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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3일차 (타슈켄트 → 부하라 야간열차 이동)
| 키타이, 야폰, 까레아
오늘 일정은 타슈켄트 구시가지 탐방이다. 어제 저녁에 들른 초르수 시장에 다시 나가 근처 쿠켈다쉬 메드레세(신학교)를 먼저 방문한다. 16세기 중엽에 건축한 모스크이자 신학교다. 38개 교실에 2000명을 수용하는 이곳엔 방마다 어린이들이 방학 특별 프로그램을 이수한다.
여기서부터 북쪽으로 구시가지가 펼쳐진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아 구시가지 중심으로 향한다. 1968년 대지진 때 무너진 집들이 더러는 버려지고 복원되고 새로 칠해져서 주택가를 이룬다. 사막 특유의 노란 흙벽과 파란 하늘이 절묘한 색의 조화를 이룬다. 골목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키타이(중국), 야폰(일본), 까레아(한국)를 번갈아 외치며 쫓아온다. 내가 지닌 볼펜이나 디지털 카메라, 휴대폰 같은 사소한 물건에 큰 관심을 보이며 반갑고도 성가시게 군다. 아까부터 집시 모녀도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 사막의 갈증
하즈라티 이맘 광장을 중심으로 16세기에 건립한 바라크혼(Barakhon) 메드레세와 모스크, 그리고 티무르 후손들의 모솔리움이 서 있다. 오후 2시 사막의 태양이 기승을 부려 현기증이 난다. 오늘 밤 부하라행 야간열차 이동도 있으니 더는 무리일 것 같다. 일정을 멈추고 에어컨이 나오는 카페를 찾아 들어가 땀을 식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평소 한국에서는 별로 마실 일이 없는 콜라와 환타 같은 청량음료 혹은 빙과류가 쉬지 않고 당긴다. 현지인은 아예 처음부터 1.5리터짜리 대용량 탄산음료를 주문하곤 한다. 잠시 갈증을 해소하지만 금세 다시 찾게 만드는 날씨다.
▲‘욥의 샘’이라는 뜻을 지닌 차슈마 아유프 모솔리움. 사람들이 물 부족으로 고통 받자 욥이 지팡이로 샘물을 솟아오르게 했다는 장소다. 사진 = 김현주
| 친한파 우즈베크인
부하라(Bukhara)행 열차는 저녁 8시 10분 출발이다. 호텔로 돌아와 로비에서 쉬다가 일찌감치 역으로 향한다. 현대적 시설의 타슈켄트 중앙역에서는 국내 각 지역은 물론이고 멀리 모스크바까지 국제열차가 다닌다. 열차를 기다리면서 여러 우즈베크인과 대화할 시간을 가졌다.
한 중년 남성은 내가 한국인임을 금세 알아보고 반갑다며 찾아와 인사를 건넨다. 인천과 부산에서 각각 3개월 살았고, 한국 여성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한다. 부산 사투리가 섞인 한국말이 유창하다. 호텔에서 역까지 차를 태워준 샤킬이라는 청년은 “형님” 하며 나를 졸졸 따른다.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여행에서 돌아오면 꼭 전화하라고 번호를 찍어준다. 타슈켄트 동쪽 안디잔(Andijan)에 있는 GM-대우자동차 공장 엔지니어로 최근 창원 공장에 3개월 다녀왔다고 자랑한다.
| 우즈베크인의 언어 감각
집이 부하라인 아가씨 마푸툰은 성숙해 보이지만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이 결정된 학생이다. 자신이 진학할 타슈켄트 웨스트민스터 대학을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란다. 미모도 훌륭하지만 똑 부러지게 야무지다. 우즈베크어 이외에 영어, 러시아어, 타지크어까지 자유자재다. 타지크어는 어디서 배웠냐고 물으니 부하라에는 타지크인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배웠다고 한다. 우즈베크인은 문명 교차로에서 수천 년 살아온 사람들답게 언어 감각이 빼어난 사람들이 많다.
▲사라폰 타키(시장) 부근에서 점심식사를 해결했다. 타키는 노천 시장이라는 뜻이다. 과거엔 동서양 정보 교환의 장소였고, 현재는 갖은 보석 세공과 거래로 큰돈이 오간다. 사진 = 김현주
| 대한항공 화물 터미널까지?
열차 침대칸에서 만난 남성은 생김새가 보통 우즈베크인과 꽤 다르다. 한국인과 흡사한 얼굴을 한 그는 알고 보니 카자흐계 우즈베크인이다. 타슈켄트에서 서쪽으로 500km 떨어진 도시 나보이에 소재한 중국 계열 석유 화학 회사의 이코노미스트다. 한국을 아주 잘 알고, 호기심 또한 매우 높아서 한국 근로자 평균 임금이 얼마인지, 집값과 물가는 어떤지 등을 꼼꼼히 물어 본다. 나보이에는 대한항공 화물 터미널이 있어서 중앙아시아 물류기지 혹은 한국에서 중동이나 유럽으로 가는 화물기들의 중간 기착지로 쓰인다고 알려 준다. 몰랐던 사실이다.
| 중앙아시아의 든든한 우방
인천공항에서 타슈켄트까지 아시아나 항공 A330 중대형 여객기를 타고 오면서, 한국과 우즈베키스탄 사이에 국적기와 우즈베크 항공을 합해서 중대형 여객기가 일주일에 10회 이상 왕복할 만큼 승객 수요가 충분히 있을지 의문을 가졌으나 이제 모두 풀렸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이 이렇게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여기 와서 새삼 깨닫는다. 세상은 참으로 넓고도 좁다는 것을 또한 깨닫는다. 이슬람 세계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 중 하나인 우즈베키스탄에 한국은 이처럼 확고한 교두보와 든든한 우방을 확보해 놓았다.
▲아르크성의 모습. 파괴와 재건을 거듭해 18세기에 이르러서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사진 = 김현주
| 밤 사막을 열차로 횡단
열차 안은 매우 조용해서 인기척조차 없다. 타슈켄트행 항공기에서 느꼈던 것처럼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우아하고 교양 있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사회주의 통제에서 길들여진 온순함 때문은 아닐 것이다. 차분하고 친절한 그들의 성품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침대칸 객실이 너무 덥다. 잠시 에어컨을 가동하더니 곧 끄기를 반복한다. 잠시 후 열차 승무원이 오더니, 차내에 에어컨 거부 반응이 있는 어린아이가 하나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이해해 달라고 당부한다.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다. 더위에 뒤척이는 사이 열차는 사막을 건넌다. 밤이 깊어 시원해지니 차내 공기도 많이 식어서 견딜 만하다. 사막 밤하늘의 별이 매우 커 보인다.
| 연해주 한인 강제 이주
사막의 밤을 열차로 횡단하려니 새삼 연해주에서 이곳 중앙아시아까지 열차로, 그것도 화물열차로 강제 이주 당한 고려인이 생각난다. 1937년 스탈린의 지시로 시작된 고려인 강제 이주는, 총 18만 명의 한인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총 6000km, 3~4주 걸리는 거리를 1800대의 화물 열차로 실어 나른 사건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열차에 강제로 태워져 도착한 곳은 척박하고 황량한 사막이었지만, 억척스런 한인은 사막에 벼농사를 도입하고 목화 재배로 성공해 우즈베키스탄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여전히 소수민족 한인을 믿을 수 없는 주변인으로 취급하다가 1956년에 이르러서야 소련 연방의 공민권을 부여했다. 이후 한인은 1989년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한인에 대한 사과를 하면서 비로소 명예를 회복했다. 기댈 모국이 없거나, 있더라도 너무나 초라했던 시절 겪어야 했던 피눈물 나는 설움의 역사였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18만 명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다.
4일차 (부하라)
| 아시아 깊숙한 곳까지
열차에서 맞이하는 새날은 언제나 설렌다. 밤사이 낯선 새로운 곳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열차는 오전 6시 40분 부하라에 도착한다. 참 멀리 왔다. 인천에서 타슈켄트까지 3000마일, 4800km 온 것만으로도 머나먼 서역인데, 타슈켄트에서 600km 더 서쪽으로 왔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투르크메니스탄이고, 그 너머로 이란과 터키가 있으며 아라비아해와 카스피해, 흑해가 있다. 여기서 한국까지의 거리 절반이면(2800km) 터키 이스탄불이다. 아시아 대륙의 깊고도 깊은 곳까지 오고야 만 셈이다.
▲타슈켄트에서 부하라로 이동했다. 사진은 부하라역의 모습이다. 부하라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더한다. 사진 = 김현주
| 고도를 거닐다
역 앞에서 아침 식사와 함께 마신 커피가 멍한 머리를 맑게 충전해주니, 사막의 아침이 다시 뽀송뽀송해진다.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시내 중심까지 간다. 가깝지 않은 거리다. 찾아 들어간 코밀 부티크 호텔은 이름처럼 부티크하다. 구시가지 초입에 자리 잡은 호텔과 주변 풍경이 정겹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골목은 어릴 적 살았던 서울 신촌 모래내와 비슷하다. 인구 23만 명의 서역 고도(古都),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하라는 2500년의 세월을 머금은 채 실크로드를 오고 간 수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증언하는 듯하다.
터키가 가까워진 것을 알리는 듯, 터키식 건물 양식이 많다. 그러면서도 분명 터키와 다르고 타슈켄트와도 다른 부하라만의 모습을 보인다. 부하라는 타슈켄트보다 더 더울 것이라고 해서 긴장했지만 일단 오전 10시, 아직까지는 괜찮다. 건조한 사막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하다.
사마르칸트나 히바(키바, Khiva)보다 관광지로서 아직 덜 알려진 부하라 사람들의 순수함과 소박함에 빠져든다. 이방인을 만나면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에서는 여학생이 자리까지 양보한다(물론 양보는 받지 않았다). 우즈베키스탄 시골 도시의 정취를 마음껏 느끼며 걷는 골목길이 이렇게 정겨울 수 없다.
▲시내 탐방 길에서 칼란 미너렛을 발견했다. 사막 여행자들에게 등대 구실을 해왔다. 사진 = 김현주
| 이슬람 성지 부하라
부하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원(교회)이라는 뜻으로, 이슬람교의 중요한 성지다. 아라비아 메카에 갈 수 없다면 부하라에 성지순례를 가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성지인 이곳에는 지금도 수십 개 모스크와 메드레세를 통해 이슬람이 전승된다. 과거 실크로드 시절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인도에 이르는 길과 초원을 건너 카스피해 북안을 스쳐 흑해와 이스탄불에 이르는 초원길이 여기서 갈라졌다.
| 어디를 가도 메드레세
시내 탐방 길에 가장 먼저 들른 곳은 400년 된 오아시스 연못 라비 하우즈다. 하우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라비 하우즈 부근에는 화려한 메드레세가 여럿 있다. 1417년 세워진 울루그벡 메드레세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학교이고, 맞은편에는 그보다 200년 뒤에 지어진 아지스한 메드레세가 더 화려한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광장에 나란히 서 있는 칼란 미너렛과 칼란 모스크는 부하라 탐방의 하이라이트다. 타지크어로 ‘크다’는 뜻인 높이 46m 칼란 미너렛은 사막의 등대로서 여행자들에게 중요한 길잡이였다고 한다. 칼란 모스크는 1만 2000명의 신도가 한꺼번에 예배드릴 수 있는 큰 규모로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모스크 중 하나다. 칼란 모스크 앞 광장 맞은편에 있는 미르 아랍 메드레세를 들여다본다. 수많은 방들은 회의장, 교실, 식당, 기숙사 등으로 쓰이고 학생들은 그 안에서 7년 교육 기간 동안 아랍어, 코란, 이슬람 율법 등을 공부한다.
| 똑똑한 야킴
메드레세 앞 그늘진 계단은 휴식하기에 명당이다. 40도 넘게 오르는 한낮의 태양일지라도 그늘만 들어가면 어디든 천국인 것이 사막 여름 여행의 매력이다. 우즈베키스탄 어린이와 즐거운 대화를 나눈다. 초등학교 6학년 야킴은 호기심으로 가득 찬 똑똑한 아이다. 거리 관광객들과 나눈 짧은 대화를 통해서 배운 영어가 전부일 텐데 문장 구사가 아주 체계적이다. 동서 문명 교차로의 후예답게 빼어난 언어 감각을 과시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갤럭시 스마트폰에 아주 관심이 많아서 건네주며 마음껏 만지게 했다. 조심스레 이것저것 기능을 접해 보더니 큰 인사와 함께 공손히 되돌려준다. 아직 2G 휴대폰이 더 많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스마트폰은 신기한 디바이스인가 보다.
| 거대한 아르크 성
시장 거리를 통과하니 거대한 아르크성이 나타난다. 7세기에 최초 축성됐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아르크성은 파괴와 재건을 거듭해 18세기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성 안에는 감옥이 있으나 공사 중이라서 들어갈 수 없다. 성 입구를 지키는 경비원이 10달러를 내면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한다. 부하라 시가지를 조망하기 최적인 성벽에 올라가고 싶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챙기는 부패한 이들을 도와줄 수 없어서 거절한다.
▲부하라에서 마주한 모스크 천장 문양. 이슬람 건축의 백미로, 부하라에서는 수십 개의 모스크를 통해 이슬람이 전승된다. 사진 = 김현주
| 욥의 묘?
차슈마 아유프 모솔리움을 마지막으로 들른다. 아유프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 욥으로서 ‘욥의 샘’이라는 뜻이 된다. 사람들이 물 부족으로 고통 받자 욥이 지팡이로 내리쳐서 샘물을 솟아오르게 했다는 바로 그 자리다. 몸에 좋다고 사람들이 즐겨 찾는 샘물이지만 맛은 없다. 무슨 사연인지 우즈베키스탄 가족이 와서 샘물 앞에서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린다.
| 사막을 맛보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사라폰 타키 부근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타키’는 노천 시장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갖은 보석을 세공하고 거래하느라고 큰돈이 오간다. 교역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동서양 정보 교환의 장소였다. 시장의 지붕은 세월을 달리하며 덧붙인 크고 작은 반구형 돔이 더해져서 기기묘묘한 외관을 만들어낸다.
한낮의 뜨거운 사막 태양을 피해 이 골목 저 골목 그늘을 따라 호텔로 돌아오니 천국이다. 여행 일지를 정리하는 지금 시각 저녁 7시지만 호텔 문을 열어 보니 후끈한 열기가 밀려 들어온다. 이 무서운 사막을 무릅쓰고 수천 년 동서양을 오갔던 상인과 순례자와 군인과 여행가들 제각각의 꿈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진다.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