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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라이프 ⑯ 해군장교 출신 새누리당 심윤조 의원]“남북문제 담대히 풀어야 제3 연평해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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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39호 최서윤 기자⁄ 2015.07.16 09:09:05

▲7월 3일 CNB저널과 인터뷰를 한 심윤조 의원. 사진제공 = 의원실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최서윤 기자) 새누리당 심윤조 의원(서울 강남갑)은 자타공인 ‘젠틀맨’이다. 1977년 외무고시 합격 후 30여 년간의 공직생활을 외교관으로 봉사해왔다. 그는 일본과 미국, 포르투갈, 오스트리아에서 외교와 안보 문제를 접했다. ‘외교가 국력’이라는 신념으로 살아온 대표적인 외교통(外交通)이다. 그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OSCE(유럽안보협력기구) 등 관련 활동을 통해 대북 외교 전선에서 일했다. 그 동안 쌓아온 대북 지식을 바탕으로 ‘안보 강연’을 많이 다니고 있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공직 생활을 오래한 탓에 모르는 사람들은 심 의원을 딱딱한 성격의 소유자로 오해하기도 한다. 사실 그는 소탈한 웃음과 소박한 인상을 가졌다. 외교관다운 세련된 용모는 덤이고, 누구든지 한 번 만나서 대화하면 금방 친근감을 갖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중저음의 목소리와 고급 언어를 구사하는 말투는 외교부 근무 때 기자들에게 ‘대변인으로 적합한 인사’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군대도 해군 장교로 다녀왔다. 그러고 보니 영화 ‘연평해전(감독 김학순)’이 끝나고 자막으로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에 동참한 정치인들의 이름이 올라갈 때 심 의원의 이름도 있었다.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해군 후배들을 향한 마음의 표시였다. 영화 속 해군의 모습과 그의 해군 시절 얘기가 듣고 싶어서 인터뷰를 시도했다. 심 의원과 CNB저널의 인터뷰는 지난 3일 국회에서 논현동 지역 사무소로 향하는 승용차 안과 사무소 사랑방에서 이뤄졌다.

“해군 후배들 보면 대견스러워”

‘연평해전’은 우여곡절이 많은 영화다. 기획부터 제작까지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투자사는 CJ E&M에서 기업은행으로 변경됐다. 배급사도 NEW(뉴)로 바뀌었다. 시나리오는 대폭 수정됐다. 이미 촬영에 들어간 정석원 등 일부 배우는 하차했다. 2013년 6월에는 제작비 부족 문제에 직면했다. 고심 끝에 대국민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 총 제작비 80억 원 중 20억 원이 이를 통해 모였다. 심 의원은 어떻게 이 크라우드 펀딩에 동참하게 됐을까.  

▲해군 장교 시절 심윤조 의원(사진 오른쪽). 사진제공 = 의원실

“지난해 이병석 의원이 돈이 모자라 연평해전 제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동참을 요청했어요. 흔쾌히 수락했죠. 꽃다운 해군 후배들이 전사한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북한과 대치 중입니다. 군 병력을 보면 숫자는 적지만 전력은 우리가 우세하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양보다 질인 셈이죠. 우리가 1999년 6월 15일, 1차 연평해전을 치른 뒤 자만심에 조금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미국 워싱턴에 있었는데 서울에서 온 의원들이 우리가 크게 승전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의식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설마 북한이 그렇게 당해 놓고 같은 곳에서 우리를 또 칠 수 있겠냐고 생각한 거죠. 제가 봤을 때 북한은 열악한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술을 개발했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전략을 구사한 겁니다.”

심 의원이 해군에 지원한 때는 외무고시 합격 이후인 1979년이다.

“해군 장교를 지냈죠. 해군 중위로 예편을 했어요. 해군 장교가 되려면 해군사관학교를 가거나 재학 중에 ROTC(학군사관)를 가는 방법이 있었죠. 저는 대학원을 마치고 시험을 봐서 해군 OCS(사관후보생)를 갔습니다. 그때가 1979년이었으니까 1982년도까지 3년 반 정도 군대 생활을 했네요. 군대를 안 간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훈련도 해병대랑 같이 받아 강도가 셌어요. 해군을 그린 ‘사관과 신사(1982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보면 훈련 받는 장면이 있는데 그 정도는 약과입니다. 우리는 더 힘들게 받았거든요.”

영화 ‘연평해전’에는 한상국 하사(진구 분), 박동혁 상병(이현우 분) 등 대원들이 꽃게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다 윤영하 대위(김무열 분)에게 걸려서 기합을 받는다. 심 의원은 원칙주의자면서도 한편으론 따뜻한 가슴을 가진 윤 대위를 연상케 한다.

▲김무성 대표가 주도하는 새누리당 통일경제교실에 참석한 의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심 의원은 책임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사진제공 = 의원실

“잘못하면 혼도 내고 기합도 줬죠. 저는 4개월 정도 훈련을 받았어요. 속칭 ‘빳따’를 200대 맞아봤죠. 함께 근무하는 동기 중에 부친이 참모총장인 친구가 있었어요. 훈련 받는데 친구 부친이 불시에 와서 우리가 기합 받는 걸 보고 장교들을 야단쳤죠. 너무 심하게 기합을 준다고요. 매일 밤마다 받았으니까요. 훈련 기간엔 장교가 일반 사병보다 더 세게 훈련을 받습니다. 장교 훈련이 끝나고 임관 할 때 소위가 됩니다. 그리고 중위를 달다가 대위가 되기 하루 전에 제대를 시킵니다. 소위 1년, 중위 2년을 지냈죠.”

“1차 연평해전 이겼다고 방심했으니…”

해군 간다고 매일 배를 타는 건 아니다. 공군 간다고 매일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연평해전 때 침몰한 참수리 357호정은 작은 함정이었다. 심 의원은 당시를 떠올렸다. 올림픽대로를 지나던 중 잠시 창밖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제가 배를 탄 것은 마지막 2주 동안 교육 받을 때였어요. 나머지는 육지에서 근무했죠. 정확히는 섬입니다. 팔미도에서 근무하다가 진해로 옮겼어요. 다시 서울에 있다가 마지막은 거문도에서 근무했어요. 해군은 해양경계선이 전방위 개념이니 섬에 근무하는 것은 최전방근무입니다. 진해에 있을 때 통제부사령관 부관을 했습니다. 통제부사령관이 있고 작전 사령관이 있는데 통제부사령관이 진해의 지역사령관입니다. 진해 앞바다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휴가 가신 저도가 있습니다. 저도 그곳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했죠. 해군의 근무 환경은 열악합니다. 참수리도 작고 구축함도 작습니다. 통로는 다니기가 힘들 정도로 좁고요. 배가 유람선처럼 돼 있는 건 아니니까요. 샤워도 잘 못하고 수병들은 진짜 많이 고생합니다. 고생을 많이 할수록 전우애가 더 깊죠. 해군 전우들을 만나면 지금도 할 얘기가 많습니다. 훈련 받고 기합 받은 얘기만 해도 공유할 내용들이 끝이 없거든요.”

▲2013년 9월 9일 국회를 방문한 유럽 차세대지도자 대표단을 만난 심윤조 의원. 대표단은 국회의원, 언론인, 교수, 기업인으로 구성돼 있다. 사진제공 = 의원실

한일월드컵 3·4위전이 있던 2002년 6월 29일. 북한 초계정 등산곶 684호는 서해 NLL(북방한계선)을 침범, 우리나라 고속정 참수리 357호를 선제공격했다. 이 전투로 인해 우리 군 6명이 전사했다. 19명은 부상을 입었다. 북한군은 3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북한 684호는 반파된 채 퇴각했다. 우리 해군의 승전이었다.

“그때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죠. 제가 나중에 들은 북한의 해명은 ‘상부까지 보고가 안 된 현장 사령관의 우발적 도발’이었습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1차 연평해전 때 북한은 박살이 났어요. 북한군 사기가 땅에 떨어졌으니 반드시 보복했어야 했죠. 월드컵 때라 우리가 신경을 못 쓴다는 것을 노린 것이기도 하고요. 전투를 해놓고 이루려는 목적은 이뤘으니 그렇게 해명했을 겁니다. 안 그러면 우리가 다시 보복을 할 테니까요. 절대 우리 전력이 우세하다고 방심은 금물입니다. 우리가 총을 들고, 저들이 활을 들고 있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됩니다.”

1차 연평해전 때는 전사자가 없었다. 하지만 2차 연평해전 때는 6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는 1차 연평해전 이후 바뀐 교전수칙 때문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설왕설래가 오간다.

1997년 김영삼정권 때 만들어진 유엔사 교전규칙에 따르면 경고방송 → 시위기동 → 차단기동 → 경고사격 → 격파사격 순이다. 선제공격에 대한 금지조항은 없었다. 2차 연평해전 이후 이는 경고방송과 차단기동을 제외한 3단계로 축소됐다. 1차 연평해전 직후 김대중정권은 ‘4대 교전수칙’을 만들었다. NLL 사수, 선제공격 불가, 교전수칙에 따른 격퇴, 확전금지 등이다. 이 중 선제공격 불가 조항이 우리 측의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1차 연평해전 때만 해도 북한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경고사격 후 곧바로 공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쪽에서 손도 못 댔어요. 컴퓨터로 조준하니까 상대가 안 됐죠. 그때 교전수칙이 변경됐어요. 선제공격이 안 되니까 일단 배로 막는 겁니다. 차단기동 작전이라고 이른바 ‘밀어내기’죠. 1차 때는 북한에서 왔을 때 밀다가 바로 공격했는데 2차 때는 배로 미니까 우리 주위를 뱅뱅 돌았어요. 하지만 이때 공격을 하지 못했죠. 지난번에 크게 이겨서 방심한 탓도 있고요. 제가 군에 근무하던 1979년도에는 별다른 사고가 없었어요. 북한이 공격 들어오고 한 것이 없었으니까요.”

▲2014년 7월 2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심윤조 의원이 주최한 ‘글로벌 차세대 시대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사진제공 = 의원실

영화 ‘연평해전’은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 영화가 끝나고 고 윤영하 대위의 생전 인터뷰와 생존자들의 증언은 보는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북한 간첩의 눈이 맑아서 살려줬다는 등의 내용은 영화 속 북한의 이미지가 나쁘게만 그려진 것은 아님을 보여줬다. 여러 장면 중에서 논란이 된 장면은 아비규환이 된 참수리호의 전사자들을 뒤로 하고 한일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했다는 대통령의 일정을 전한 뉴스 한 줄이다. 영화 속에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실명도, 사진 한 장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논란이 된 이유는 순식간에 지나간 단 한 장면에 강렬한 메시지가 담겼기 때문이다. 영화 보는 내내 먹먹한 가슴을 가라앉힐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장병들을 뒤로 하고 비행기에 오르는 대통령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졌다. ‘팩트’였기에 논란을 감수하고 없어선 안 될 장면이었다.

“그때 대통령이 월드컵 폐막식에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말이 많았습니다. 청와대 내부에서 고민도 했고요. 대통령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판단을 해서 월드컵 폐막식에 갔다고 해도, 안보를 담당하는 국방부 장관은 전사자 영결식에 갔어야 했어요. 정말 잘못한 겁니다. 그런 것들이 불신을 받았던 거지요.”

“국방장관은 전사자 영결식에 갔어야”

물론 월드컵 열기에 묻힌 연평해전이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고 해서 북한과의 관계를 마냥 차단하자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 도발의 유혹을 느끼지 않을 만큼 안보 태세를 확립해야 합니다. 북한이 도발하면 엄청난 대응이 가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연평해전처럼 한 번 이겼다고 방심하면 북한이 도발의 유혹을 갖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인도적 지원을 하면서 북한과의 관계는 담대하게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도적으로 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해병대 출신인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국회 내 군 인권개선 및 병영문화혁신특위원장을 지내며 군대에서의 자기 발전을 강조했다. 해군 출신인 심윤조 의원 또한 군대에서 희망을 찾았다.

▲영화 ‘연평해전’ 스틸컷.

“저는 군대 갔다 온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군대 동기들 간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지내니까요. 해군 후배들을 보면 기특하고 대견스럽습니다. 해군은 근무지가 험지입니다. 외딴 섬이 많거든요. 보면 남북간 실제 교전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 해상입니다. 2010년 연평도 포격이 일어난 다음해 해군 지원자가 더 많아졌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희망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북한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인도적 지원도 안 받겠다고 하고 북핵 개발 문제도 있고 언제 도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영화가 ‘젊은이들의 희생을 헛되게 해선 안 된다’는 안보의식을 일깨우고, 북한의 위협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킨다는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연평해전’은 시의적절하게 잘 나왔다고 봅니다.”

우여곡절 끝에 개봉한 영화 ‘연평해전’은 파죽지세의 흥행 속도를 보이고 있다. 9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8일 하루 전국 907개 스크린에서 17만 6693명을 동원해 누적 관객수는 369만 3009명이다. 할리우드 대작인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로부터 1위 자리를 탈환, 주말을 지나 400만 명을 예약해 둔 상태다. 연평해전에 대한 이 같은 관심은 주변 누군가의 아들, 형, 오빠, 동생이었던 그들의 희생을 뒤늦게나마 알게 된 사람들의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이라는 ‘부채 의식’이 더해진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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