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뼈의 노래’ 윤혜진 연출]“살 붙여 달라는 뼈의 희망노래”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사람이 죽으면 바다가 보이는 산에 묻고, 그 주변을 바람개비로 꾸민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시체가 썩고 뼈가 남으면 그 뼈를 다시 파내 조각하고 간직하는 기묘한 풍습을 간직한 마을이 있다. 그리고 이 마을엔 바람개비 1000개를 만들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꾸미면 신기루가 나타나 모든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구원되고, 소원이 성취된다는 전설도 있다.
첨단 과학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자칫하면 신고당할 우려(?)가 있는, 기괴하고 허무맹랑하게 여겨질 수 있는 미신이다. 그런데 이 미신이 한 가족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연극 ‘뼈의 노래’는 기묘한 풍습과 전설이 전해오는 일본 센보 마을에 사는 아버지 겐고, 큰딸 카오루, 막내딸 시오리의 이야기를 그린다. 요미우리 연극 대상, 키노 쿠니야 연극상 등을 수상한 히가시 겐지(극단 사지키오라시 대표)가 극본을 썼다.
이 작품은 삶에 치어 웃음, 꿈, 낭만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허물없는 소통과 내적 치유로 다시 낭만을 찾아주자는 목적 아래 2009년 창단된 극단 ‘낭만유랑단’이 2011년 3월 국내 무대에 올렸다. 4년 만에 대학로 여우별 씨어터에서 다시 공연되는 ‘뼈의 노래’에는 낭만유랑단의 배우 김병철, 송경화, 김민정이 열연한다. 연출을 맡은 윤혜진 연출가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 치유되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으로, 소통과 변화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작품의 첫 시작에서 소통은 짐작도 할 수 없다. 등장 순간부터 겐고 가족은 서로 상처 주기에 바쁘다. 어머니의 장례식장. 어머니의 뼈를 세공하지 못하게 화장해버렸다고 타박하는 아버지 겐고가 카오루는 밉다. 그도 그럴 것이 뼈 세공사가 직업인 아버지는 주변에 “네가 죽으면 뼈를 조각해주겠다” “너는 머리뼈가 단단해 조각하기 좋겠다” 등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 일쑤다. 그래서 카오루는 학창시절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기 힘들었다. 마을의 유일한 뼈 세공사인 겐고는 마을의 옛 풍습과 인습을 지키려 하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카오루와 갈등을 겪고, 그 와중에 동생 시오리는 사고로 왼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18년 만에 소통 시작하는 가족
서로 흩어져 살아가던 이 가족이 다시 모이게 된 건 그로부터 18년 뒤…. 집을 뛰쳐나와 살던 카오루는 동생 시오리가 잘 다니던 유치원 교사직을 그만 두고 주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에 걱정돼 찾아온다. 그런데 고향이 많이 변했다. 타조와 비슷하게 생긴 호주산 새 에뮤를 들여와 이를 중심으로 관광 산업이 발전했다. 이질적인 광경이 혼란스러운데, 고향에 돌아와 에뮤 목장에서 일하는 시오리는 난데없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뼈 세공사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가족은 다시 18년 전처럼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그런데 과거와는 다른 갈등이다. 이를 윤 연출은 “좋은 갈등의 시작”이라고 짚었다.
▲연극 ‘뼈의 노래’는 죽은 뒤 뼈를 세공하는 독특한 풍습을 지닌 일본 마을에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진 = 여우별 씨어터
“18년 전 이 가족은 외로운 사람 투성이였어요. 신념 때문에 가족에게 외면당한 겐고, 상처를 숨기고 모른 척 사는 카오루, 아버지와 언니 사이에서 방황하는 시오리까지 서로 입을 다물었죠. 그런데 각기 다른 목적으로 모이긴 했지만, 한 공간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입을 열기 시작해요. 이야기가 익숙하지 않은 가족이라 그 표현이 격하기도 해요. 딸을 걱정하는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따뜻한 말 대신 독설을 내뱉고, 딸 또한 ‘내 인생이 망한 건 당신 때문’이라고 소리 지르죠. 하지만 이 과정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소통의 첫 시작은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자세입니다.”
윤 연출은 “사람들은 소통의 방법을 방치하고 때로는 외면하기도 하는데, 대상과 마주하기가 낯설거나 혹은 두렵기 때문입니다. 좀 더 상대에게 틈을 내줘야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서로를 이해하고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데, 겐고 가족에게 그 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고 말했다.
대화 과정에서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재밌는 상황도 연출된다. 늘 아버지 겐고를 타박한 건 카오루였는데, 아버지에게 늘 착한 딸이었던 시오리가 난데없이 대들기 시작한다. 이런 시오리를 카오루가 나무란다. 결국 한 번도 싸우지 않았던 시오리와 카오루 자매가 언성을 높이고, 그 사이에서 겐고는 어쩔 줄 모른다. 그런데 이 싸움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보다 오히려 관객에게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남남처럼 얼음장 같았던 이들 사이에 비로소 따뜻한 싸움의 온기가 느껴지기 때문.
갈등의 시작 역할을 한 마을의 풍습은, 18년 만에 다시 모인 이들이 소통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시오리가 마을로 돌아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왼쪽 귀에서 어느 날부터인가 바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 바람 소리가 뼈의 노래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시오리는 “뼈 어우러져 피고 바람개비”라는 말을 반복한다. 뼈의 노래는 고향인 센보 마을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연극 ‘뼈의 노래’의 한 장면.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와 두 딸이 18년 만에 만나 바람개비를 함께 만드는 모습이 정겹다. 사진 = 여우별 씨어터
“센보 마을의 전설과 풍습엔 이유가 있어요. 바람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죠. 태어나서 응애 우는 순간 그 호흡이 바람이 되고, 사람이 죽으면 그 바람도 죽는다는 거죠. 죽은 뒤 남은 뼈가 제대로 살을 붙여 달라고 노래를 시작하는데, 이걸 ‘뼈의 노래’라고 칭합니다. 그 뼈의 영혼을 바람이 바다 건너편 행복한 곳으로 보내준다고. 그리고 바람을 유도하는 지표가 바람개비라 믿죠. 결국 겐고가 풍습을 고집한 건, 가족이 죽음 뒤 행복한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즉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에요. 시오리는 그 마음을 이해했고, 카오루도 점점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불치병을 앓는 시오리는 자신에게 곧 닥쳐올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의 뼈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람개비 1000개를 만들기 시작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바람개비를 만들어 신기루를 볼 수 있기를, 그래서 가족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기를 소망하는 염원을 담아 바람개비를 하나하나 만든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 잊지 말아야 할
‘사랑’과 ‘소통’의 본질
시오리를 병원에 데려가려 한 카오루는 처음엔 동생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점점 과거엔 이해하지 못한 동생과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바람개비를 만들기 시작한다. 가족 구성원 중 가장 못생긴 바람개비를 만드는 장본이지만, 아버지에게 바람개비 만드는 법을 배운 뒤 솜씨가 일취월장한다. 셋이 모여 함께 바람개비를 만들고 개수를 세다 까먹는 장면은 웃음을 준다. 무거워질 수 있는 죽음 이야기를 너무 어둡지 않게, 위트 있게 풀어내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게 이 연극의 특징이다.
에뮤의 존재도 주목된다. 윤 연출은 “에뮤는 극에서 다의적으로 쓰인다. 변화를 추구하는 언니 카오루와, 과거에 머무르는 아버지 겐고 사이에서 방황하는 시오리가 자신과 동일시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원래 호주에 살지만, 일본 시골 마을에 떨어져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에뮤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낀 것”이라고 말했다.
에뮤 농장에서 일하는 시오리는 각 에뮤에 이름까지 붙이며 각별히 보살피지만 동시에 에뮤들은 미운 존재이기도 하다. 농장에서 도망쳐 나온 에뮤는 마을의 바람개비를 갉아먹으며 시오리의 희망을 짓밟기 때문. 에뮤가 마을에 등장하면서 뼈 세공 풍습은 점점 정체성을 잃어가고 이 변화의 바람에 겐고 또한 혼란스럽다. 윤 연출은 “이런 겐고 가족의 모습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정말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에요. 변화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그 이면엔 갈등과 혼란을 일으키는 면이 있죠. 에뮤와 겐고 가족은 이처럼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해요. 하지만 그 힘든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본질을 극은 이야기하죠.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요. 그리고 그 본질은 소통을 통해 비로소 지킬 수 있음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병으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시오리는 에뮤를 사랑하다가 갑자기 증오하는 등 혼란을 겪는다. 에뮤의 허상을 보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겐고와 카오루도 불쑥불쑥 등장하는 에뮤에 놀란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들은 함께 뭉쳐 늘 서로의 곁을 지키며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점점 바람개비는 1000개를 향해 간다. 극 후반부에 이르러 바람과 조화를 이루는 바람개비의 풍경은 겐고 가족의 미소와 함께 따뜻한 위로와 행복을 전해준다.
“‘뼈의 노래’는 결국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회복과 소통, 그리고 치유에 관한 노래입니다. 일본의 작은 마을이 배경이지만, 소통에 대한 화두는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겐고 가족이 행복을 빌며 소중히 만든 1000개의 바람개비를 타고 들려오는 희망의 노래가 세상 곳곳에 널리 퍼지길 바랍니다.”
김금영 기자 geum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