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뉴질랜드] 집보다 공원 많은 남반구 끝 따끈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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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5일차 (피지 난디 → 뉴질랜드 오클랜드)
더 남쪽 오클랜드로
새벽에 난디 공항으로 향한다. 남녘 하늘에는 이름 모를 새벽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 촘촘히 박혀 있다. 뉴질랜드행 에어퍼시픽(Air Pacific) 항공기 승객들은 피지에서 연말 휴가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백인 승객들이 대부분이다. 그들과 섞여서 나는 피지에서 남쪽으로 1336마일 떨어진 오클랜드로 향한다.
이륙 세 시간 후 항공기는 오클랜드에 접근한다. 배들이 점점이 떠 있는 푸르디푸른 바다가 끝나자 육지가 나타난다. 도시가 연꽃잎처럼 물 위에 떠 있다. 굴곡 많은 해안선이 들쑥날쑥 예쁜 그림을 그려 놓았다.
오클랜드는 뉴질랜드 전체 인구 430만 명 중 1/3인 150만 명이 살고 있는 최대 도시다. 입국장에 당도하니 마오리 문양 게이트가 반긴다. 여행 안내책자와 지도가 산더미처럼 쌓인 것을 보며 부자 나라에 왔음을 확인한다. 이민국 관리는 한국 여권을 보더니 얼굴 확인도 하지 않고 스탬프부터 찍어준다.
다인종-다문화 도시
공항 터미널을 빠져 나오니 남위 37도의 찬란한 여름 태양이 반긴다. 한여름이라지만 날씨는 선선해 오늘 최고기온 20도다. 뉴질랜드의 다양성에 우선 놀란다. 아시아인이 아주 많다. 미국 서해안 어느 도시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유럽인의 이주 역사가 길지 않은 가운데 아시아인의 꾸준한 유입은 이곳에 다인종, 다문화 국가를 이룩해 놓았다.
에어버스(Air Bus)를 타고 시내로 향한다(편도 NZD 16, 한화 약 1만 4000원). 오르락내리락 하는 퀸 스트리트(Queen Street)를 따라 버스는 남행한다. 차도가 넓은 것만큼 인도 또한 널찍하다. 콜로니얼 영국식 건축물과 곳곳에 펼쳐진 드넓은 녹지가 어우러지니, 영국과 미국을 섞어 놓은 것 같은 도시 풍경이다.
▲버스를 타고 퀸 스트리트를 달렸다. 남북으로 달리는 오클랜드의 중심가로, 런던을 많이 닮았다. 사진 = 김현주
높아진 마오리족의 지위
남반구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라는 328m 스카이 타워(Sky Tower) 부근의 호텔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장을 풀고 시내 탐방에 나선다. 퀸 스트리트를 따라 페리 부두까지 간다. 페리빌딩 앞 퀸엘리자베스(Queen Elizabeth) 광장은 소박하지만 오클랜드의 중심이다.
오클랜드 인구의 11%를 차지한다는 마오리족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물론 혼혈이 많이 진행돼 백인과 구분이 안 될 정도의 마오리족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고 한다. 뉴질랜드 정부는 1987년 마오리어를 공용어로 인정했을 만큼, 원주민들의 문화적 유산을 소중히 여긴다.
▲오클랜드 시내 중심 풍경. 콜로니얼 영국식 건축물과 곳곳의 드넓은 녹지가 어우러져 영국과 미국을 섞어 놓은 듯한 풍경이다. 사진 = 김현주
돛배의 도시
페리 터미널에서 와이테마타(Waitemata) 만 건너편 섬들로 페리가 수시로 오간다. 바람은 거칠지만 돛에 의지해 만을 가로지르는 요트도 심심찮게 본다. 도시 시민 1인당 요트 척수가 가장 많은 오클랜드는 그래서 돛배의 도시(City of Sails)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점잖고 고적하고 소담한 거리를 목적 없이, 방향 없이 천천히 걷는 저녁 시간이 무척이나 넉넉하다.
6일차 (뉴질랜드 오클랜드)
바다 아니면 공원
지난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계속 부슬거리는 아침이다. 아침 식사 후 홉온앤오프(Hop-On & Off) 시내 순환 투어버스(1일 약 3만 1000원)를 타러 페리터미널로 나간다. 투어버스는 와이테마타 만을 끼고 동쪽으로 달린다. 만의 깊숙한 곳마다 수많은 요트가 정박해 있다. 돛배의 도시답다. 해안을 따라 넓은 공원이 이어지고 낮은 언덕을 따라 전원주택들이 올라가는 풍경이 이어진다.
바스티온 포인트(Bastion Point) 전망대에서 내렸다. 완만하게 굴곡진 와이테마타 만을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조셉 세비지(Joseph Savage) 기념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진 곳에서 언덕 아래 미션 베이(Mission Bay) 해변을 굽어본다. 비가 오는 검붉은 바다를 바라보니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다음 목적지 오클랜드 박물관에서 순환버스를 내려 보조 노선(satellite bus)으로 갈아탄다. 전쟁 박물관이기도 한 오클랜드 박물관은 이 도시 방문자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다. 박물관을 빙 둘러서 건물 외벽에 뉴질랜드가 참전한 세계 각국 전장(戰場)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저 멀리 페리 부두와 퀸엘리자베스 광장이 보인다. 소박한 광장은 오클랜드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사진 = 김현주
광야에 이룩한 문명
이든 동산(Mt. Eden)으로 올라가다 보면 유달리 예쁘고 정돈이 잘 된 주택가를 지난다. 버스가 조금씩 고도를 높이며 언덕을 오르자 시내 중심과 항구, 오클랜드 브리지가 멀리서 쉬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다. 오클랜드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해발 168m 산 정상에는 사화산(死火山, extinct volcanoes) 분화구가 푹 꺼져 있고 전망대에는 표지석이 서 있다. ‘거친 광야를 웃음 짓는 땅으로 바꾼 개척자들의 공적을 기리며 1872년 건립’했다고 기록했다.
발아래 안개 덮인 도시가 조용히 펼쳐져 있다. 남위 37도, 적도에서도 한참 남쪽으로 떨어진 광야에 인간이 건설한 문명이 반짝거린다. 이든 동산에서 내려온 버스는 럭비 구장 이든 파크(Eden Park)와 오클랜드 동물원을 지난다. 주택 지역보다는 럭비 혹은 크리켓 스타디움이나 공원 면적이 더 넓어 보이는 전원도시의 면모를 확인한다.
▲스카이 타워(Sky Tower)는 높이 326m로, 남반구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다. 사진 = 김현주
이번에는 교통박물관(MOTAT, Museum of Transport & Technology)에서 내렸다. 증기기관, 농기계, 구형 자동차 컬렉션, 19세기 오클랜드 골목 풍경, 19세기 주택 등을 소개한 평범한 공간이지만, 가족 단위 방문객들로 붐빈다. 어린아이들을 안고 업고 이곳을 찾는 젊은 부부들, 천방지축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단속하는 모습, 박물관 야외 벤치에 차린 조촐한 가족 점심식사 등 우리나라 여느 공원에서 보는 모습과 다르지 않은 정겨운 풍경이다.
▲오클랜드 박물관 외벽엔 뉴질랜드가 참전한 세계 각국 전장(戰場)이 새겨져 있다. 사진 = 김현주
오클랜드 박물관
마침내 오클랜드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G층은 태평양관, 1층은 자연사 박물관, 2층은 전쟁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태평양관에 모아 놓은 마오리족에 관한 기록과 소장품들이 다양하고 방대하다. 마오리족은 3700년 전 동남아시아에서 이곳 아오테아로아(Aotearoa), 즉 현재의 뉴질랜드로 이동한 폴리네시아 인종이다.
참고로 6000년 전에 이동을 시작한 동남아시아 출신 폴리네시아인은 이후 수천 년에 걸쳐 뉴질랜드는 물론이고 북동쪽으로는 하와이, 남동쪽으로 쿡(Cook) 제도를 지나 라파누이(Rapanui), 즉 오늘날 칠레 영토인 이스터 제도까지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폴리네시아인의 뛰어난 항해술로 태평양 대부분 지역이 폴리네시아 문화권에 들어간 것이다.
박물관 직원인 한 마오리 남성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다. 그는 모국어가 마오리어라고 한다. 마오리어가 속한 오스트라네시아(Austranesia) 계열 언어는 아프리카 동쪽 마다가스카르 섬까지 방대한 지역에서 사용된다. 술어가 문장 맨 뒤에 나오는 우랄알타이어와 같은 구조다.
▲아름답게 꾸며진 조셉 세비지(Joseph Savage) 기념 공원. 언덕 아래는 미션베이 해변이다. 사진 = 김현주
영국을 따라 다닌 전쟁터
자연사관은 오클랜드가 화산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시작한다. 박제와 조형물 등 전시물들은 수준이 높지만 특별한 주제 의식이 없어서 관람에 혼란을 느낀다. 날씨가 불규칙하고 할 일이 적어서 심심한 이 나라 사람들이 여기에도 가득 차 있다. 소박한 나라의 소박한 사람들이다. 3층 전쟁 기념관은 뉴질랜드 군대가 참전한 세계 각국, 각 지역 전쟁에 관한 내용이다. 영국의 강한 입김 아래 존재하는 영연방 국가라는 이유로, 영국이 세계 각 지역에서 벌인 전쟁터에는 거의 언제나 뉴질랜드 군인들이 따라갔던 것이다.
마음의 상처
한국전에도 참전해 41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했음을 강조한다. 한국전 기록 앞을 지나면서 가슴이 뭉클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전쟁 기념관의 주제를 ‘마음의 상처(scars of the heart)’로 정한 것이 와 닿는다. 목숨을 버리다시피 참전한 전쟁 용사들이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잊히기 때문에 생긴 마음속의 상처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든 동산 정상에 올랐다. 오클랜드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해발 168m 산 정상에는 사화산(死火山, extinct volcanoes)의 분화구가 푹 꺼져 있고 전망대에는 표지석이 서 있다. 사진 = 김현주
남반구의 긴 여름 해
여행 일지를 정리하는 지금 시각, 밤 9시가 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깥이 밝았기 때문에 밤이 깊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새삼 여기는 지금 여름해가 긴 남반구 남위 37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혼자 여행하는 쓸쓸함을 달래려고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어느 채널도 재미가 없다. 자국 프로그램으로 모든 편성을 채우기에는 인구가 적다. 콘텐츠 시장이 빈약한 것이다. 한국의 영상 콘텐츠, 특히 TV 콘텐츠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시 적막한 밤이다.
(정리 = 김금영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