다. 절터는 옛자리이며 돌절구와 우물의 물맛은 옛것이로되 옛절의 모습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봉은본말사지에 전하는 불성사약지에는 신라 문무왕 15년(675년) 의상대사가 소암을 짓고 자리했다 한다(新羅文武王十五年也 巨智義湘祖師 傳授淸淨心法 未見其性故 乃棲於漢陽之南 果川冠岳山中…) 

이쯤 되면 왜 불성사 뒷봉이 의상대인지 짐작되는 바가 있다. 의상이 뒤에 앉으셨으니 어찌 원효가 아니 오시랴? 앞 봉은 원대대가 되어 짝이 맞는다. 함허득통 화상도 관악산 의상암에서 득도하였다 하는데 모름지기 이곳이 아니었을까 봉은본말사지를 집필한 안진효 법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불성사 각원선사 사리공


또한 세종실록에는 불성봉이 무너져 5명의 승려가 압사한 슬픈 기록도 전한다. (果川縣冠岳山佛成峯, 崩壓僧舍, 五人死 1428년 5월) 선조 때(1590년)에는 절이 불타 재창하였고, 1905년에는 또다시 절에 불이나 연로한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소사(燒死) 했으며, 1936년에도 절이 불타는 아픔을 겪었다. 이중환 선생의 택리지(擇里志)에서 관악산을 화성산(火星山)이라 했는데 유독 불성사는 화재의 아픔이 많았다. 그 결과 문화재로 등록될 만한 옛 것은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듯하다.

용주유고(龍洲遺稿, 선조 효종간 학자인 용주 趙絅선생 유고집)에 의하면 이곳 불성사에는 관악사에서 가져온 높이가 수척이나 되는 큰 옛향로가 있었다 한다. (冠岳寺古銅罏跋) 남아 있었다면 모름지기 큰 보배가 되었을 것을. 봉은본말사지 기록에 남아 있는 석가상, 아미타불상, 나한상, 독성상, 여의관음상, 입암사(立巖寺)에서 옮겨 왔다는 천불탱, 그밖에 신중탱, 칠성탱, 산신탱들도 한국전쟁 중에 일실된 듯하다. 특히 나말려초 작품으로 추정된다는 독성과 여의륜관음은 향로 못지않게 아쉬움을 남긴다.

불성사는 시인 묵객이 찾아 몸과 마음을 쉬던 곳이기도 했으며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요새 말로 하면 고시생이 공부하던 곳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불성사와 인연을 맺은 이들의 글들이 그들의 문집에 많이 남아 있다.

▲관악 주능선. 불꽃바위가 눈 앞에…


청천당 심수경 선생이 남긴 불성사 시(詩)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청천당(聽天堂) 심수경 선생은 75세, 81세에 득남했다는 전설적 인물인데 그의 시집에 불성사에 대한 3편의 시를 남겼다. 호(號)처럼 하늘의 뜻에 따르고(聽天) 불성사 산길 자주 오르며 몸과 마음을 닦으셨던 모양이다. 옥담시집(이응회), 동악집(이안눌), 관양집(이광덕), 본암집(김종후), 존재집(박윤묵), 난곡집(정길)에도 불성사에 대한 시편이 남아 있다. 잠시 시 한 줄 읽고 가자.

방 속 누워 있기 진력나기에 서봉에 올랐네 (厭卧深房西上峰)
기분 좋게 밝은 달 꿰차고 솔바람 속에 섰네 (好携明月立松風)
아득한 바다색 하늘 끝은 어디일까? (微茫海色天何際)
한밤 고요히 내리는 가을 소리 (寥落秋聲夜正中)

조선 후기 학자 김종후의 본암집에 실려 있는 불성사의 달밤(佛聖寺月夜)이라는 시의 앞부분이다.

범 그림을 그려 놓은 요사체 앞을 돌아 절 좌측으로 가면 바위 아래 요사이 세운 부도들이 있다. 불성사에 주재하다 입적한 스님의 부도도 있고 신도의 부도도 있다. 이 바위를 끼고 좌측으로 돌아가면 바위에 작은 함하나 넣을 만한 텅빈 사각 구멍이 보인다. 이른바 마애부도라 하는 입적한 이의 유골(舍利)함을 넣는 사리공(舍利孔)이다. 그 사리함이 탐났는지 함도 유골도 없어지고 텅 빈 공간만이 한 시대 이 땅에 살다간 이의 흔적으로 남았다.

▲불성사


구멍 옆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比丘覺圓禪師 丙辰八月 日’ 아마도 정조 20년(1796년) 팔월 어느 날 왔던 곳으로 돌아간 한 비구의 흔적이다. 다행이 깨우침(覺)이 원융(圓融)하셨다니…나무아미타불.

절을 되돌아 나와 내려왔던 길로 잠시 접어들면 좌로(북) 들어가는 사이길이 보인다. 이 길로 비스듬히 4~5백m 오르면 팔봉능선으로 갈라지는 갈림목이다. 제1국기봉에서 오는 관악주능선으로 돌아온 것이다. 제2국기봉을 알리는 119 이정표가 서 있다. 앞으로는 비죽비죽 솟아오른 능선길 바위들 너머로 기상대와 정상 옆 안테나들이 보인다. 연주대까지 2km도 남지 않은 곳이다.

아쉽지만 오늘은 정상까지 가지는 않는다. 주능선길 3~4백m 진행하면 한 눈에 불꽃처럼 우뚝 서 피어오르는 바위를 만난다. 산객들이 알아보고 ‘불꽃바위’라 이름 붙인 바위이다. 여기에서 좌측 계곡길로 하산이다. 팔봉의 연봉을 좌로 끼고 내려가는 길인데 우측으로는 거리를 두고 학바위 능선이 벋어나가고 있다. 두 능선이 협시(挾侍)하는 계곡길이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길이라 언제나 고요하다. 400여m 내려왔을까 가파른 길 끝날 즈음 평탄지에 단풍나무가 붉은 빛을 자랑하고 서 있다. 그 아래에는 언젠가 자리했을 절의 초석이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쌓아 놓은 석축, 주변의 평탄지 규모로 보아 어느 만큼의 규모를 갖춘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하정


계곡에는 기와편들이 보이는데 국화문(菊花紋), 수파문(水波紋)이 보인다. 아마도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향화(香火)를 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아직 이 절터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하였다. 절터에는 아직도 정한수를 졸졸 솟아내고 있는 샘이 살아 있다. 눈이 밝지 않은 이는 쉽게 찾을 수 없다.  물맛은 일품이다. 문득 파인 김동환 선생의 싯구가 생각난다.

떡갈나무 숲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길래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 오지요.

절터에서 잠시 내려오면 이정표 ‘관1’이 서 있는데 무너미고개 810m, 주능선쪽 제2국기봉을 480m로 기록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계속 하산길이다. 계곡길로 끝까지 내려가면 먼 길 돌아가는 것이 되므로 내려오는 중간중간에 우측 학바위 능선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타나는가 신경을 쓰며 내려간다. 아쉽게도 길 안내판이 없어 눈으로 살펴야 한다. 드디어 우측 갈림길로 들어서 잠시 나아가면 학바위능선길 끝에 ‘K40 삼거리약수터(상)’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다.

이어온 길 계속 전진, 서울대입구에서 무너미고개로 이어지는 큰 계곡길을 만난다. ‘k41 삼거리약수터’ 이정표가 서 있다. 이 길이 아마 관악산에서 가장 대로일 것이다. 잘 다듬어진 평탄한 등산로로 제4 야영장 지나 인공연못을 가꾸어 놓은 자하정(紫霞亭)에 닿는다. 늦가을 자하정 연못에는 단풍이 저녁빛에 운치를 더하고 있다. 


서울대 교정에 깃든 자하 신위 선생의 추억

자하정이란 이름은 그냥 지은 것이 아니다. 졸고 ‘이야기가 있는 길 25’를 인용하여 본고를 마무리 하려 한다.

“오늘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영조, 헌종 간에 활동한 자하 신위(紫霞 申緯)선생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 곳은 자하선생의 선영이 있던 곳인데 관악골프장이 들어서면서 부득이 옮기게 되었고, 골프장 자리에 서울대학교가 들어서면서 잊혀졌던 자하선생의 흔적을 살리고 있다.

창강 김택영 선생이 언급했듯이 자하선생은 詩書畵 삼절로 ‘조선 500년 제일의 대가’였다. 또한 다산, 혜장, 초의, 추사와 더불어 조선의 차인(茶人)으로서도 빠질 수 없는 분이었다. 이 분을 기려 서울대에는 자하연이라는 연못을 두었고 본부 옆에 동상도 세웠다. 또 등산로 호수공원에는 자하정도 세우고 이 분을 기리니 이 곳 북자하동천(北紫霞洞天)은 신위선생의 흔적이 생생히 살아난 곳이다. 대가답게 경수당집에는 4000여수의 시를 남겼는데 언제 읽어도 맛깔난 시 한 수로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澹掃蛾眉白苧衫(담소아미백저삼)
흰모시적삼입고 산뜻한 눈썹에
訴衷情話燕呢喃(소충정화연니남)
마음 속 정다운 말 소곤소곤 얘기하네
佳人莫問郎年幾(가인막문낭년기)
그대여 내 나이 묻지 마시게
五十年前二十三(오십년전이십삼)
오십년전엔 스물셋이었다오

나의 스물 셋은 언제였던가. 서울대 앞버스정류장에는 2호선 전철역으로 나가는 버스가 다양하다. 전철역에는 서민들의 풍성한 먹거리도 넘쳐나니 컬컬한 목 풀고 가시라.”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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