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동티모르] 패인 산길 돌고도니 ‘옛한국 같은 산마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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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6일차 (동티모르 딜리)
에르메라 가는 길
딜리는 작은 도시라서 어제 내친 김에 탐방을 끝내 버리니 오늘은 특별히 갈 곳도, 할 일도 없다. 시간을 보낼 만한 박물관이나 미술관, 혹은 도서관도 아직 준비돼 있지 않다. 그래도 여행의 마지막 날인데 호텔에서 빈둥거릴 수는 없다. 어제 탐문해 정보를 확보한대로 딜리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중부 산악 지역에 소재한 지방도시 에르메라(Ermera)에 다녀오기로 한다. 60km 정도 거리지만 도로와 교통 상황을 예측할 수 없으니 가급적 일찍 나섰다.
호텔을 나와 택시로 도시 서쪽 외곽에 가니 에르메라 방향으로 가는 마이크로렛(Microlet) 미니버스들이 줄지어 기다린다. 금방 떠난다기에 떠밀리다시피 해서 올라탄 버스는 진짜로 곧 출발한다. 인도네시아 시골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승객이 차야만 떠나기 때문에 버스는 터미널 부근을 맴돌며 승객을 채워 나간다. 정해진 시각표 같은 것은 없다. 승객이 모두 차는 때가 바로 시각표다.
불량 도로
버스는 딜리의 서부 외곽 해안길을 따라간다. 가는 곳마다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원시 해변을 만나는 딜리는 정겹고 예쁘다. 이윽고 버스는 해안을 버리고 산길로 접어들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승객을 15명이나 태운 미니버스는 폭우로 다리가 끊기고 도로 중간이 잘려 나가고, 씻기고 패이고 떠내려간 불량한 도로를 힘겹게 달린다. 사실은 어제 택시 기사에게 에르메라 왕복에 얼마냐고 물어 봤을 때 거기 못 간다고 하기에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오늘 와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딜리에 SUV 차량이 유독 많은 이유 또한 알겠다.
▲에르메라로 향하기 위해 미니버스를 탔다. 가는 도중 폭우로 다리가 끊기고 도로 중간이 잘려 나가고 씻기고 패인 불량한 도로를 힘겹게 달렸다. 사진 = 김현주
돈쓸 일 많은 신생국
교통 인프라 구축이 급선무이지만 문제는 돈이다. 사람과 물자가 소통해야 산업이 부흥하고, 산업이 부흥해야 인프라 재투자가 이뤄지는 선순환 구조가 여기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는 여기를 점령했던 24년 동안 투자도 많이 했다는데 포르투갈은 451년 동안 이 땅에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야속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어쩌리. 한때의 해양대국 포르투갈은 500년 전 얘기일 뿐이다. 포르투갈은 자기 먹고 살기도 바쁜 유럽의 소국 아닌가? 1975년 식민지 포기도 사실은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 이 땅을 관리하느라고 비용을 쓰느니 돌려주는 게 낫다는 판단 때문 아니었던가? 포르투갈의 답답한 사정을 헤아리니 조금은 이해해줄만도 하다.
▲딜리의 슈퍼마켓. 규모는 작지만 없는 것이 없다. 사진 = 김현주
산중 도시
두 시간 쯤 걸렸을까? 구절양장 높은 언덕을 여러 개 넘더니 드디어 에르메라다. 중부 산악지대에 자리한 에르메라는 평균 해발 600m 지역이라서 날씨가 선선하다. 높게 자란 옥수수, 커피 농장, 야자수 늘어선 가로, 허접한 물건들을 파는 노천 시장, 할 일 없이 거리에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 수백 년 살아왔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이런 것들이 동티모르 산골 마을 풍경이다. 동서남북 사방을 산이 둘러싸고 있다.
이 마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에게 쏠리는 것 같아 부담된다. 에르메라는 동티모르 커피의 절반을 생산하는 지역이다. 아라비카(Arabica) 품종인데 비와 바람이 풍부한 이 지역이 재배의 최적지라고 한다. 동티모르 커피는 그러나 좋은 품질에도 불구하고 가공처리 시설과 기술이 없어서 미가공 상태로 인도네시아로 싼 값에 팔려나간다고 한다.
▲에르메라 시골성당에서 신부를 만났다. 환한 미소가 인상적이다. 사진 = 김현주
일요일 미사 참석
미사 시간에 맞춰 마을 성당으로 서둘러 간다. 테툼어로 진행되는 미사에 나도 조용히 끼어 앉았다. 지금 내 주위에 앉은 동티모르 사람들은 기도를 하며 무엇을 바랄지 궁금하다. 그래도 예수가 있어서 식민지 설움, 전쟁의 아픔, 그리고 가난까지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성당이라지만 슬레이트로 겨우 지붕을 얹은 간이 옥외시설이다.
드디어 미사가 끝났다. 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도 한 듯 사제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다가와 이방인에게 환영의 악수를 청한다. 붙임성이 좋은 편한 사람들이다. 성당 뒤 십자가 동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본다. 아담한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까지도 내 귀에 두런두런 들리는 것 같다. 마을은 아주 옛날 한국 산골 마을 풍경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그리운 모습이지만, 여기 동티모르는 전부가 이런 모습이다. 성당 앞 콘크리트 교량에는 일본이 지어줬다는 기념 현판이 새겨져 있다.
마이크로렛 미니버스
이제는 딜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미니버스에 오르지만 떠날 줄 모른다. 동네를 열 바퀴 이상 뱅뱅 돌고서야 출발이다. 망가진 채 전혀 보수되지 않은 험한 길을 오느라 60km 거리를 두 시간이 훨씬 넘게 걸린다. 에르메라에서는 적절한 수의 승객을 태우고 출발했지만 딜리쪽으로 가면서 승객이 계속 늘어난다. 내가 보기에는 더 이상 좌석이 없어 보이는데 승객을 또 때우고 그러다 보면 어딘가에 빈자리가 또 만들어진다.
힘든 미니버스 여행이었지만 동티모르인들의 체취에 섞인 것만으로도 의미를 두기에 충분하다. 미니버스의 협소한 틈에 끼어 동티모르 사람들의 다양한 얼굴을 본다. 인도네시아인과는 분명히 다르고 파푸아뉴기니나 피지에서 보게 되는 멜라네시아인과도 분명히 다르다. 짙은 피부를 가졌지만 검지는 않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451년 동안 통치한 포르투갈인의 피가 어딘가에 조금씩은 섞여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이 많다는 점이다.
▲산악국가 동티모르에서는 가는 곳마다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원시 해변을 만난다. 사진 = 김현주
여행 마지막 밤 자축
무사히 호텔로 돌아오니 하루가 다 갔다. 내일은 귀국한다고 하니 평소답지 않게 조금은 가슴이 설렌다. 지난 몇 년 간 해왔던 다른 여행보다 짧았지만 힘들었다는 뜻이리라. 지난 여러 여행들, 때로는 한 달 넘게 지속된 솔로 여행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그런 여행들을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여행 일지 정리를 마치고 여행의 마지막 밤을 자축하는 조촐한 맥주 파티를 한다.
지구 곳곳 인류 형제가 사는 모습을 보겠다는 순수한 열정 끝에 계획했고 실행했던 여러 여행들이 큰 착오 없이 진행된 것에 감사드린다. 리조트 휴양 여행도 아니고, 현지에서 가이드를 만나 그에게 일정을 맡기고 편안하게 따라다니는 여행도 아니다. 풍족한 시간과 예산으로 먹을 것과 잘 것, 탈 것을 걱정하지 않고 다니는 여유로운 여행도 아니었다. 태평양 지역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주제를 수행하고 여행을 마쳐가는 감회가 새롭다.
17일차 (동티모르 딜리 → 발리 경유 → 싱가포르 환승 대기)
다시 머나먼 길
동티모르의 아침을 맞는다. 집에 돌아간다는 설렘에 새벽에 눈을 떠 선잠을 자다 깨기를 여러 번, 지금 시각 오전 7시 30분, 한국 시각 오전 8시다. 남위 8도, 동경 126도인 이 지역은 다행히 한국과 시차가 거의 없다. 한국에서 곧장 남쪽으로 3165마일(5094km) 떨어진 곳에 있지만 내가 오늘 돌아가야 할 길은 간단치 않다.
문명의 중심 지역으로 구심력이 있는 항공기 루트는 여러 번의 우회와 환승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동티모르 딜리에서 인도네시아 메르파티 항공기를 타고 발리 덴파사르까지, 그곳에서 에어 아시아(Air Asia) 항공기로 싱가포르, 싱가포르에서 중국동방항공으로 상해 환승 인천 공항 도착이다. 물론 발리 덴파사르 공항까지 가면 한국으로 가는 대한항공 직항이 있으나 여행자의 각박한 예산 형편은 그처럼 편한 여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에르메라 주일 미사 풍경. 미사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마을 성당으로 서둘러 간다. 사람들이 기도를 하며 무엇을 바랄지 궁금하다. 사진 = 김현주
항공기 출발은 오후 1시 40분, 시간이 많다.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 기간 동안에는 평소답지 않게 집으로 돌아갈 날을 자주 기다렸지만 막상 떠나려니 아쉬워 호텔 주위를 걸어본다. 여행사가 있기에 들러서 오늘 오후 메르파티 항공기 정시 운항 여부를 확인했다. 만약 이 항공기가 결항하거나 심각하게 지연하면 중대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저께 쇼핑하러 들렀던 중국인 운영 슈퍼마켓에는 물건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짐을 내리느라 바쁘다. 건너편 마카오식 패스트푸드 식당 이외에도 약국, 건설회사, 헤어스타일리스트 등 여러 중국인 상점이 연달아 붙어 있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내전의 상처를 허름한 건물을 통해 느낀다. 사진 = 김현주
5개 국어 능통한 중국계 티모르인 레이
호텔에서 만난 중국계 티모르인 레이(Lei)를 소개한다. 중국 광동성 광저우에서 이곳으로 건너온 화교의 3대손이다. 한때는 에어컨 설비 사업을 했고 지금은 지붕 재료 및 시공(roofing) 사업을 한다. 딜리의 지붕은 모두 자기가 맡는다고 하기에 돈을 많이 벌었겠다고 했더니 먹고 살만 하다고 겸손을 떤다.
테툼어, 중국어, 바하사 인도네시아어, 영어, 그리고 약간의 포르투갈어를 한다. 어느 언어가 가장 편하냐고 물어보니 중국어라고 한다. 5개국 언어 능통…. 외국어 습득 환경이 좋을 리 없는 이곳에서 성취한 재능이라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여행이란 이런 사람들은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여서 참으로 멋지다.
(정리 = 김금영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