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발자취를 찾아 호산장성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김재원 의원. 사진제공 = 김재원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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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최정숙 기자) 열하일기(熱河日記). 조선시대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청나라 여행기다. 정조 때인 1780년 연암은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합류한다. 사절단의 본래 목적지는 연경(현 북경)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연경에 도착했지만 이걸 어쩌나, 황제는 여름 휴가차 열하(현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가셨단다! 결국 사절단 일행은 다시 초스피드로 열하까지의 230km 거리를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엎치락뒤치락과 별난 경험을 ‘왕족급 귀족이면서도 당대 최고의 개혁적 지식인이었던’ 연암이 기막힌 글 솜씨로 기록해 놓은 것이 열하일기다.
열하일기를 읽으면 18세기에 어떻게 이런 글쟁이가 있었을까 새삼 감탄하게 된다. 연암이 230년 전 인물이 아니라 바로 엊그제 만났던 ‘선배 형’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글에는 현대적 감각이 넘친다. 열하일기에는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꼽히는 ‘호질’, ‘허생전’ 등도 포함돼 있다.
최근 국회에서는 연암 박지원의 발자취를 따라 다닌 곳을 사진과 글로 정리한 ‘열하일기 사진전’이 열렸다. 이 사진전은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경북 군위·의성·청송)이 2008년부터 7년간 모아둔 내용을 공개한 행사다. ‘열하일기’ 답사기는 김 의원이 의정활동 등을 하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작성한 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이 첫 공개는 아니다. 그는 이미 2013년부터 올해 초까지 자신의 블로그에 틈틈이 내용을 올려뒀다. 지인들에게 메일을 보내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다. 기자도 메일을 받은 적이 있어 이번 전시회를 찾아가 봤다.
김 의원은 전시회에 사진 122장을 전시했다. 자신이 직접 사진을 찍는 모습부터 북경, 단동, 요양, 심양, 산해관, 승덕 등을 방문해 자금성, 만리장성 등을 찍은 사진들을 진열했다. 사진들을 보니 김 의원이 답사를 하게 된 계기와 사진을 어떻게 찍었는지 궁금했다. 20일 의원회관에서 가진 김 의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김재원 의원이 5월 11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김재원 의원과 함께하는 열하일기 사진전’에서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 = 김재원 의원실
“이번 사진전은 중국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주제와 의미가 담긴 사진을 추린 것이지요. 그동안은 블로그와 메일에 연재했습니다. 그런데 글과 사진의 분량이 많다보니 사람들의 집중도가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230년 전 열하일기의 전체줄거리를 한 눈에 짐작할 수 있는 사진전을 준비했어요. 시각적 효과죠. 조선 후기를 살았던 개혁적 지식인의 고뇌를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사진전을 열게 됐습니다.”
김재원 의원이 중국 베이징에 간 때는 2008년 7월이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난다는 마음으로 베이징대학에서 연구학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난생 처음인 타국에서의 생활은 힘들었다. 그러던 중 ‘열하일기’를 만났다.
“베이징대학 국제관계학원에 새로 둥지를 틀었습니다. 가끔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와 관련된 세미나에 참석하는 일 외에는 대학 구내 숙소에서 책을 읽었지요. 우연히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국어판을 읽게 됐어요. 중국어판과 한국어판이 주는 느낌이 다르니 한국어판을 다시 읽었죠. 정말 재밌었어요. 읽으면서 그 때나 지금이나 이념 과잉, 외교 문제 등이 왜 이렇게 똑같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점점 빠져 들면서 몇 번씩 읽었지요. 답사 초반에는 화제가 되는 곳 위주로 다녔어요. 그러다 2013년에 연암이 간 곳을 모두 가게 됐습니다.”
왕족급 귀족이 어떻게 개혁인사 됐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다닌다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다. 관광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서 의미는 남달랐다. 230년 전의 옛 발자취를 찾아다니는 만큼 많이 달라진 지명(地名)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요즘은 전자지도 덕분에 위치를 찾는 일이 편해진 측면이 있다.
“옛 지명이 지금은 어느 곳인지 잘 모릅니다. 다행히 2008년에 디지털지도가 어느 정도 완성돼 조금 수월했지요. 열하일기는 의주성을 나서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됩니다. 구련성 밖에서 호랑이를 쫓으며 이틀간 노숙했고, 봉황성을 지나는 등 노선이 있습니다. 명칭은 바뀌었지만 요즘 전자지도를 보면 많이 찾아집니다. 그래서 다 가볼 수 있었지요. 전자지도로 못 찾으면 동네 어르신들의 안내로 찾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에게 조선 사신들이 다닌 곳을 들어보셨는지 물으면 역참(驛站)을 알려주고는 했습니다. 나라는 다르지만 중국의 시골 어르신들도 우리 시골 어르신들처럼 정이 넘치십니다. 물어보면 조상 대대로 들어온 내용을 친절하게 알려주셔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당시 건물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힘겹게 찾아갔지만 터만 남은 곳들도 있었다. 김 의원은 이런 곳들도 역사적 자료로 남기려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연암이 중국에 갔을 때가 1780년 6월부터 10월까지입니다. 당시 건축물 중 상당수는 문화대혁명(중국 최고 권력자인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 운동. 1966~1976년까지 10년간 진행)을 거치면서 파괴됐지요. 그때 파괴돼 마을 우물터에 박혀 있는 깨진 비석과 건물 잔해 등을 찍어 왔어요. 부서진 위치만 찍은 곳도 있고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끌려간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당시 고려보(高麗堡)입니다. 고려보는 오늘날의 고려포촌(高麗鋪村)이지요. 고려포촌의 행정기관인 촌민위원회 건물을 찍어 온다거나 하는 등으로 흔적을 찾았습니다.”
▲자금성은 베이징의 중심에 있는 명, 청 왕조의 궁궐로서 세계 최대 규모다. 자금(紫禁)이란 이름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사는 곳이라는 데서 비롯됐다. 사진은 자금성의 북쪽 경산 정상에서 바라본 자금성 모습이다. 사진제공 = 김재원 의원실
연암 박지원의 흔적을 찾는 데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병자호란(1636년)이다.
“연암이 건너 간 때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140년이 더 지난 상황이었어요. 전쟁의 후유증은 벗어난 상태였죠. 하지만 조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전쟁의 깊은 상처가 여전했지요. 조선은 한족의 명나라랑 가깝다 보니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를 무시했어요. 그런데 조선인이 무시하던 청나라에 명나라가 항복했지요. 조선 사람들은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주장했습니다. 공자의 나라가 오랑캐에게 더럽혀졌으니 우리가 공자의 전통을 이어받자고 생각한 거죠. 배청의식이 심해서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조선은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포로로 잡혀간 치욕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이 가진 병자호란의 상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가 연암 박지원이었다.
“연암은 ‘병자호란의 상처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옛 원한이 무슨 소용이냐, 청나라는 강대국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150년이나 지난 옛날의 종주국 논쟁을 지금 왜 하냐’라면서 실사구시의 학문을 내세운 것이지요. 당시는 이데올로기 과잉의 시대였어요. 대부분 사대부들은 ‘우리는 소중화다, 청나라는 오랑캐다’라면서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연암은 ‘청나라에게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했고, 조선의 제도 중 문제가 되는 것은 비판했지요. 연암은 조선 전역에 수레가 다닐 도로 하나 제대로 개설하지 못하는 벼슬아치들의 무능을 문제 삼았습니다. 또 과잉 이데올로기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했습니다. 지금도 한국인은 이념적 잣대에 맞춰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실을 외면하면서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을 보면 열하일기에 시사점이 많습니다.”
김재원 의원은 ‘사심을 버리고 국익을 먼저 생각한 연암 박지원’의 흔적을 찾으며 어느 새 연암과 한 몸이 되고 있는 듯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열하일기의 내용에 충실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2008년에는 혼자 다녔죠. 그때는 사진 찍는 기술도 부족해서 보이는 대로 찍었지요. 나중에는 의원실 식구 등과 함께 가 도움을 받으며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을수록 기술이 늘다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더 열심히 찍게 되고요. 처음에는 그냥 찍었죠. 그러다 나중에는 배경에 맞춰서 찍었어요. 열하일기 배경은 찌는 듯한 무더위인데 사진의 날씨는 찬바람이 많이 부니 맞지 않았던 거죠. 사진 욕심 덕분에 함께 간 사람들이 힘들었지요(웃음).”
“2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왜 항상 종주국 논쟁?”
김 의원이 7년 동안 방문한 열하일기의 현장 중 가장 많이 간 곳을 물어보니 ‘열하’란다.
“많이 간 곳은 베이징을 제외하고 열하입니다. 당시 건륭제가 여름별장으로 지은 피서산장이 열하에 있었으니까요. 열하는 중국 양자강 이남의 화려한 정원 문화와 북방의 유목 문화, 티베트의 불교사원이 어우러진 문화적 다양성과 통합성을 보여주는 특별한 곳입니다. 청나라의 정치, 군사, 외교 등 국가대사를 이곳에서 처리해 제2의 정치 중심지가 된 곳이죠. 연암은 조선의 사대부로서 열하까지 온 데 대해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열하까지 간 조선인은 당시 거의 없었으니까요. 230년이 지나 한국인이 열하에 이렇게 많이 방문할 거라고 연암은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고려포촌’이다. 그곳은 병자호란 때 잡혀간 조선인 전쟁 포로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1780년 8월 7일 자정 무렵, 남천문을 넘어 조하를 건넌 조선의 사행단은 길을 재촉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북쪽 관문 고북구로 들어간다. 사진은 고북구 관문의 북쪽에 남아 있는 와호산장성의 현재 모습이다. 사진제공 = 김재원 의원실
“병자호란 때 조선인들이 끌려간 마을이 고려보입니다. 거기서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고려보의 후손들은 조선 사신이 지나갈 때마다 동족처럼 반겼습니다. 그런데 사신을 수행하는 일부 하인들의 폐해가 심해지면서 나중에는 원수처럼 지내게 됐지요. 모국에서 온 사신단이라서 반겼는데 배신을 당한 조선인 포로 후손들의 절망감이 어땠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등을 돌리게 된 사연을 들으면서 현재의 남북간 신경전 등 한민족끼리의 갈등을 생각하게 됐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청나라에서 도망쳐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돌아온 부녀자들의 얘기도 있습니다. 이른바 ‘환향녀(還鄕女)’입니다. 돌아온 양반집 부녀자들은 ‘오랑캐에게 실절한 여자’라는 시선 때문에 고통 받았습니다. 대부분 환향녀들은 본래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것도 비극인데 목숨을 걸고 고향에 돌아와도 환영받지 못하니 아픔과 고통은 이중으로 컸지요.”
김재원 의원이 열하일기 답사를 다니며 찍은 사진은 무려 8천 장이다. 예전같이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숫자다. 수천 장의 사진 속에 담긴 일화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높이가 안 맞으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요. 중국의 건물들은 크기가 커서 가까이에서 찍으면 렌즈에 다 안 담깁니다. 멀리서 망원렌즈를 당겨야 찍힙니다. 그래서 전봇대 같은 데 올라가서 찍다가 혼나고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백이, 숙제의 사당인 이제묘 터에서 사진을 찍다가 큰 개한테 물릴 뻔 했어요. 이제묘는 문화대혁명 때 파괴됐습니다. 그 터에는 골재공장이 들어섰고 현재 공장은 문을 닫은 상황입니다. 터 사진을 찍기 위해 대문 구멍에 대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엄청 큰 개가 달려들더라고요. 티베트산 짱아오라는 일명 ‘사자개’인데 그대로 도망가다가 넘어졌어요. 물론 사진은 찍었습니다(웃음). 나중에 왜 개를 묶어 놨는지 안내자한테 물었더니 중국에는 방치된 공장에 도둑이 들어와 기계를 떼어가 고철로 파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또 중국 북경은 스모그가 심해서 사진을 찍으면 뿌옇게 나옵니다. 북경에 머물다가 자금성 전경을 찍기 위해 경산에 올라갔지요. 때마침 전날 비가 와서 개인 다음날 사진을 찍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화창한 날씨 아래 자금성을 찍은 일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김 의원과의 인터뷰 동안 조선시대 역사의 한 단면을 제대로 공부한 기분이었다. 젊은 세대에게 답사를 권유한다면 어떤 조언을 해줄지 궁금했다.
“알고 보면 달라 보입니다”
“답사를 다니려면 이야기의 흐름, 스토리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를 알면 돌 하나를 보더라도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내용을 모르고 보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지요. 시골의 동네 이름 하나를 확인해도 ‘이곳은 조선의 사신들이 묵고 간 마을이구나, 이곳은 중국 사람들한테 사기 당한 곳이구나’ 하고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몰랐던, 관심이 없었던 역사 얘기가 더 재미있고, 의미 있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김 의원이 연암 박지원과 ‘열하일기’ 답사기를 적극적으로 알린 것은 자신이 느낀 감흥을 공유하기 싶었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념 과잉의 모습을 보는 것도 안타까웠다. 사실 김 의원은 ‘진보 보수 마주보기’ 등 집필을 통해 이념 대립을 줄이고자 노력한 인사 중 한 명이다. 때문에 연암 박지원의 행보가 더 와 닿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념 과잉으로 국가적 비용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늘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잘못된 것인지, 당시 개혁적인 지식인의 입을 빌어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보수와 진보가 거창하게 얘기하지만 큰 차이는 없습니다. 자신들의 용어와 잣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니까요. 연암은 당시 청나라를 배척하는 분위기에서 반대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연암에게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국익을 먼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국내 정치를 국익보다 우선시해 외교를 하면 반드시 실패하게 돼 있습니다.”
김재원 의원은 열하일기 사진전과 관련해 올 가을께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그는 열하일기 답사를 위해 사람이 많은 곳과 적은 곳을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까지 찾아 나선 셈이다. 연암 박지원의 정신이 김 의원을 통해 앞으로 더 많이 전파되기를 기대한다.
최정숙 기자 most_silen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