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우즈베키스탄] ‘고기 안 썩는 정도’로 고른 통큰도시 사마르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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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5일차 (부하라 → 사마르칸트)
파란? 푸른? 도시 사마르칸트
샤크(Shark) 열차 1등 객실은 아주 훌륭하다. 낡았지만 러시아산 객차는 기품 있다. 고급 목재로 마감한 벽면과 카펫이 깔린 바닥이 우아하다. 부하라-사마르칸트 250km 구간을 3시간에 주파한다. 좌석은 모두 찼지만 열차 안은 역시 조용하다. 열차는 사막에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린다.
관개 여부에 따라 사막 풍경이 수시로 바뀐다. 관개 지역은 목화밭이다. 시와 노래를 즐기는 민족답게 열차 모니터에서는 인도 발리우드 풍의 뮤직 비디오가 계속 흘러나온다. 사마르칸트는 푸른 도시다. 파란 색을 좋아하는 티무르가 건설한 도시라서 파란색(blue)이 테마이기도 하지만, 잘 가꿔진 숲과 녹지 때문에 푸른(green) 도시라는 말도 성립한다.
▲비비하눔 모스크에서 얼마 안 가면 사마르칸트의 랜드마크인 레기스탄 광장이 나온다. ‘모래 땅’이란 뜻을 지닌 이곳은 각종 집회를 위한 공공 광장이다. 사진 = 김현주
사마르칸트를 거쳐 간 인물들
사마르칸트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었다. 그러나 그런 역사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충분할 만큼 흔적 또한 많이 남겼다. BC 320년 알렉산더대왕, AD 629년 중국 당나라 시절 현장(삼장법사), 8세기 초 신라 승려 혜초, AD 1220년 칭기즈칸, 그리고 AD 1332년 아랍 여행가 이븐바투타까지 이곳을 거쳐 간 역사적 인물 또한 많다.
칭기즈칸의 파괴, 티무르의 재건
1220년 이 땅에 진입한 칭기즈칸은 당시 호라즘(Xorazm)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를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호라즘이 몽골 사신을 죽인 데 대한 복수다. 티무르는 완전히 파괴된 아프로시압(Afrosyab) 언덕 아래, 바로 그 자리에 도시를 다시 세웠다. 동방의 낙원, 중앙아시아의 로마로 키우고 싶은 욕심에 정성을 다해 건설했다. 당시 티무르는 제국의 수도를 정하기 위해 우즈베크 여러 도시에 양고기 날 것을 일정 기간 보관하게 한 후,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사마르칸트를 선택했다. 그만큼 기후가 좋다는 뜻이다.
▲사마르칸트와 티무르 제국의 황금기를 통치했던 왕이자 과학자였던 울루그벡의 동상. 사진 = 김현주
떠버리 타지크인
오전 11시 조금 넘은 시각 도착한 사마르칸트역 건물은 심플하지만 모던하다. 여기는 압도적으로 타지크인이 많다. 역에서 시내로 가는 27번 버스에 타지크인이 타더니, 나를 보고 여러 번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떠든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걸쭉한 입담에 차 안에서 여러 번 폭소가 터진다. 버스 운전기사도 룸미러로 힐끔힐끔 쳐다본다. 호텔 입구 골목에 있는 과일 가게에서 복숭아와 포도를 잔뜩 샀다. 꿀복숭아 10개에 3000솜(한화 2000원)이다. 믿을 수 없는 가격이다.
한국인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도시 탐방에 나선다. 인구 40만의 우즈베키스탄 제2도시는 제법 분주하다. 걸어서 다닐 수 있었던 부하라와 많이 다르다. 도시 북동쪽 외곽 울루그벡 천문대 터와 기념박물관을 먼저 찾는다. 호텔 부근 길가에서 택시가 잡히지 않는데, 지나가는 청년이 차를 태워준다. 한국인과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며 먼 길을 일부러 돌아서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크나큰 호의를 베푼 우즈베크 청년을 가이드를 빙자해 수고료를 요구하는 사람쯤으로 알고 잠시 경계했던 내가 미안해진다.
티무르 제국의 황금기를 통치한 울루그벡
티무르의 손자 울루그벡(1394∼1449)은 사마르칸트와 티무르 제국의 황금기를 통치했던 왕이자 과학자였다. 지금은 기초만 남아 있지만 이전에는 높이 40m에 이르는 거대한 천문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을 중시하고 종교를 경시하는 그의 통치를 싫어했던 이슬람 승려들의 사주로 자신의 아들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천문대와 마주한 기념관에는 각종 사진과 모형도, 천문 관측기 등이 들어서 있다.
티무르 제국을 계승한 무굴 제국
티무르 제국은 머지않아 허망하게 끝이 나지만(1507년 멸망), 그의 증손자이자 아무르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가 인도에 무굴 제국을 수립해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다. 바부르는 타슈켄트 동쪽 안디잔(Andijan) 출신으로, 1504년 남쪽으로 원정해 아프가니스탄 카불을 점령하고 인도로 진출해 1526년 무굴 제국을 세웠다. 무굴 제국은 이후 200년간 번성하다가 영국의 인도 진출 후 소멸하고 말았다. 바부르의 무덤은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있다고 한다.
우즈베크서 한국말 할 때는 조심스럽게
이어서 아프로시압 역사박물관을 찾는다. 천문대에서 시내 방향으로 2km쯤 되는 곳에 있다. 알렉산더의 원정 기록과 동전 출토물을 비롯해 7∼8세기 토기 등을 전시했다. 박물관 1층 중앙 홀에는 7세기에 그려진 사절도가 있다. 바흐만 왕의 즉위식에 참석한 외국 사절단을 그린 것인데, 그 중에는 한국 사절단도 있다. 당시 대당(對唐) 전쟁의 절박한 상황에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찾아간 고구려 사신들일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과 우즈베크의 관계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박물관에서 한 우즈베크 남성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서울 장안평을 오가며 중고 자동차 중개업을 한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과 우즈베크의 관계는 겹겹이 쌓인 채 21세기 방식으로 발전해 간다. 어쨌거나 가는 곳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우즈베크인을 만나니, 이곳에서는 말조심 하면서 다녀야 한다.
▲비비하눔 모스크는 티무르가 왕비 9명 중 가장 사랑했던 비비하눔의 이름을 땄다. 인도 원정 중 비비하눔이 건축가에 마음을 빼앗기자 티무르는 왕비와 건축가를 모두 처형했다. 사진 = 김현주
다니엘 묘?
박물관 인근 다니엘(Doniyor) 모솔리움은 길이 18m에 이른다. 다니엘은 이슬람에서도 위대한 성인이기 때문에 묘가 계속 길어져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원래 다니엘의 묘는 이란 수사(Susa)에 있다. 유대 민족의 바빌론 유수(BC 587∼BC 538) 시절에 그곳에 묻혔던 것이다.
그러나 티무르 제국 전성기 때 그곳에서 유체 일부를 가져와 사마르칸트에 안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식으로 복사된 다니엘 묘는 현재 전 세계 여섯 군데에 있다고 한다. 다니엘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에서 모두 언급하는 성인(聖人)이므로, 각 종교의 순례객들이 이곳을 찾아온다고 한다.
6일차 (사마르칸트 → 타슈켄트)
모스크, 메드레세, 모솔리움
어제에 이어 사마르칸트 탐방을 계속한다. ‘사마르칸트의 브로드웨이’라고 불리는 레기스탄 광장 부근 보행자 거리는 관리가 잘 돼 쾌적하다. 수풀 우거진 공원과 세련된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에 우뚝 솟은 메드레세, 모스크, 혹은 모솔리움의 파란색 타일들이 아침 해를 반사한다. 사마르칸트는 한때 동방의 로마, 세계의 중심을 꿈꿨던 도시였다. 독립 이후 계속 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카리모프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한다.
▲우즈베키스탄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출출할 때 빵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한 번에 여러 끼를 해결할 만큼 크다. 사진 = 김현주
티무르의 사랑을 독차지한 비비하눔. 그러나…
비비하눔(Bibi Khanum) 모스크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규모가 매우 커서 중앙아시아에서 최대급에 속한다. 티무르의 왕비 8명 중 가장 사랑했던 비비하눔의 이름을 딴 모스크다. 입장료는 외국인에게 10배 받으니 8000솜(한화 5000원)이다.
모스크 안에는 거대한 코란을 올려놓은 받침대가 있다. 시민들이 여러 차례 받침대 주위를 도는 세레모니를 한다. 울루그벡이 몽골에서 가져왔다는 받침대 주위를 돌면 남자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인기가 좋다. 모스크 건너편에는 비비하눔의 모솔리움이 있으나, 모스크의 위용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티무르의 인도 원정 도중 비비하눔이 모스크 건축가에게 잠시 마음을 빼앗겼다. 이에 분노한 티무르가 왕비와 건축가를 모두 처형하고는 괴로운 마음에 지어준 모솔리움이다.
서역 바자르 풍경
비비하눔 모스크 바로 옆에는 아주 큰 중앙 바자르(재래시장)가 있다. 모스크와 담 하나를 마주하고 있어 시장 어디에서든 웅장한 모스크를 보며 쇼핑하는 운치가 있을 것 같다. 2700년 된 서역의 바자르에서 시장의 진수를 만끽한다. 우즈베크 사람들의 다양한 얼굴을 접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생선 빼고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있다.
레기스탄 광장
비비하눔 모스크에서 보행자 거리를 따라 얼마 안 가면 레기스탄 광장이다. 사마르칸트의 랜드마크인 레기스탄은 ‘모래 땅’이라는 뜻으로, 각종 국가 및 도시 집회용 공공 광장이다. 광장에는 울루그벡 시대 이후 세워진 메드레세가 세 개 서 있다. 광장 왼쪽에 자리 잡은 울루그벡 메드레세는 광장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처음엔 신학교로 출발했으나, 훗날 각종 연구소로 쓰였다고 한다. 천문학자 울루그벡을 상징하듯, 푸른 별을 형상한 정면 외관 문양이 눈에 띈다.
▲구르에미르는 티무르 왕족의 묘다. 티무르와 그의 아들, 손자 울루그벡 등이 묻혔다. 사진 = 김현주
메드레세 아치 문양 구설
광장 오른쪽에는 쉬르도르 메드레세가 비슷한 크기로 서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입구 아치 높은 곳에 그려진 사자 문양이다. 우상 숭배를 금하는 이슬람에서 사람이나 동물을 형상화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쉬르도르 메드레세를 설계한 건축가는 이슬람 교리를 어긴 데 양심의 가책을 느껴 메드레세 완성 후 자살했다고 한다. 광장 정면으로 보이는 틸라가리 메드레세는 보수적인 양식으로 지었다. 이슬람 교리에 어긋난 문양 때문에 쉬르도르 메드레세가 말썽을 빚자 무슬림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급히 세웠다고 한다.
걸어서 멀지 않은 곳에는 구르에미르(Gur Emir)가 있다. ‘왕의 묘(Gur)’라는 뜻이다. 티무르를 비롯해 그의 아들, 손자 울루그벡 등 티모르 왕족의 묘다. 1405년 오트라르 원정에서 무하마드 술탄이 전사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서 급히 열흘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중국 원정에서 급사한 티무르도 여기에 묻혔다.
(정리 = 김금영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