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 없는 ‘제로 웨이스트’ 의류 개발 등 활동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문화예술 사회적기업 ‘000간[공공공간]’ 전경. 사진 = 000간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안창현 기자)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지난 5월 ‘H-빌리지 쇼케이스’라는 행사가 열렸다. ‘H-빌리지’는 현대차 그룹이 사회공헌활동으로 지원하는 도시재생 프로젝트다. 이 H-빌리지 쇼케이스에서 지난 1년여 간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한 한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의 성과 발표회가 있었다. 주인공은 000간[공공공간]이었다.
000간[공공공간]은 창신동에서 활동한 지 벌써 3년째 되는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적기업이다. 노후한 창신동을 재생하기 위해 지역 기반의 예술 프로그램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지역 의류 브랜드 ‘제로웨이스트’를 론칭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000간’은 공공(公共) 공간의 다른 표현이다. 새로운 공공성을 제안하고 실행하고자 이런 이름을 짓게 됐다. 공감, 공유, 공생을 위한 디자인 기획사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이란 ‘더 멋진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나은 상태로의 변화’인 것 같다. 결국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1980년대의 서울 모습을 간직한 창신동에는 980여 개의 봉제 공장이 남아 있다. 과거 창신동은 동대문 시장의 배후에 3000개 이상의 봉제 공장이 위치한 거점이었다. 하지만 이제 3분의 1만이 살아남았다.
000간의 홍성재 대표는 “봉제 산업이 어려워지면서 창신동에도 다양한 문제가 생겨났다. 봉제 공장끼리 경쟁이 심해 소득은 줄어들면서도 기획 상품이나 복제 상품 위주로 제작하다 보니 노동시간이 길어졌다. 또 작업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지역 주민들이 아이들 돌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지역 기반의 다양한 000간 프로젝트를 소개한 전시. 사진 = 000간
홍 대표는 창신동 아이들을 위한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창신동과 인연을 맺었다. “창신동의 해송 지역 아동센터에서 아이들과 만났다. 그 후 이 지역에 000간을 만들고 지역 기반의 다양한 프로젝트와 제품을 생산하게 됐다.”
그는 교육 활동을 하면서 창신동이 봉제 산업을 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특히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소규모 봉제 공장이 동료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홍 대표는 “그런 점에서 창신동 주민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000간은 먼저 창신동 아이들을 위한 놀이 형식의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역에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뭐든지 도서관’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단순히 아이들을 위한 문화공간에 그치지 않고 지역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패션의류 개발이다. 창신동에서 하루 동안 버려지는 자투리 원단의 양은 무려 22t 가량이나 된다. 그래서 창신동의 길목 여기저기에 자투리 원단이 담긴 쓰레기 봉투를 마주치게 된다.
“창신동 주민들에게 봉제하고 남은 자투리 원단은 처리 곤란한 골칫거리다. 이 자투리 원단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제로 웨이스트’ 의류를 생각하게 됐다.”
▲전시된 000간의 제품들. 사진 = 000간
남는 자투리 원단을 최소화하거나 아예 남지 않도록 옷을 제작하는 방식을 ‘제로 웨이스트’ 패션이라고 한다. 000간은 현재 봉제 및 재단을 담당하는 주민들과 협력해 자투리 원단이 거의 나오지 않는 ‘제로 웨이스트’ 셔츠나 쿠션, 브로치 등을 만들었다.
이 방식으로 생산되는 제품은 판매가의 50%를 제작자에게 공임으로 준다. 해외 의류 브랜드의 경우 공임비가 5~10% 안팎이라고 하니, 의류 폐기물을 5% 이하로 줄이면서 동시에 창신동 주민의 소득을 높이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홍 대표는 최근 아웃도어 브랜드 ‘몰릭’과 함께 ‘제로 웨이스트’의 이야기와 사회적 의미를 담아 라이선스 방식의 생산을 협의 중이라고 소개했다.
지역 주민과의 협력과 교류는 필수
000간은 크게 두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하나는 ‘제로 웨이스트’ 의류 사업처럼 지역의 자원을 발견하고 브랜딩 하는 ‘로컬 브랜드 제품 개발 및 판매’다. 이는 창신동의 소규모 봉제 공장과 수평적 협력을 통해 이뤄진다.
“제품 기획과 판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이 수익이 지역의 소규모 봉제 공장과 문화 공간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홍 대표는 말했다.
다른 하나는 ‘디자인 교육 프로그램’이다. 000간은 다양한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문제 해결 중심의 디자인 교육을 지자체, 기업, 관련 단체들과 연계해 활발히 실행하고 있다. “지역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선 구조를 바꿔야 한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공공기관이나 시민단체를 찾아 어떻게 연계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대에서 회화를 전공한 홍 대표는 현실 사회와 긴밀히 소통하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역 사회에 기반을 둔 디자인 활동은 그의 이런 생각에서 시작됐다.
▲창신동 골목길에 000간이 제작한 간판이 달린 모습. 사진 = 000간
“예술가로서 세상을 관조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라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지려 노력했다. 그런 점에서 창신동 프로젝트는 구체적 시공간에 함께 거주하는 지역 주민들이 미래 세대인 아이들과 보다 균형있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닥치는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 나가는 사업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물론 지역 주민과의 협력과 교류는 필수다. “우리는 창신동에서 활동하면서 때로는 미술 선생님으로, 때로는 함께 제품을 제작하는 동업자로 불린다. 마을을 위한 일을 우리가 독단적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서 주민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함께 활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초기의 있는 편견과 오해는 다른 사회적기업가들과 협력하며 극복했다. 000간은 사회적기업가 육성 사업을 통해 창업했기에 ‘사단법인 씨즈’ 같은 관련 단체들의 멘토링에서도 큰 도움을 받았다.
청년 예술가들의 다른 삶 방식 선보여
“도시 재생을 위해서는 마을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역 주민과 함께 이런 문제들을 공유하고 함께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창신동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마을 안팎에 무형 자산이 풍부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창신동을 단순히 봉제 공장이 밀집한 마을이 아니라 기존 봉제 산업에 문화와 디자인으로 새 가치가 결합된 ‘고부가가치 창조의 마을’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주민과 함께 시도했다.”
홍 대표는 000간의 활동이 지역과 주민을 위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 다른 삶의 방법을 보여주는 의미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청년 취업난, 경제 불황 등으로 더 이상 청년들은 기존의 방식으로 생존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000간 활동들이 이 어려운 시대에 청년들에게 사는 방식, 직업의 의미에 대한 재미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홍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 작업을 하기 위해 계속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 결과 작업을 할 충분한 돈도, 작업을 할 시간도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예술가로서 다른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젊은 예술가의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가의 작품을 파는 게 아니라 생각을 팔기로 했다.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 경험을 공유하는 예술 프로그램을 만들고 진행했다. 그 결과 미술관과 기업들이 예술 프로그램을 지원했고, 문화예술 교육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이 교육 프로그램으로 봉제마을 창신동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고,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해 미술관이나 기관이 주는 기금에 의존하지 않고 사회적기업을 통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000간이 만든 재활용 방석. 사진 = 000간
“우리가 지역(창신동)에서 만들고자 했던 관계는 희생이 아닌 서로를 보완해가는 관계다. 사회를 위한 사명감으로만 사회적기업을 한다면 개인은 희생돼야 하는 관계가 만들어지는데, 그러면 지속성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홍 대표는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이 꼭 필요했다. 그렇게 창신동의 봉제 공장들과 함께 협력을 시도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제품을 통해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는 희생이 아닌 서로의 모자란 점을 보완해가는 수평적 협력관계를 설정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000간의 SNS를 통해 이들의 활동에 응원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다. 또 이들의 활동을 알고 싶어 찾아오기도 하고, 활동에 함께 참여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다. 홍 대표는 000간의 활동이 다른 삶을 살아가는 흥미로운 사례가 됐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지역사회에 뿌리 내린 문화공간으로
000간에는 홍 대표와 함께 비전을 공유한 여러 청년들이 함께 활동한다. 디렉터로 활동하는 대표와 두 명의 디자이너, 코디네이터, 마케터, 그리고 플랫폼지기들이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단체와 개인이 000간의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예를 들어 이름 없는 봉제 공장에 간판을 설치하는 프로젝트는 지역 청소년, 후원 기업, 봉제 공장 사장, 디자이너들이 워크숍을 통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실행했다. 000간은 이렇게 외부의 다양한 사람과 단체들에 활짝 열려 있는 공간이다.
창신동의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와 통화하면서 “나 000간이야, 여기서 좀 더 놀다 갈께”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특별하게 이곳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곳, 계속 남아 있는 곳, 흥미로운 곳으로 지역 안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홍 대표는 000간의 공간이 지역 속에 계속 이렇게 남아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어려웠던 점보다는 도움을 받은 적이 훨씬 많다. 우리는 예술가로서 생존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지역과 결합해 함께 하는 것이다.”
▲000간은 자투리 원단의 양을 대폭 줄인 의류 브랜드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를 개발했다. 사진 = 000간
000간의 수익이 지역사회에 돌아가는 조건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하고 있다. 동대문 패션 상가로부터 오는 일방적 수주에 대한 대안 방식으로 새 시장 창출 역할을 진행하는 이유다. 홍 대표는 “결과적으로 창신동을 새롭게 브랜딩 하는 역할과 실질적으로 수익을 창출해 지역으로 순환시키는 역할에 그간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계속 노력할 것이다.”
000간은 2011년 시작한 예술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꾸준히 자체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어 왔다. 현재 2곳의 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만드는 과정 또한 쉽지 않았지만 다양한 협력과 지지 덕분에 가능했다고 홍 대표는 돌아봤다.
앞으로 000간은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으로 외부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계획이다. 특히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공공성을 제안하는 재미있는 프로젝트들을 준비 중이다.
“물론 여러 프로젝트들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느끼는 피로도 있다. 그러나 외부 활동과 지역 내부의 활동, 둘 모두를 잘 조율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작정이다.”
안창현 기자 isangahn@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