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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라이프 ⑦ 새정치연합 배재정 의원]“내 가족 키운 부산 국제시장통”

철학 담은 언론법안 계속 내놓는 ‘언론 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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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29호 심원섭 기자⁄ 2015.05.06 09:15:42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심원섭 정치전문大記者)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인 새정치민주연합 배재정 의원은 지난 2012년 5월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에 입성한 이래 3년 동안 적지 않은 33건의 법안을 대표발의 했다.

“국회의원의 입법 실적을 수치로 계산하는 토대에서 사실 통과가 수월한 법안을 발의해 수치를 채워야겠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며 “하지만 법에는 국회의원의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에 통과가 수월한 법안보다는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법안을 발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배 의원은 설명했다. 또한 배 의원은 “KBS 등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법’, 중앙 및 지역 언론에 대한 정부 광고의 균형있는 집행을 위한 ‘정부기관 광고법’ 등 쟁점 법안을 내놓다 보니 진도가 빠르게 나가지 않고 있다”며 “남은 19대 국회 임기 동안 수치에 연연하기보다는 단 하나의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경향신문이 ‘성완종 리스트’를 특종보도 한 뒤 한 여당 의원이 당연한 듯이 “해당 언론사를 압수수색해 녹취록을 확보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과 관련해 일각에서는 언론의 자유, 특히 취재원 보호는 정치적 압력이 거센 우리 사회에서 법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배 의원이 발의한 ‘취재원 보호법안’ 역시 화제가 되고 있다.

“여당 의원의 발언은 제가 기자 출신이어서 그런지 예사로 넘기기 어려웠다. 언론인들은 기억할 것이다. 지난 1989년 서경원 평민당 의원의 방북 사건 당시 정부는 이를 보도한 한겨레신문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를 적용해 압수수색을 감행했고, 2003년에는 전 청와대 부속실장의 향응접대 장면이 담긴 영상을 보도한 SBS를 압수수색하려 했다.

2008년에도 MBC가 광우병 관련 보도를 내보내자 또 다시 압수수색을 시도했다. 최근 이른바 ‘정윤회 문건’을 보도한 세계일보에 대해서도 압수수색 이야기가 나오는 등 정권에 불리하다 싶으면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오는 언론사 압수수색은 이제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 의원은 이 법의 필요성에 대해 “민주주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표현의 자유이고, 언론의 자유다. 언론의 자유가 없다면 이 사회는 이미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법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배 의원은 수사기관 등의 반발에 대해 “청와대, 법무부, 검찰, 국정원, 경찰 모두 반발할 것으로 예상한다. 법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얼마 전 서울광장의 세월호 1주기 집회 때 태극기가 불태워진 사건과 관련해 경찰은 관련 인터뷰를 한 사람의 신원을 해당 기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기자 개인 또는 언론사의 판단에만 맡기기에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너무 위태롭다”고 대답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익명성에 기대 일부 언론이 사실관계를 왜곡할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배 의원은 “많은 분들이 그 점을 우려하고 있으나 이 법의 진정한 취지는 공권력으로부터 언론사와 취재원을 보호하는 것이다. 부정과 부패를 방지하자는 것이다. ‘언론의 무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그런 우려를 들을 때마다 정말 씁쓸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정부패로 국민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들이다. 이를 감시하는 것이 언론인과 언론사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봤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배 의원은 “내 법안은 미국과 프랑스의 관련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은 현재 36개 주에서 언론인이 취재원에 대한 정보와 취재 내용의 공개를 거부할 수 있는 ‘방패법(Shield Law)’를 시행하고 있다. 프랑스는 지난 2008년 ‘언론인의 취재원 보호에 관한 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며 외국 사례를 제시했다.

또한 배 의원은 지역 언론을 살리기 위한 ‘정부광고법’ 발의와 관련해 “저 또한 지역 신문사 출신으로 지역 언론의 쪼들리는 살림살이를 잘 안다. 지역 언론이 죽으면 지역 문화가 죽고, 나아가 여론의 다양성과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 정치권이 너무 안일하게, 약육강식 현상으로만 바라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특히 내년이면 ‘지역신문 지원특별법’도 없어지는데 지역 신문, 나아가 작은 언론을 도와줄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 통칭 ‘정부 광고’라고 말하는 공적 재원을 생각해냈다. 정부 광고는 한 해 수천 억 원 규모다. 지금까지 국무총리 훈령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매체와 광고비를 책정해 왔다. 3년여 국정감사를 통해 제가 직접 수치를 확인했고, 앞서 17대와 18대 국회에서도 계속 문제점이 지적돼 왔다. 불합리하고 불평등하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툭하면 언론사 압수수색하려는 정부 아래선
‘취재원 보호법안’ 필요하다” 발의


배 의원은 “일부 언론학자와 언론인들 사이에 오해가 있다. 민간 언론 영역에 왜 정부 광고를 비효율적으로 나눠주냐, 특혜라는 반론이다. 그러나 잘못 알고 있다. 지금까지 정부 광고는 사실상 청와대가 주물러 왔다. 정권의 대표적인 언론계 떡고물이다. 그것을 정상으로 돌려 여론 다양성을 신장하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배 의원은 “고인 물꼬가 트이면 자연스럽게 아래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온 매체 쪽으로 흐르게 될 것이다. 지역 언론계에 지금보다 좋은 환경이 조성되리라 확신한다”고  이 법이 가져올 변화를 기대했다.

배 의원은 ‘취재원 보호법’과 ‘정부광고법’에 이어 ‘언론 상생 3종 세트법’으로 ‘뉴스통신진흥법’ 개정안도 발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뉴스통신진흥법은 연합뉴스와 관련된 법인데 왜 상생이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연합뉴스의 국가기간 통신사 지위를 흔들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오히려 국가의 공적 지원 규모는 더 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연합뉴스는 국가기간 통신이라는 이름에 맞게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넓은 세상에서 가져온 정보는 예전 연합뉴스가 그랬듯이 국가기간 통신사답게 다른 언론사에 공급돼야 한다. 그리고 국내 뉴스는 민간통신 영역과 지역 언론에 할당되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서로 윈-윈하는 구조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지난 3월 열린 토론회에서 “정치권의 고질적인 병폐 가운데 하나가 언론사와 연관된 문제의식이 나오면 눈치 보기 바쁘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진척은 없다. 뉴스통신진흥법을 개정할 당시 향후 문제점을 꼼꼼히 살피지 않은 정치권이 결자해지해야 한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배 의원은 ‘지방분권 및 지방행정체계 개편에 관한 특별법’에서 ‘지방’이란 법률 용어를 ‘지역’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방과 지역이란 법률 용어는 우리 언어 습관에도 흔하게 혼재돼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헌법도 그렇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누군가 말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듣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면 뭐라 하는가. 곧바로 ‘지방방송 꺼’라고 한다. 말 속에 의식이 있는 것이다. 지방이란 말에는 서울 아닌 다른 곳, 종속의 개념이 있다. 반면 지역이란 말은 수평적인 개념이다. 서울도 지역이다. 지역을 시골로 보는 관념부터 바로 잡아야 진정한 지역균형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관련법을 내게 된 것이다.”

배 의원은 내년 총선에서 문재인 대표의 지역구인 부산 사상구에서 출마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뛰고 있다. “사상은 나를 키워준 곳이다. 감전초등학교와 주례여중을 졸업했는데, 무슨 인연인지 여기서 정치를 하며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 그러나 사상은 제 개인적으로는 가난 때문에 아픔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 상처 때문에 때론 잊고 싶은 곳이기도 했지만 요즘은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새 다짐을 한다. ‘사상이 변화하면, 부산이 바뀐다’는 각오다”라고 인연을 얘기했다.

배 의원은 향후 계획에 대해 “이미 사상 주례동에 지역 사무실을 냈다. 아마 조만간에 사고 지역에 대한 위원장 공모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역 공약도 다듬고, 권리당원도 모집하면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재정이의 부산 이야기 ①
아버지의 양말 공장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께서는 부산의 쇠락과 궤를 함께 했다. 신발공장 등 경공업으로 사상공단이 흥했던 시절, 그 이후를 대비하지 못했던 부산의 산업 현장이 시들어 갔듯이 양말 공장에 다니셨던 아버지의 기술도 차츰 쓰일 곳을 잃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운이 좋았다. 아버지의 기술로 식솔들 밥 굶지 않았고 자식 셋 모두 대학공부까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린 시절, 엄마는 늘 돈이 없다 불평했고 아버지의 무능력을 원망했다. 돈은 엄마의 평생 한이었다. 아버지의 술과 담배 역시….

내가 사춘기 무렵 언젠가 아버지가 연립주택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아버지가 초라하고 안쓰러워 보이던 첫 기억이다.

아버지는 내가 부산일보사를 급작스럽게 그만둔 바로 다음 해인 2008년 위암 수술을 하셨다. 다행히 초기 발견 덕에 항암치료는 안했지만 위를 통째로 들어내는 작지 않은 수술을 했다. 그때 난 백수 시절이라 마음의 짐이 더 컸다. 수술 뒤 기력을 잃고 쓰러진 아버지를 보고 앞으로 내 곁에 얼마나 더 오래 계실까 염려하면서 ‘3년만이라도 더 사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한 기억이 난다.

다행히 아버지는 건강을 차츰 회복했지만 다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그래서 엄마는 아버지를 지금도 같은 일로 지지고 볶는다. 현재 부모님은 30년 넘게 한 집에서 살고 계신다. 삼남매가 북적일 때 한없이 좁았던 집. 우리가 성장하면서 몇 년은 같은 동네 조금 넓은 집을 전세 얻어 살았지만 우리들이 분가하고 나서자 부모님은 다시 그 연립으로 들어가셨다. 편안한 아파트 생활 한 번 하게 해드리고 싶은데 그래도 집세 안 나가는 자그마한 집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냐는 부모님이시다.


재정이의 부산 이야기 ②
부평동 깡통시장, 그리고 국제시장

부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시장은 1910년 생긴 부평동 시장이다. 부산 거주 일본인들의 생필품을 소매하는 유일한 시장으로, 일본인의 생활근거지였던 중구에 한일합작으로 개설됐다. 해방 뒤 부평동 시장은 영화 ‘국제시장’으로 유명해진 국제시장(일명 돗대기시장)과 길 하나를 두고 마주하며 속칭 ‘깡통시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 식품, 특히 과일-생선 등 갖가지 통조림을 받아 골목 노점에서 판 것을 계기로 다름 점포들도 앞다퉈 깡통 식품 장사를 하면서 얻은 이름이 ‘깡통시장’이다.

6.25 전쟁 이후에는 외제 식료품과 주방용품, 화장품, 고급 술, 가전제품 등을 구하려면 부평동 깡통시장을 찾아야 했다. 지금은 양주, 의류, 장식품, 액세서리, 패션잡화와 일부 외제 전자제품이 취급되고 있다.

깡통시장에서 길 건너 국제시장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과 함께였다.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이른바 전시통제 물자를 한꺼번에 팔아 돈을 챙기기 시작했고, 한국 최대 시장이었던 부평동 공설시장 일대에 갖가지 물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물자들이 드넓은 빈터였던 오늘의 국제시장 자리를 장바닥으로 만들어 자연발생적으로 상설시장이 생긴 게 국제시장의 탄생 배경이었다.

이 국제시장 장터를 ‘돗대기 시장’ 또는 ‘돗떼기 시장’이라고도 했는데 시장 규모가 크고 외국 물건 등 없는 게 없을 뿐 아니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대로 싹 쓸어 모아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장사를 시작하면서 시장이 형성됐다. 미군이 진주하면서 군용물자와 함께 온갖 상품들이 부산항을 통해 밀수입됐는데 이들 밀수입 상품들은 돗떼기 시장을 통해 전국 주요 시장으로 공급됐다.

국제시장이 유행가 ‘굳세어라 금순아’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피난민들의 애환이 깃든 시장으로서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래 규모가 큰 시장으로 성장했다. 시댁이 부평동시장 인근이어서 부평동시장, 국제시장, 깡통시장은 개인적으로 매우 친근하다. 특히 부평동시장은 채소며 어패류, 반찬류 등의 품질이 좋아 부산 주부들이 믿고 이용할 수 있는 시장으로 손꼽힌다.

명철이 가까워지면 제수 음식을 구입하려는 발길로 붐비는 곳이다. 손칼국수, 당면, 부산어묵, 단팥죽, 식혜 등 시장을 돌아다니며 식도락 하기도 안성맞춤이다. 아들 경준이는 걸음마를 배울 무렵 국제시장의 반짝이는 조명기구 상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내가 퇴근해 아이를 보러 가면 국제시장을 한 바퀴 돌아야했던 기억이 새롭다.


재정이의 부산이야기 ③
문재인 대표와 운명의 첫 만남

2012년 3월 18일은 내가 19대 총선 비례대표 제의를 처음 받은, 참으로 의미 있는 날이기도 했지만, ‘운명’이라는 자서전을 보고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문재인 대표를 처음 만난 날이기도 했다. 그날 저녁 집근처 찻집에서 문 대표를 만났는데 첫 느낌에서 깜짝 놀란 건 사진이나 방송화면으로는 그런 느낌이 없었지만 눈이 정말 부리부리한 호랑이 눈으로 “대단한 분이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 존경심은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일단 그날 저녁에는 제의만 받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다음날 아침에 만나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며 고사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몇 시간 후에 문 대표로부터 거듭 제안을 받자 고심 끝에 그날 오후 어렵지만 한번 해보겠다는 답을 드렸다. 그리고 20일 저녁 비례대표 후보 발표가 있었다. 정말 전광석화 같은 일들이었다.

안철수 전 대표는 기억할까?

부산일보 1995년 1월3일자부터 나는 ‘컴퓨터 맨’이라는 연재물을 기획했다. 첫 회 기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 개발자인 안철수 교수였다. 사진에는 33세의 안 교수가 한결 앳된 얼굴로 컴퓨터 앞에 앉아 포즈를 잡고 있었다. 당시 안 교수는 도곡동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서울 출장을 다녀와 썼던 기사다. 작은 제목은 ‘미국 유학 미루고 SW 회사 설립 준비’였다.

20년이 흐른 뒤 나처럼 안 교수도 배지를 달고 국회에 들어와 지난해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를 지냈다. 지난해 ‘재정아 부산가자’ 출판기념회 때 안 대표에게 당시 인터뷰 사실을 얘기하면서 기사를 보여줬지만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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