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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맞춰 독서 ①] 사드 곤경, ‘삼국지’ 덮고 ‘열국지’ 열어야 풀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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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97호 최영태 기자⁄ 2016.08.18 17:01:34

▲최영태 편집국장

중국 춘추전국 시대 550년간의 역사를 다룬 소설 ‘열국지’라는 낯선 책을 집어 들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 전문가 김시덕 박사의 책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2015년)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고서였다. 

한국 사람들 일부는 수많은 플레이어로 이루어진 현실세계를 냉철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열국지나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을 권하고 싶다.(168쪽)  

'한중일 삼국지'적인 세계관을 폐기하는 것이 20세기 후기의 한국인이 이뤄낸 성과를 21세기에 지속할 수 있는 길이다.(245쪽) 

결국, 저자의 주장은 ‘삼국지적 세계관’을 파기하고, ‘열국지적 세계관’으로 들어가라는 주문이었다. 

그럼 삼국지적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한국인들이 끊임없이 읽어대고 있고, 저명한 소설가들이 자신만의 번역판을 지치지도 않고 새롭게 내놓는 역사소설 ‘삼국지연의’에서 펼쳐지는 세계관이다. 

▲삽화가 첨부된 ‘삼국지연의’의 판본. 인자한 덕장(德將) 유비와, 한족(漢族) 출신의 걸출한 전략가 제갈공명을 미화함으로써 중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역사적 실재와 다르게 너무 유교주의적으로 각색했다”는 비판도 듣는 역사소설이다.(사진=위키피디아)


‘삼국지’ 읽으면 유비가 최고인데, 왜 역사학자들은 간사한 조조가 최고라고 하지?

쉽게 말하면, 유덕하고 왕도(王道) 정치를 펼친 유비의 ‘선한 촉나라’가, 중원의 간웅(奸雄) 조조의 ‘사악한 위나라’, 그리고 남쪽 원씨 가문이 지배하는 ‘야만스러운 오나라’가 패권을 다투지만, 결국 선한 촉나라가 가장 큰 활약을 펼치며 승리하는 시점까지만 기술한 역사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이끌어낸, ‘인자한 자가 악한 자를 이긴다’는 권선징악적, 유교주의적 세계관이다. 

이런 삼국지연의에 대해 한국에서는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싸우지 마라"는 둥, "삼국지를 열 번 읽으면 물 위를 걸어 다닌다"는 둥 이 책만 읽으면 세상의 모든 이치에 통달하며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격언이 죽지도 않고 수십 년 동안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정작 중국 역사에서는 중원의 조나라를 정통 왕조로 보고, 실제로 3국의 다툼에서 최종 패권을 차지한 것은 조조의 위나라였으며, 유비는 서쪽에 치우친 한미한 땅에서 잠시(서기 221년 ~ 263년) 촉나라를 경영했을 뿐인데도, ‘삼국지연의’는 멸망한 한나라의 정통성을 유비가 잇는 듯이 기술해 놨다는 점이다.

‘삼국지연의’만 읽은 사람은 유비-관우-장비의 촉나라 3인방이 중국 역사의 중심인 것으로 착각하지만, 실제의 역사에서는 위나라의 조조가 시대의 주인공이었다. 적벽대전 같은 극히 일부의 전투에서만 제갈량의 도움으로 승리했고 나머지 전투에서는 판판이 지기만 했던 한심한 인물 유방(그는 귀족의 이익을 주로 대변했다)보다는, 당시 중국 사회를 지배하던 귀족문벌에 맞서 평민 인재를 과감히 기용하며 개혁을 꾀했던 조조가 훨씬 의미있고 시대를 선취한 인물이었다는 게 중국 역사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결국 ‘삼국지적 세계관’을 못 벗어난다는 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착한 나’가 ‘악한 쟤’를 결국 이길 것으로 보는, 지금 당장은 못 이겨도 결국 언젠가는 정의가 구현돼 착한 내 쪽이 이길 거라고 희망하는 상태를 말한다. 

세상을 선과 악의 대립으로만 보는 시각은, 한국의 좌파(‘선한 진보가 악한 수구를 이긴다’는), 우파(‘선한 한국이 악한 일본을 이긴다’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심리적 특징이기도 하다. 

‘착한 놈이 계속 줘맞다가 마지막 큰거 한방으로 이기는 재미’ 좀 없으면 안 되나?

그렇다면 열국지적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삼국이 다투는 ‘삼국지연의’가 소설로서 재밌게 읽히는 이유는, 우선 구도가 쌈박-간결하기 때문이다. 중국 전역에서 벌어지는 얘기인지라, 지명-인명은 숱하게 많이 나오지만, 그대로 삼국 간의 다툼이기 때문에, 3이란 숫자가 주는 매력(남녀 간의 삼각관계가 재미있듯)과 함께, 지고이기는 관계를 세 나라에 국한해 볼 수 있다는 간결함이 있다. 반면 나라 이름과 사람 이름이 수도 없이 교체되며 나오는 열국지는, 삼국지연의처럼 하나의 주제가 변주되면서 펼쳐지는 것이 아닌지라 일관성의 재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삼국지연의는 ‘결국 선이 악을 이기는’ 구도를, 유비가 계속 패배만 하다가 마지막 적벽대전에서 ‘큰거 한 방’으로 간웅 조조에 패배를 안겨주는 재미를 선사한다. 이는 마치 인생에서건 권투에서건 계속 줘맞기만 하던 ‘정의의 사도’ 록키 밸보아(영화 ‘록키’의 주인공)가 마지막 회심의 한 방으로 악의 무리를 KO시키는 통괘함과도 흡사하다. 그러나 열국(列國: 여러 나라)이 다투는 열국지에서는 착한 임금이 악한 신하나 다른 나라의 악한 왕의 꼬임에 빠져 허망하게 죽는 장면이 숱하게 나온다. 그러니 읽기 힘들고, 읽어도 재미도 덜하니 삼국지연의만큼 읽히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이런 열국지를 읽어나가다 보면 김시덕이 말했듯, 수많은 플레이어로 이루어진 현실세계에서 선하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악하다고 꼭 패배하는 것도 아니라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세계관을 갖게 된다. 

‘삼국지적 세계관’을 못 빠져나오는 한국인은 주변의 국제정세를 한-미-중, 한-미-일, 남북한+중국 등 3국이 얽힌 관계로만 보는 데 익숙하다. 이런 식이다. ‘중국에 붙을 것이냐, 미국에 붙을 것이냐’ ‘한미일 3국 관계에서 일본은 미국과 밀착하는데 그러면 한미동맹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우리가 불리해지는 것 아닌가’ ‘중국이 북한보다 남한과 더 친하다면 중국이 나서서 북한의 팔을 비틂으로써 북핵을 해결하고 결국 북한 붕괴에 앞장서야 하는 거 아닌가’ 따위의 시각이다. 물론 이런 ‘삼국지적 스토리텔링’은 대개의 경우 현실과는 상관없는, 그냥 이야기 만들기 수준에 불과하다.

미국 믿다가 성동격서에 발등찍힌 남베트남, 
정나라 믿다가 나라 말아먹힌 대나라

▲1975년 4월 29일 남베트남의 함락에 따라 사이공의 CIA 요원들이 옥상에 비상착륙한 미군 헬리콥터에 올라타는 장면. 정세현 전 장관은 “당시 미국은 북베트남과 판을 다 짜놓고, 북베트남에 대대적인 폭격을 하면서 미국만 믿는 남베트남 정부에는 평화협정에 서명하라고 시키는 성동격서 전략을 썼다”고 전했다. (사진=위키피디아)

삼각관계로만 세계를 봤기에 패망한 사례는 역사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우선 남베트남의 예가 있다. 전 통일부장관 정세현의 책 ‘외교 토크’에 나오는 내용이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쥐도 새도 모르게 북베트남과 판을 다 짜놓고 남베트남 정부에 평화협정에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베트남 정부는 키신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협상하는 동안에도 북베트남에 대대적인 폭격을 해 줬기 때문입니다. 남베트남은 그게 성동격서 전략인지 전혀 몰랐던 것이죠.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협상을 끌고 가기 위해 한쪽에서 폭격을 벌인 겁니다. 이렇게 미국은 뒤로 혹은 물밑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238쪽)

강대국은 행동반경이 넓다. 반면 한국 같은 상대적 약소국은 행동반경이 좁기에 안목 역시 좁을 수밖에 없다. ‘열국지’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강대국을 지나치게 믿은 바보 약소국이 어이없이 망한 얘기다. 

당시 강대국인 송-위 나라와 약소국으로서 3국 연합에 가담한 채 나라가 소국 대(代) 나라를 공격한다. 두 달 간 공격에 시달리지만 대 나라 백성들은 치열하게 맞서 성을 지켰다. 이때 당시 최강국인 정 나라의 왕(정 장공)의 군사가 몰래 다가와 도와주겠다고 한다. 송-위-채 연합군에는 결연히 맞서던 대 나라 임금은 정 장공을 하늘에서 내려온 구세주처럼 열렬히 맞이했고 “후대까지 정 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며 정 장공의 군대를 성 안으로 들인다. 그러나 일단 성 안에 들어온 간웅(奸雄) 정 장공은 태도를 돌변해 대 나라를 차지해버린다. 대 나라 임금은 “이리를 막자고 호랑이를 끌여들였구나”고 한탄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는 얘기다. 

최근 사드 배치 문제로 논란이 뜨겁다. 제대로 된 국민적 논의도 없었지만 “혈맹 미국이 설마 한국에 불리한 일을 하겠냐”고 맹신하는 사람들은, 남베트남과 대 나라의 얘기를 한번 들어주면 좋겠다.

한국과 중국은 항상 한 편 먹었다고?

‘삼국지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열국지적 세계관을 갖자’고 주장하는 김시덕 박사는 자신의 책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한-미-중 삼국지만 생각하지 말고 일본과 러시아라는 중요 플레이어가 대기 중임을 잊지 말라는 당부다. 

▲춘추시대의 초기에 첫 패권을 거머쥔 정나라 왕 장공을 모델로 한 책 표지. 정 장공은 3국 연합국의 공격으로 신음하는 대 나라에 “내가 너희 나라를 구해주마”며 무혈입성 한 뒤 바로 대 나라 궁정을 점령하는 간계로 정 나라만 믿은 대 나라를 병합해버린다.

우선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그는 ‘(구한말 시대에) 조선과 청의 이해관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러시아를 적대한다는 점에서는 청과 일본이 이익을 함께했고, 러시아에서 독립을 희망을 보았다는 점에서 조선은 러시아와 이익을 함께했다.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 맞서 언제나 견해를 함께 해왔다는 주장은 한반도의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왜곡하는 것이다.(‘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313쪽)
중국과 한국을 동일시하려는 전통적인 오류에, 일본이나 미국에 대한 증오가 결합된 것 같은 느낌마저 받는다.(‘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368쪽)

‘중국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이해관계가 거의 일치해온 같은 편이었고,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국을 항상 집어삼키려 했으며, 지금은 미국의 등에 업혀 한반도 침탈을 또 꾀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 한국인이 많다. 그러나 구한말 상황에서 조선을 가장 괴롭힌 나라가 바로 청나라였다는 사실, 그래서 당대의 개혁정치인 대원군을 청나라가 무단으로 잡아 청나라로 데려가 감금했다는 사실 등은 쉽사리 잊힌다는 주장이다.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태도도 이중적이다. 사석에서는 “그래도 일제시대가 좋았다” “일본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공석에서는 ‘항일 민족주의자’로 돌변한다. 특히 정치인에서 이런 현상이 심각하다. 조금이라도 친일 성향을 보였다가는 정치적으로 매장 당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김시덕은 또한 러시아의 역할을 거의 완전히 무시하는 한국인의 태도도 질타한다.  

러시아가 유라시아 동해안에 등장한 17세기 중기를 경계로 유라시아 동부의 국제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조선을 온전히 차지하려던 일본과, 조선을 독립국가로 남겨 유라시아 동해안에서 자국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려고 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일본의 식민정책과 맞서 싸우며 극동 아시아의 이웃인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 유일한 나라였다.(‘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245, 300, 306쪽) 

한국인들 사이에서 흔히 회자되는 경구로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마라. 일본 일어나니, 조선 조심하라’는 게 있다. 여기서 미국을 믿지 말라고 경고하는 이유는 조선-한국 사람들이 오랫동안 미국을 절대적으로 믿어왔기 때문이다. 한반도 사람들은 “미국은 한반도 땅을 차지할 욕심이 없는 나라”라고 절대적으로 믿어왔고, 또 그럴만한 이유도 존재했지만, 조선-한국이 믿는 미국에 한반도 사람들이 발등을 찍힌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러일전쟁 직후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한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그랬고, 최근 태평양 서쪽의 방어 권한을 일본에 주기 위해 일본에 집단자위권을 주고, 한국을 미-일 동맹의 하부 세력으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는 미국이 그렇다. 

20세기 초반에 태평양의 지배권을 사이좋게 나눠 가졌던 미국과 일본이, 100년이 지난 21세기 초반에 다시 태평양을 나눠 가지려는 2차 합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열국지에는 대 나라처럼 강대국 사이에 끼인 소국이 잘못된 절대적 신뢰로 멸망한 사례가 나오는가 하면, 반대로 두 강대국 사이에서 절묘한 외교로 번영과 평화를 누린 정 나라 사례도 나온다. 춘추시대 초기의 강국이었지만, 곧바로 약소국 지위로 떨어진 정 나라는 북쪽의 진(晉) 나라와 남쪽의 초(楚) 나라 사이에 끼어 있었다. 이런 상황을 당대의 명재상 자산은 종진화초(從晉和楚: 진 나라를 따르면서 초 나라와 친한) 외교로 요령있게 헤쳐 나갔다. 

명재상 자산이 벌써 2500년 전 했던 
‘종A화B'를 21세기 한국은 왜 못하지? 

신동준 박사는 저서 ‘열국지 교양강의’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자산은 지금의 미국에 해당하는 진 나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종진화초 전략을 구사했다. 초 나라의 자부심을 만족시켜 주면서 동시에 민간외교를 적극 활용해 진 나라를 만족시키는 절묘한 책략이었다.(325쪽) 

▲한때 강국이었으나 약소국으로 전락한 기원전 5세기 무렵의 정(Zheng) 나라. 위쪽의 진(Jin)과 남쪽의 초(Chu) 사이에 끼어 있으나, 명재상 자산의 ‘종진화초(從晉和楚)’ 외교로 평화를 누렸다.(그래픽=위키피디아)


지금 한국은 두 초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정 나라 같은 처지다. 종미화중(從美和中)을 하면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국민적 논의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중국이 극력 반대하는 미군의 사드 배치를 받아들임으로써 균형과 평화를 모두 깨버리는 ‘머리 없는 외교’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외교를 바라보는 한국과 미국의 시각 차이를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렇게 정리했다.
미국에서 말하는 안보는 국가방어 개념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세계경영 개념입니다. 미국은 안보라고 이름은 붙이지만 ‘플러스 알파’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반면 우리는 정말 안보만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동유럽에 집중해야 한다면 동북아 쪽은 안정적으로 관리한다든지 하는 식의 조율이 미국이 말하는 안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보는 북한이 도발하면 원점을 때리겠다는 이야기만 합니다.(‘외교 토크’ 182쪽) 

미국은 열국지적 세계관을 갖고 중동에 집중이 필요하면 동북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한국과 일본에 비싼 무기를 팔아먹고 싶으면 동북아에 북핵 정보를 흘리고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외교-안보 장사를 하지만, ‘삼국지’만 읽고 있는 한국은, 미국의 이런 작전에 판판이 당하고 더욱더 비싼 무기를 사대면서 남북간의 대립만 더 격화시키는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똑같은 조선이라도 왕의 세계관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달라졌다는 평가도 있다. 신동준 박사는 이를 이렇게 정리했다.

조선은 군신 모두 사서삼경의 유가 경전에 매몰됐다가 패망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당한 후 그 배경 등을 철저히 분석해 통절히 반성하기는커녕 오직 ‘주역’에만 몰두하며 운명론에 기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유가 경전을 훤히 꿰고 있던 세종이 사신을 통해 ‘자치통감’ 완질를 구한 후 이를 탐독하며 주해서까지 펴낸 것과 대비됩니다.(68쪽) 

‘자치통감’ 읽은 세종대왕이 될 것인가, 
‘주역’만 붙잡고 있었던 선조가 될 것인가

중국의 고대~당나라를 서술한 역사서 ‘자치통감’을 탐독한 세종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외교와 무력을 적절히 활용해 북방 영토를 개척(육진 개척)했다. 반면 ‘일종의 허학(虛學)’인 성리학에 완전히 빠져들어간 시기의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수백 년이 지난 21세기에도 아직 한국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는 대전쟁을 겪고 나서도 그 의미를 모른 채 주역에만 의존했다니, ‘선한 자가 이긴다’고 믿는 희망적 세계관의 치명적인 독이 감지된다. 

‘자치통감’은 현대 중국을 만든 마오쩌둥이 열일곱 번 읽었고, 근세 일본의 사상적 주춧돌을 놓은 후쿠자와 유키치는 춘추시대의 역사서인 ‘춘추좌전’을 13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나라의 기틀을 놓은 사람들은, 열국지적 세계관에 익숙했다는 증거라고나 할까.

한국이, 비록 핵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국력 기준으로는 약소국에 불과한 북한의 위협에 완전히 눈이 멀어, 아니, 집권자들이 눈먼 척을 하면서, “삼국 중 이 나라와 친하면 저 나라와는 자연히 적이 돼야 하고” “이 나라는 완전히 믿어도 되고, 저 나라는 뭘 하든 절대로 믿을 수 없고” 따위의 삼국지적-선악적 세계관에 매몰돼 있다면, ‘가장 무능했던 조선 왕 중 하나’로 아직도 비아냥의 대상이 되곤 하는 선조와 같은 꼴을 면치 못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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