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는 65세 되던 해 1740년(영조 16년) 종5품(從五品)인 양천현령(陽川縣令) 직(職)을 제수 받아 12월 부임하였다. 사실 겸재는 나이 40이 되도록 어찌된 일인지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도 되지 못한 유학(幼學)의 상태였는데, 김조순의 제겸재화첩(題謙齋畵帖)에 따르면 “家貧親老 謨斗祿於先高祖忠獻公 忠獻勸其入圖畵署旣而筮仕 / (겸재는) 집안이 가난하고 어머니는 연로하시어 쌀 말의 녹이라도 받으려고 고조부인 충헌공(김창집)에게 부탁하니 고조부께서 겸재를 도화서에 넣어 벼슬길을 시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40 넘어 어렵게 관직에 진출했으니
겸재가 도화서 화원이었느냐 아니냐는 별개로 하고, 이렇게 어렵게 음서(蔭敍: 조상의 덕으로 관직에 나아가는 일)로 40살이 넘은 나이에 관직에 입문한 겸재에게 양천현령 직은 크나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이후 양천현령으로 있는 5년 동안 겸재는 큰 미술적 족적을 남긴다. 그 산물로 정리된 화첩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이라 한다.
많은 그림이 묶여 있는 경교명승첩은 뒤로 하고 우선 양천팔경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화첩은 1742~1743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충현 선생 소장본이라 하는데, 8점의 그림은 개화사(開化寺), 양화진(楊花津), 귀래정(歸來亭), 낙건정(樂健亭), 선유봉(屳遊峯), 소악루(小岳樓), 소요정(逍遙亭), 이수정(二水亭)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 속 8경은 기존의 양천 지역 8경과는 차이가 있다. 양천현 읍지(陽川縣邑誌)에 따르면 양천팔경(巴陵八景/파릉팔경: 양천관아 뒷산, 지금의 궁산을 예전에는 파산/巴山이라 했다. 곧 파릉은 양천의 다른 이름이다)은 다음과 같다.
악루청풍(岳樓淸風) ; 소악루의 맑은 바람
양강어화(楊江漁火) ; 양화진의 고기잡이 불
목멱조돈(木覓朝暾) ; 목멱산의 해돋이
계양낙조(桂陽落照) ; 계양산의 낙조
행주귀범(杏州歸帆) ; 행주로 돌아드는 돛단배
개화석봉(開花夕烽) ; 개화산의 저녁 봉화
한산모종(寒山暮鐘) ; 한산사(寒山寺)의 저녁 종소리
이수구면(二水鷗眠) ; 한강으로 흘러드는 안양천 어귀에 잠든 갈매기
이 읍지 속 팔경과 달라진 것은 정자(亭子)들인데 이 그림을 연구한 이들에 의하면 명문세가(名門勢家)의 별서(別墅)와 누정(樓亭)이라 한다.
이제 이런 기본 지식을 가지고 오늘의 답사 길을 떠나 보자. 다행히 강서둘레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사진 1). 겸재의 그림 속 개화사(開花寺)를 찾아가는 길이다. 겸재의 ‘개화사’는 양천팔경첩(김충현 소장)과 경교명승첩(간송 소장)에 각각 포함되어 있으니 두 점이 있는 셈이다.
9호선 종점 개화역에서 내려 길을 건너면 문화주택단지(내촌마을)을 만난다. 주택단지 끝에서 개화산 오르는 길로 접어들면 바로 미타사(彌陀寺)란 절을 만난다. 아마도 고려 어느 때인가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절인데 한국전쟁 당시 개화산 전투로 인해 절은 소실되었다 한다. 소실된 옛 절 자리에는 개화산 전투에서 산화(散華)한 장병들을 위한 위령비(慰靈碑)가 세워져 있다.
여말선초의 소박한 석불
그 곁 언덕에 현재의 미타사가 자리를 잡았고 절 입구에 있었다는 여말선초(麗末鮮初)쯤 세워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석불이 김포의 너른 벌판을 바라보며 서 있다(서울시 유형문화제 249호). 키도 훌쩍 커 3m가 넘는데 둥그스름한 얼굴에 머리에는 둥그런 모자 천개(天蓋)를 쓰고 두 손은 살포시 가슴에 얹은 모양(說法印)을 하고 있다. 조선 초기 경기, 충청 일원에 많이 세워진 스타일이라 한다. 예술성은 떨어지지만 민불과 같은 친근감이 있다.
옛 절이 자리했던 터에는 호국공원을 조성했다. 안내판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북한군이 한강을 넘자 육군 제1사단 11, 12, 13연대 1100여 명은 김포 지구 사수를 위해 이곳에 진을 치고 대병력의 북한군과 싸워 모두 산화했다 한다. 그렇게 산화한 장병들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1994년 이곳에 위령탑을 세웠으니 40여 년이 지난 뒤에 세운 위령탑이다.
6·25 직전, 당시 국방장관 신OO는 전쟁이 터지면 “아침은 서울서 먹고 점심은 평양서, 저녁 만찬은 신의주에서 한다”고 호언장담을 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데, 지도자가 제 길을 가지 못하면 그 결과는 어떤 것인지 이곳 개화산에 와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고이 잠드소서,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형님들…. 고개 숙여 명복을 빌어 드린다.
개화산으로 오르는 양천둘레길은 편안하다. 기껏해야 높이 130m 내외의 동네 뒷산이니 달리 힘들 일도 없다. 게다가 숲이 우거지고, 나무 데크 길, 흙길로 이루어진 탐방 길은 훌륭하다. 교통사정이나 길의 완성도나 역사지리 면에서 볼 때 한 나절 백패킹 코스로 추천하고 싶다. 특히 시니어나 가족 트레킹에 적합한 길이다. 산길 오르면서 돌아보니 김포의 들녘, 김포공항, 계양산이 친밀하게 다가온다. 양천현 옛 지도에도 개화산 주변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가운데 산봉우리를 開花山(개화산)이라 표시하고 김포 방향(서쪽) 봉우리에는 烽燧(봉수), 동쪽 방향 봉우리에는 祈雨處(기우처)라 적어 놓았다. 면(삼정면) 경계에서 김포까지 십리라 표시했고, 개화산 북쪽 강가에는 開花隅店幕(개화우점막)이라 적었으니 강 쪽 개회산 길모퉁이에는 가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둘레길을 도는 중간에는 마을 사람들이 개화산에 와서 제를 올렸다는 신선바위도 지나고, 아라뱃길 전망대도 지나는데 마을 보호수 안내판도 관심 두면 마을 보호수가 서 있는 자리에는 한국전쟁 때 소실된 노거수(老巨樹) 대신 그 2세 되는 나무가 서 있다. 서 있는 터전으로 보아 동제(洞祭)를 지내던 당산나무였을 것 같다.
이윽고 물봉선꽃이 붉게 핀 길을 지나 평탄지로 조성된 정상에 닿는다. 봉화정(烽火亭)이란 정자가 서 있다. 평탄지 한 구석에는 미니어처 같은 봉화대 2기(基)를 재현해 놓았다. 참 어설프기도 하다. 옛 지도대로라면 봉수대는 이곳이 아니라 서쪽 군부대가 자리 잡은 봉우리에 있었을 것이다. 이곳 개화산 봉수(開花山 烽燧)는 조선 5라인 봉수 중에서 제5 라인으로 여수(당시는 순천) 돌산도(突山島)에서 출발하여 서해안 바닷가를 이어와 강화, 김포 냉정산(冷井山)을 거쳐 이곳 개화산 봉수에 이르고, 이어서 목멱산(남산) 제5 봉수대로 이어지는 길이었으니 아마도 이순신 장군 시절 전라좌수영의 봉화도 이 라인을 통해 조정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봉수라인에 대해서는 무악산의 안현석봉(鞍峴夕峰) 그림에서 이미 설명했으나 다시 한 번 5개의 봉수 라인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인용하여 소개드린다.
봉화(烽火)가 5곳이 있으니, 제일(第一)은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江原道)로부터 온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제이(第二)는 경상도로부터 온 광주(廣州) 천천산(穿川山) 봉화에 응하고, 제삼(第三)은 평안도-황해도로부터 육로(陸路)로 온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사(第四)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海路)로 온 무악 서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오(第五)는 전라도와 충청도 바닷길로 해서 양천(陽川) 개화산(開花山) 봉화에 이르고, 아차산(峨嵯山) 봉화는 함길도, 강원도로부터 와서 풍양(豐壤) 대이산(大伊山) 봉화에 이른 것이다. 무악(毋岳)은 모화관 서쪽에 있다. 위에 봉화가 두 곳이 있으니, 동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육로로 온 고양(高陽) 소달산(所達山) 봉화에 응하고, 서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로 온 영서역(迎曙驛) 서산(西山) 봉화에 응한다.
(有烽火五處, 第一所準咸吉、江原道來楊州峩嵯山烽火。 第二所準慶尙道來廣州穿川山烽火。 第三所準平安、黃海道陸路來毋嶽東峯火〔烽火〕。 第四所, 準平安、黃海道海路來毋嶽西峯烽火。 第五所, 準全羅、忠淸道海路來陽川開花烽火。峩嵯山烽火, 準咸吉、江原道來豐壤大伊山烽火。 毋嶽、 在慕華館之西, 上有烽火二處。 東峯準平安、黃海道陸路來高陽所達山烽火, 西峯準平安、黃海道海路來迎曙驛西山烽).
‘남자의 날’에 산 올라 술 마시니
개화산은 어떤 산일까. 양천군 읍지에 산천(山川) 조에 따르면 개화산은 ”남으로 증미산에서 일어나 북으로 와 주룡산이 되었다. 일명 개화산이다(南自甑山起祖北行爲駐龍山 一名開花山)”라고 했다. 그러니까 개화산의 본래 이름은 주룡산이었다. 주룡산에 대해 설명하는 글들도 여러 곳에 눈에 띄는데 그 내용은 이런 것들이다.
신라 때 이 산에 주룡(駐龍) 선생이라는 도인이 숨어 살며 수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매해 9월 9일이 되면 동지들 두세 명과 함께 이 산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곤 했다. 그는 이 술 마시는 일을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불렀다 한다. 9월 9일 중양절에는 주룡산에서 술 마시기라는 의미라는데 이 주룡 선생 덕에 이 산 이름이 주룡산이 되었다 한다. 사실 중양절(重陽節)은 남자를 의미하는 양(陽)의 제일 큰 수 9가 두 번 겹친 날이라 남자의 날인데 이날은 남자들 기상을 높이려 산에 오르고 이때 술을 가지고 가니 산에 올라 술 마시는 풍습이 유행한다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소개하고 있다. 주룡 선생이 올랐다던 주룡산은 후에 이름이 바뀌어 개화산(開花山, 開火山)이 되었다. 안현석봉을 지날 때 다시 한 번 소개했던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는 개화산에 관련한 시를 읊었는데, 개화산 아래에 화락동(花落洞)이 있으니 꽃 피는 산 아래 꽃 지는 동네란 대비(對比)를 시로 읊은 것이다.
개화산 밑에 화락동이 있네(開花山下有花落洞)
개화(開花) 화락(花落) 누가 이 이름 붙였나 開花花落孰名玆
갑자기 지고 갑자기 피니 이치가 궁금하네 倐落忽開理可疑
사람들은 피고 짐을 분명히 하려 하나 世人强欲分開落
피는 때가 바로 지는 때란 사실 알지 못함이지 不識開時是落時
상당한 내공의 시로 보인다.
이제 하산 길을 따라 약사사(藥師寺)로 내려간다.
읍지 사찰(寺刹) 조에는 주룡산의 절들이 소개되어 있다.
삼정면 주룡산 아래 작은 절이 있는데 속명은 개화사다. 관문(官門) 서쪽 10리에 법당이 있다. 현 서 삼리에는 옛적에 한산사가 있었다. 지금은 없다.(三井面駐龍山下 有一小刹俗名開花寺 自官門西距十里只存法堂 縣西三里古有寒山寺今無).
여기에서 우리는 양천현에 개화사와 한산사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한산사(寒山寺)는 이미 파릉팔경(양산팔경)에서 만났던 이름이다. 양천관아에서 서쪽으로 3리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개화사는 약수사, 약수암, 약사암, 약사사 등으로 이름이 바뀌다가 오늘날 약사사로 굳어졌다.
공사로 바뀐 요사채 모습까지 그대로
겸재는 양천현령 시절 이곳 개화사에 와서 주룡산에 묻혀 있는 개화사를 그렸다. 두 번을 그렸는데 경교명승첩에 철해진 간송본 개화사는 1740년 무렵 그렸다 하고, 양천팔경첩에 있는 김충현 본 개화사는 1742년 쯤 그렸다 한다. 두 그림 모두 구도와 바라다보는 시각(視角, angle)이 동일한데, 다소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그린 간송본에는 우측 산기슭에 초가 두 채가 보인다. 뒤에 그린 김충현 본에 초가는 보이지 않고 법당 좌측에 조그만 새 건물이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마당의 3층 석탑은 두 그림에 다 있는데 그 우측 요사채(寮舍)에는 다소 차이가 보인다. 간송본에는 ㄴ자 요사채임에 비해 2년 뒤에 그려졌다는 김충현 소장 본에는 ㄷ자로 바뀐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두 그림을 비교해 볼 때 1740년에서 1742년 사이에는 개화사에 불사(佛事)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송 최완수 선생에 의하면 이 무렵 개화사는 공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이후 개화사에 관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장밀헌 송인명(藏密軒 宋寅明, 1689∼1746년)이 영조 13년(1737년)에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이 절을 크게 중수한 사실을 그의 고손자인 송백옥(宋伯玉, 1837∼1887년), 송숙옥(宋叔玉, 1841∼1923년) 형제의 ‘중수기’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송인명은 24세(1713)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30세(1719)에 문과에 급제하는데 과거시험 공부를 이 개화사에서 했다고 한다. 송인명은 영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아 탕평책 담당 재상이 돼 세도를 얻게 되자 젊은 시절 고생하며 공부하던 가난한 절 개화사를 잊지 않고 크게 시주하여 법당을 중수하고 불향답(佛享畓·불공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논)을 마련해 준다.
이로부터 개화사는 송인명 집안의 원찰(願刹)이 되어 대대로 이들의 시주와 보호를 받게 됐다.
송인명과 개화사에 관해서는 사천 이병연이 시를 지었다.
春來莫上杏洲舟 봄이 와도 행주 뱃놀이는 하지 마시게
客到何須小嶽樓 손님 오시면 하필 소악루인가
書冊三餘完課處 책 서너 권 읽어 낼 곳
開花寺裏費燈油 개화사 등잔 기름을 축내 보시게나
서로 8촌간인 송인명이 개화사에서 공부했음을 상기하여 쓴 시라 한다.
그림 속 삼층석탑이 그대로
약사사 경내로 들어가면 겸재가 그렸던 삼층석탑은 절 마당에 그대로 서 있다.
고려적 석탑이라는데 서울시 유형문화재 39호로 등재되어 있다. 법당은 겸재시대의 법당(대웅전)은 아니지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법당의 주불(主佛)은 두 손에 꽃을 든 석불이다. 유형문화재 40호인데 역시나 여말선초(麗末鮮初) 불상이다. 안내문에는 미륵불이라 한다. 머리에 둥근 천개(天蓋)를 쓰고 계시다. 겸재의 개화사에 이 석불은 그려져 있지 않다. 요사채 위치는 겸재 그림과 같은 위치인데 이제는 일자(一字)형 건물에 감로당이라고 편액되어 있다. 약효가 뛰어나 약수사, 약사사라는 사명을 짓게 했다던 시원힌 감로수 냉천(冷泉)은 이제 찾을 수 없어 아쉽다.
절을 돌아나와 겸재가 그 시절 개화사를 그렸을 길을 찾아내려 간다. 사진 1 양천둘레길 지도에 1번으로 표시해 놓은 한강 방향이다. 개화산의 개울이 모여 내려가는 ‘생태습지’ 방향 길이다.
사람들은 그다지 이 길을 다니지 않는다. 겸재 시절에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길에서 돌아보아도 개화사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절기에는 숲이 가려 보이지 않고 숲 없는 동절기에도 시각(視角)이 맞지 않아 보이지 않는다. 이 길 끝은 공항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고가(高架)를 이루며 하늘에 걸려 있어 더욱 시야가 막힌다. 하는 수 없이 고가 너머로 가도 시야를 확보할 수가 없다. 이제는 강으로 나가도 강변도로와 고가도로에 막혀 겸재가 바라보던 돛배 너머로 보이는 개화사는 없다.
개화사는 포기하고 개화산이라도 겸재의 앵글에서 바라보려면 공항철도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바라보면 된다. 그러면 이내 알게 되는 것이 겸재가 그린 고산준령의 개화산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발 130m 내외의 평평한 흙산이 어떻게 겸재의 그림처럼 보일 수 있겠나. 애당초 겸재의 그림 ‘개화사’ 속 개화산은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 와서 산수를 접할 사람을 위해 그린 그림이 아니라 벽에 걸어놓고 와유(臥遊)를 즐길 애호가를 위해 그린 그림일 것이다.
아름다운 메타세콰이어 길 만나
내려오는 길에 고가도로 밑 공간을 이용한 배드민턴장이 여럿 있다.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수도회’ 건물 앞을 지나 나오면 치현으로 살짝 오르는 치현갈림길 구간이 나온다. 욕심을 내면 치현과 반대 방향 길을 잠시 다녀와도 좋다. 중종 시절 사림파(士林派) 조광조를 추출한 이들이 심곤, 남정인데 이곳이 심곤과 후손들이 대대로 산 풍산(豊山) 심씨(沈氏) 세거지이다. 묘역도 여기에 있고, 사당도 있으며, 심곤이 심었다는 노거수(서울시 보호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도 있다.
치현(雉峴, 꿩고개)으로 오르면 잠시 후 한강(杏湖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치현정에 갈 수 있다. 곧 소개할 행호관어(杏湖觀漁)의 현장을 생생히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계속 둘레길 치현산 구간을 따라 가다가 서광APT 방향으로 내려간다. 작은 길을 건너 이제는 서남물재생센터가 자리잡은 서남환경공원길로 들어선다. 숲이 그늘을 이룬 아름다운 메타세콰이어 길이다. 약 1km 남짓 걸어 길 끝에 이르면 마곡신도시 단지가 보인다. 이제는 귀가길, 9호선과 공항철도가 지나는 마곡나루역으로 향한다. <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