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라이프 ㉓ 새누리 이병석 의원] ‘물 사랑’ 정치인의 “남극부터 바이칼호까지”
▲2010년 남극 세종기지를 방문한 이병석 의원(오른쪽). 사진제공 =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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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최서윤 기자) “어느 날, 엎드려 흐르던 강이 솟았다.” “대한민국 미래 먹거리의 보고(寶庫)인 바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새누리당 이병석 의원(경북 포항북구)은 수(水)자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한다. 국회 국토해양위원장을 역임한 이 의원은 2010년 여행을 통해 강과 바다를 공부했다. 지난달에는 “바다숲 조성사업으로 미래 먹거리인 바다자원이 고갈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연안 생태계를 회복해 어민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하면서 우리 바다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데 힘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강과 바다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 강은 녹조, 바다는 적조 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바다 사막화’가 심각해지면 식량 자원이 부족해진다. 강과 바다를 지키는 것은 인류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다. 강과 바다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 의원의 자세는 2010년 그간의 경험과 여러 자료를 토대로 발간한 저서 ‘어느 날, 엎드려 흐르던 강이 솟았다’에 잘 나타나 있다. 물이 아름다운 명소를 지명의 유래, 역사적 배경 등과 함께 소개한 이 의원의 길을 따라가봤다.
시베리아, 그 시원한 물에 몸을 맡기다
시베리아는 러시아 연방의 우랄 산맥에서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북아시아 지역이다. 그곳에는 ‘꿈의 열차’라고 불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있다. 동해선 철도를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하는 일은 2000년 이후 이 의원의 의정 활동에서 주요한 축이 됐다.
▲러시아 앙가라 강변에 앉아 있는 이병석 의원. 사진제공 = 의원실
“이르쿠츠크 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도 정말 시베리아로 가는 것인지, 바이칼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바이칼에 대한 공경은 젊은 시절, 우리 민족이 그곳에서 기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하기 전까지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공간이었다. 지금 바이칼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으려고 한다.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언제 어느 때고 필요한 것이다.
오래도록 우리 정체성의 상징은 백두에서 한라였다. 물을 이고 있는 두 산은 ‘하늘 섬김’이라는 면에서 닮았다. ‘천지’와 ‘백록담’. 그 자체로 ‘하늘 못’이고, 하늘에만 사는 ‘하얀 사슴’의 물이다. 이 하늘 섬김의 뿌리를 바로 시베리아, 이곳 바이칼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바이칼은 지금도 지진 활동을 하고 있다. 빙하기 때 열수(熱水) 광산이었다고 한다. 고대인들은 혹독한 추위를 피해 따뜻한 바이칼에 모여 머물러 있다가 해빙기에 큰 홍수가 나자 남쪽으로 이동해 한반도와 주변에 정착했다는 학설이 있다.
▲2014년 9월 6일 KTX 포항역에서 일일역장 체험 중인 이병석 의원. 사진제공 = 의원실
“바이칼 호수 남부 오르콘 강과 툴라 강의 상류 초원은 유목 민족의 자궁과도 같은 곳이다. 4세기 후반 ‘신의 채찍’으로 불리며 로마를 위협했던 훈족(흉노)의 공간이었으며 북위와 북주, 수와 당 제국을 건설한 몽골계 선비족의 영역이기도 했다. 6세기 후반 북으로는 만주에서 비잔틴까지, 남으로는 힌두쿠시까지 대제국을 건설했던 투르크(돌궐)족의 공간이기도 했다. 8세기 중반 몽골 고원을 차지하고 당 왕조를 대신해 100년 동안 동아시아의 패자 노릇을 한 위구르족과 10세기 당 멸망 뒤 장성 이북에 ‘요(遼)’ 제국을 건설한 거란족의 공간이기도 하다.”
1167년경 칭기즈 칸이 태어난 곳이 바이칼 호 서부 해안 근처라고 한다. 앙가라 강을 끼고 바이칼 호수로 가는 길에는 낡은 집들이 줄을 서 있다. 주택을 비롯한 전통 건물들 중 같은 모양을 한 것이 없다. 이들은 무언가 서로 달라야 신이 쉽게 식별하고 제대로 찾아온다는 속설을 믿고 있다고 한다. 이 의원이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비가 흩뿌리는데도 젊은 여성 둘이 호수에 뛰어드는 것을 목격했다. 이 물에 발을 씻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얘기가 있다고 이 의원은 소개했다.
“동해, 그 미완의 바다를 완성하자”
이병석 의원의 고향은 흥해(興海)다. 고향의 들이 바다로 열려 있어서 흥망이 바다에 좌우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 흥해의 칠포 암각화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동해의 대표적인 섬은 울릉도와 독도. 독도는 일본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 역사 왜곡의 대상이 됐다. 일본의 야욕을 막고자 독도의용수비대 기념사업회는 지난해 8월 129억 원을 들여 기념관을 건립했다. 기념사업회장을 맡은 이 의원은 “일본은 독도 침략 의도를 여전히 감추지 않고 있다”며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 건립을 선포하는 것은 어려운 환경에서 독도를 굳건히 지켜낸 의용수비대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숭고한 국토수호 의지를 이어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울릉도와 독도를 자주 다니는 편이다. 공식 일정을 소화하기 바빠 울릉도와 독도가 중심이 된 동해를 찬찬히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동해선 철도 기공식을 마친 이후 2009년 6월, 마음먹고 동해 여행에 나섰다. 울릉도 주민들에게 뱃삯이 할인되면서 포항으로 나오는 울릉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1박2일로 자주 나오는 통에 포항에 나와 사는 울릉도 사람들의 고향 사람 맞이가 훨씬 잦아졌다는 이야기다. 카페리 도입으로 울릉도 가는 길이 훨씬 쉬워졌다. 3시간이면 포항에서 울릉도로 갈 수 있다.”
▲남태평양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이병석 의원. 사진제공 = 의원실
영일만은 포항 달만곶과 호미곶 사이에 있는 만을 말한다. 영일만항 국제여객부두 건설 사업은 포항의 숙원 사업이다. 이 의원은 지난달 영일만항 국제여객부두 기본 및 실시설계에 필요한 16억 원을 2016년 정부 예산에 반영, 내년부터 사업 추진이 가능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영일만항 국제여객부두 사업은 총 441억 원의 국비가 투입돼 2020년 완공될 예정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연결하는 것은 물론, 국제 크루즈와 페리선을 유치해 극동 러시아, 중국 동북3성, 일본 등의 관광객을 흡수하고 영일만 항을 환동해권 및 북방교역의 거점 항으로 육성하는 계획이 가능해졌다.
“영일만에는 제철소가 있다. 세계적인 제출소의 위용은 뭍에서보다 바다에서 볼 때 잘 드러난다.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원료 부두의 크레인과 용광로는 바닷가 모래밭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작품처럼 느껴진다. 60년대 말 온갖 어려움을 겪고 만든 이 제철소는 뒷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경제 성장의 바탕돌이 된다. 제철소 옆으로 도구 해수욕장이 보이고, 그 너머에 해병 부대가 있다. 그 안에 일월지라는 연못이 있다.”
영일만 앞 바다에는 유명한 설화가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다. 158년 신라 8대 임금인 아달라왕 때 이 바다에서 미역을 따던 연오는 갑자기 나타난 바위를 타고 왜국으로 가버렸다. 왜국 사람들은 이를 범상치 않다고 보고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으러 이 바닷가로 나왔다가 다시 바위를 타고 왜국으로 건너갔다. 부부가 떠난 뒤 신라의 해와 달은 빛을 잃었다. 신라의 왕이 급히 사신을 보냈고 세오가 짠 비단을 연오로부터 받아 하늘의 빛을 찾았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두고 국보로 삼았다는 얘기다. 비단을 귀비고(貴妃庫)라 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 영일현이다.
▲제철소가 위치한 포항 영일만의 모습. 자료사진 = 최서윤 기자
“이 이야기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지만, 제철 산업과 관련해서 보는 해석도 있다. 대체로 연오랑이 단야장(鍛冶匠)이었고, 세오녀 또한 제철 집단의 우두머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야기 속 지명도 이를 뒷받침한다. ‘도기야’, ‘도구’는 달을 가리키는 우리 옛말이라고 한다. 제철소에서 구룡포 가는 방향에 ‘몰개월’이라는 지명이 있다. ‘몰개 우 얼(연못)’이 변해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것은 모래밭 위의 연못, 일월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형상강과 오천(烏川)은 질 좋은 사철이 많이 나는 하천이었다. 나무와 물이 제철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보면, 지금은 해병 부대가 들어서 있지만 옛날에 도기야라고 불린 이 들판은 꽤 붐비는 제철장이었을 수도 있다.”
상상력이 만든 영토, 남극으로 가는 길
지구 반대편인 남극으로 가는 길은 굉장히 멀다. 쉽게 갈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이병석 의원은 2010년 여수 해양 엑스포의 남미 지역 유치 사절의 임무를 맡아 세종기지를 방문했다. 세종기지는 1988년 2월 17일 세계에서 16번째로 준공됐다.
“한국이 남극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78년 남북수산의 남빙양 크릴 시험 조업에서부터다. 하지만 그때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1983년 해양연구소가 남극조약 체계, 영유권 문제, 자원 개발과 환경, 우리나라의 남극 진출 방안 등 남극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1985년 11월 16일 한국 남극관측탐험대 17명이 킹조지 섬에 도착했다. 일본은 이미 1910년 초에 시라세 육군 대위가 남극을 탐험했고, 현재 남극 대륙에 쇼와 기지를 운영 중이다. 한국은 1986년 33번째로 남극조약에 가입했다. 그리고 1988년 2월 17일 남위 62도 킹조지 섬에 세종기지를 건설했다.”
남극의 온도는 1년 평균 영하 55도다. 기록상으로는 영하 88도까지 내려간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12월 연구원을 수송하던 세종 2호는 강설과 파도로 항로를 확보하지 못하고 실종됐다. 세종 2호를 찾으려 나선 세종 1호는 전복됐고, 과학자인 전재규 대원은 유명을 달리했다. 악천후 속에서도 남극에 대한 연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남극의 자원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남극은 지구 역사의 기록 보관소다. 남극의 만년빙은 최대 76만 년 전까지의 지구 환경 변화를 보여준다. 3만여 개의 운석은 지구 탄생 초기의 생생한 역사를 보여준다. 심해의 퇴적층은 지구 온난화는 물론 생태계의 변화를 보여준다. 또한 극지는 기후변화의 열쇠이기도 하다. 극지는 태양 에너지의 70%를 반사한다. 극지의 얼음이 다 녹을 경우 해수면은 약 60m이상 올라가게 된다. 남극은 해수 순환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심층 순환의 변화는 지구 전체에 기후변화를 유발한다. 남극은 또 미래 자원의 보고다. 불타는 얼음이라는 가스 하이드레이트가 이미 발견됐다. 남극 크릴을 비롯한 극지 해양 생태계가 포함하는 엄청난 양의 생물자원이 있다. 남극은 우주로 열린 지구의 창이다. 고도 50~180km의 고층 대기는 대기와 우주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오로라가 발생하는 현장이다.”
이 의원은 험한 날씨와 빙벽 탓에 기지 앞 마리안 소만의 빙벽과 특별보호구역인 나레브스키 포인트를 보지는 못했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가 느낀 것은 월동대원들의 남극 연구에 대한 열정이었다.
“연평균 -23℃인 얼음 땅에 최저 기온은 -89℃. -60℃가 되면 수분이란 모두 얼음과 눈뿐이고 사람이 만든 섬유는 부서지고 만다. 고무도, 플라스틱도, 알루미늄 캔도 작은 충격에 부서진다. 숨쉬기 힘들 정도의 블리자드(강한 눈보라를 수반하는 폭풍설)를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있고, 젊음과 열정이 그 어려움을 이기는 한 남극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든 또 다른 영토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불완전하지만 세계가 유일하게 협력해 만들어 가는 남극 세계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일 수 있다.”
이병석의 에필로그
길과 땅과 나무와 강과 바다가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따로 서 있다가 어느 한 기억에 매개되는 순간 그것은 역사가 되고 인생이 된다. 따라서 여행은 바로 역사와 나누는 대화가 된다. 나무가 증언하고 파도가 증언하는 것을 듣다보면 오랜 시간을 거쳐 흘러온 큰 강 하나가 땅 밑으로 소리 없이 흐르다 마침내 힘차게 분출하는 것과 같은 것을 느낀다. 그 물길에 한 시대를 만들었던 위대한 영웅과 그의 동무들이 했던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있다. 그들이 뛰어다녔던 무대를 같이 밟고 있으면 땅이 요동치고 파도가 춤춘다. 문자가 아니라 바람과 파도에 새겨진 기억인 것이다. 현기증이 날 만큼 위대한 역사를 느껴 보고자 했던 이유는 그저 그 기억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지혜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서는 24개의 열주가 있고, 그 머리에 돔 하나를 얹고 있다. 본회의장의 광천등(光泉燈)은 365개이고 돔을 가르고 있는 선은 12개이다. 대화와 타협의 예술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그 이름값을 다하기 위해 나는 지금도 텐트를 걷을 준비가 돼 있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여행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이름일 뿐이다.
최서윤 기자 most_silen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