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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42) 선유봉] 선유봉이 선유도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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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55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19.10.28 09:22:56

(CNB저널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지하철 2호선과 9호선이 만나는 한강 서쪽의 역 이름이 당산(堂山)이다. 9호선은 여기에서 김포공항 쪽으로 달리는데 다음 역은 이름도 아름다운 선유도(仙遊島)역이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무언가 관심을 끄는 이름들이다. 오늘은 지하철 2호선, 9호선 당산역에서 내린다. 눈을 씻고 보아도 산(山)은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당산이라면 당(堂)집이 있는 산일 터인데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수십 년 이 지역에서 살아온 당산동 터줏대감 친구 아무개에게 묻는다. 답은 얻지 못한다. 옛날 왜놈들이 보급기지로 쓰던 지역이라서 다 갈아엎었을 텐데 뭐가 있겠냐는 것이다. 게다가 요즈음에는 아파트 짓느라 또 밀었을 텐데 남은 게 있겠냐고 한다. 이럴 때는 해당 구청 홈페이지부터 찾아볼 일이다. 다행히 그곳에는 당산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당산”동은 당산 1·2동 2개 동의 행정동을 보유한 법정동으로서, 옛날에 이곳에 해당화 나무가 많아 늦은 봄에 많이 피었다 하여 당산동(棠山洞)이라 하기도 하며, 또 하나는 당산동 110에 우뚝 솟은 산이 있어 이를 단산(單山)이라 부르고 이곳에 부군당이 있어 당제(堂祭)를 지냈던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합니다.

당산을 형성한 세군데 옛 자연 마을
△웃당산 : 수령 500여 년 은행나무가 있는 당산동 110번지 언덕 일대
△원당산 : 당산동 4·5·6가 일대로 옛날 당(堂)집이 있는 마을
△벌당산 : 옛날 벌판이 있던 곳으로 안당산이라고도 하는 마을”

 

지도 1. 오늘의 답사길 지도. 숫자 표시는 1 당산나무, 2 부군당, 3 선유봉이 있던 자리, 4 선유교, 5 양화진, 6 안양천.

500년 은행나무가 있다는 당산동 110번지 언덕을 찾아 나선다. 당산역 4번 출구, 또는 8번 출구를 나서 강변 쪽에 있는 래미안 1차 아파트 남쪽 끝으로 간다(지도 1). 과연 작은 언덕에 공원이 형성되어 있고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그렇게는 안 되어 보이는데 580년 된 보호수라고 기록되어 있다. 설명문에는 조선초 임금님이 쉬어가신 것을 기념해서 식수(植樹)했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사람들이 이 나무 밑에 피신하여 물난리를 면했다고 한다. 당산의 당목(堂木)인 셈이다. 당목이 있는 언덕 아래로 내려오면 래미안 아파트 건너편 주택 사이에 참으로 을씨년스레 앉아 있는 당집을 만난다. 부군당이라고 적혀 있다. 예전에는 신성시했을 곳이었을 텐데 우리 시대의 당집이라니…. 그 고달픈 신세가 역력히 느껴진다.

 

당산동의 당집 ‘부군당’.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조선시대만 해도 한강가는 한양에서 쓰는 대부분의 물산이 지나가는 통로였으니 경강상인(京江商人)을 중심으로 서강, 삼개(마포), 용산강, 한강, 송파, 광진 모두가 번성하였다. 강가 백성들은 홍수도 잦고, 물로 인한 사고도 많았으니 물과 가까이 하면서도 경외(敬畏)의 마음으로 받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들을 모시는 신당을 다른 지역보다 많이 짓고 모셨다. 이럴 때면 형편 좋은 경강상인들의 후원도 쏠쏠했을 것이다. 그런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용문동에는 남이장군 당집이 있고, 서빙고동에는 부군당, 창전동 공민왕 사당, 보광동 부군당, 밤섬 부군당, 신길동 방아굿이 부군당, 이곳 당산동 부군당 등등.

남근을 모신 손각시 사당

부군당은 민간뿐 아니라 조선시대 관아에서도 아전이나 아랫것들 중심으로 많이들 모셨다고 한다. 남아 있는 기록들의 부군당이란 글자를 보면 이름은 ‘부군당’이지만 한자가 뜻하는 의미들은 다르다. 흔히 당집이라고 부르지만 당(堂), 당산(堂山), 부강당(富降堂), 부군당(附君堂), 부군당(府君堂), 부근당(付根堂), 부근당(扶芹堂), 부락제당(部落祭堂) 등 여러 형태가 있다. 필자에게 흥미로운 부군당은 부근당(付根堂)이다. 글자대로 풀어 보면 남근을 모신다는 말이다. 당집에는 남근(男根)을 매달아 놓고 모시는데 신(神)은 처녀 신이다. 흔히 각씨(閣氏)라는 이름에 노랑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있다. 그녀 이름은 손각씨(孫閣氏, 또는 송각씨)다.

일례로 삼척 해산당의 남근은 경이로운 느낌을 주는 산물이다. 당산동 부군당(府君堂)에 남근은 없다. 음력 10월 초하루에 행하는 당굿을 관람한 이들의 자료를 보면 이곳 부군당(府君堂) 안에는 아홉 신이 그림으로 모셔져 있다 한다. 대동할아버지, 대감님, 장군님, 부군할아버지, 산신님, 칠성님, 삼불제석님, 대신할머니, 각씨님이다.

 

당산 은행나무.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한편, 이곳 부군당 배경 설화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져 전해지고 있다. “당산동 부근에 선유봉(仙遊峰)이란 곳이 있었다. 지금은 양화대교가 놓여 허물어졌지만, 예전에는 한강가의 경치가 좋던 바위산이었다. 이곳 선유봉(仙遊峰) 처녀나 강화도(江華島) 처녀와는 예부터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그곳의 처녀들이 새별산이란 신(神), 일명 손각시 귀신을 믿기 때문이었다. 새별산신은 노랑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손씨(孫氏) 집에 규중처녀가 있었는데 출가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원귀가 되어 원한을 풀러 다니니 그 원혼을 모셔 놓고 달래는 가정이 많게 되었다. 그런 가정에서는 젊은 처녀가 있으면 출가시키기에 앞서 무녀를 초청하여 여탐(豫探, 혼사굿) 굿을 하여 손각시 귀의 원(怨)을 풀어주고 출가시켰다. 손각시 옷을 만들 때는 비단필(비단을 둘둘 만 단)의 머리 부분을 끊어 처녀(형상)을 만들고 신상(神箱, 신과 관련된 물건을 넣어두는 상자) 속에 넣는다. 집안에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손각시 신상(神象)에 먼저 바친 후에 먹게 된다.” (서울민속대관, 당산동 부군당 자료에서)

이런 설화를 보면 당산동 부군당에 모셔져 있는 각씨는 아마도 손각씨일 것이다. 세상에 무서운 귀신은 처녀귀신과 총각귀신이었다. 그 대표주자가 손각씨와 몽달귀신이다. 과년한 딸을 둔 부모는 항상 손각씨에게 밉보일까 걱정해야 했다. 특히 섬이나 물가 지방 사람들은 사고가 많은 곳이다 보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선유봉 처녀와 강화 처녀도 손각씨가 무서웠을 것이다.

겸재 그림에 남은 선유봉 모습

이제 선유봉(仙遊峰)으로 길을 잡는다. 선유봉은 이름으로만 남았다. 다행히 겸재 정선은 1740년대의 선유봉 모습을 두 점의 그림에 남겨 놓았다. 지난 회에 소개한 양화환도(楊花喚渡)와 이번 회에 살펴볼 선유봉(屳遊峰, 그림 1)이다.

 

겸재 작 양화환도. 

사진 1의 진로(進路)처럼 래미안 아파트에서 당산역 방향으로 오다보면 한강공원으로 나가는 굴다리가 있다. 이 굴다리 밖이 한강변이다. 당산역으로 돌아와 강변 방향으로 향하는 나무 데크 길을 통과해도 한강변으로 나갈 수 있다. 여기에서 좌향좌, 북쪽 방향으로!

양화철교 지나 양화대교를 만난다. 층계를 통하거나 비스듬히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양화대교 북단으로 오른다. 합정, 신촌 방향으로 잠시 나아가면 좌측에 긴 고구마처럼 보이는 선유도에 닿는다. 양화대교는 이 섬의 남단에 걸쳐서 건설되어 있다. 사람들은 양화대교를 승용차로, 버스로 많이도 건너다녔지만 양화대교가 선유도란 섬에 걸쳐져 세워졌다는 사실도, 더구나 다리 중간에 그런 섬이 있었다는 사실에도 무심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섬 선유도는 주욱 거기에 있었다.

 

그림 1. 겸재의 ‘선유봉’.

조선 시대의 지도를 보면 선유도(仙遊島)란 이름 대신 선유봉(仙遊峰), 선유산(仙遊山)이라는 이름으로 양천현에 속한 육지로 그려져 있다. 일례로 지도 2는 고산자의 동여도인데 여기에도 여의도(汝矣島)나 율도(栗島: 밤섬)는 한강과 샛강 사이 섬으로 확실히 그려진 반면 선유도는 선유산이란 이름으로 육지로 그려져 있다.

그러면 선유도는 조선 시대에 육지였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대부분의 자료에는 선유봉이지만 몇몇 자료에는 선유도(仙遊島)란 이름이 보인다. 겸재의 그림 선유봉에선 섬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이 그림은 지금의 선유도 전체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그 끝자락에 있던 선유봉 주변만 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인 것이 겸재(1676~1759)보다 조금 먼저 태어나 살다 간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한포재(閑圃齋) 이건명(李健命 1663~1722)의 글이 남아 있어 겸재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글과 겸재의 그림을 비교해 가면서 읽어 보면 마치 그림을 해설해 놓은 것 같다. 한포재집에 실려 있는 삼유정기(三有亭記)를 읽는다.
 

지도 2. 고산자 동여도의 선유봉 일대.

한강이 노량(鷺梁)에서 나뉘어 둘이 되었다가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는데, 바위 봉우리가 그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으니 이름이 선유(仙遊)이다. 황조(皇朝) 만력(萬曆) 연간에 중국 사신 이종성(李宗誠)이 북쪽 벼랑에 ‘지주(砥柱)’라는 두 글자를 썼는데, 아마 황하(黃河)의 지주를 닮은 데다가 이 산의 돌이 모두 숫돌로 쓸 수 있어서인 듯한데, 황하의 기둥도 모두 숫돌로 쓸 수 있어서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글자의 획이 백 년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았고, 지주의 남쪽에는 어가(漁家) 수십 가구가 벼랑을 깎아내서 살고 있다.

내 선인(先人)의 옛 정자가 그 가운데에 자리 잡았으니 산의 중턱에 해당한다. 정자 앞에 작은 물줄기가 있는데 동쪽으로부터 흘러와 굽이돌아서 서쪽으로 흘러 철진(鐵津)에 모였다가, 또 서북쪽으로 흘러 강으로 들어간다. 큰 들판이 아득하게 수십 리 펼쳐 있고 관악산(冠嶽山)과 소래산(蘇來山) 등 여러 산들이 머리 숙여 인사하듯 열 지어 있어서 올라가 둘러보면 마음과 눈이 매우 상쾌하다.

나는 지난 가을에 많은 사람들의 비방에 시달려 몇 개월 동안 나가서 옛 정자에서 지냈다. 정자는 기둥이 모두 여섯 개인데 남은 땅이 없기에 정자의 동쪽 빈터를 이웃 사람에게 사들였다가, 이번 가을에 사헌부 벼슬을 사직하고 다시 돌아와 다섯 개의 기둥을 새로 지었다. 아, 당구(堂構)의 오랜 뜻과 강호(江湖)에서 지내려는 만년의 계획을 지금 다 이루었구나.

정자를 다 짓고 나서 이름을 ‘삼유(三有)’라고 지었더니 간혹 의미를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사람이 정자를 지을 때에는 혹은 산에 혹은 물가에 혹은 들판에 지으니, 그 가운데 하나를 갖더라도 이름으로 삼을 만한데, 지금 내 정자는 이 세 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 정자는 선인께서 지었고 이 땅은 할아버지 문정공(文貞公 이경여/李敬輿)께서 터를 잡은 곳인데 지금 나에게 전해져 3대에 걸쳐 소유하였으니, 또 ‘삼유’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산은 비록 작지만 중류에 우뚝 서 있어 꿋꿋하게 뽑히지 않는 기세가 있다. 한강(大江)의 북쪽 물줄기는 비록 등지고 있어 보이지 않지만 남쪽 물줄기가 구부러져 들어오는 모습은 몇 리 떨어진 곳에서도 아득하게 보인다. 앞쪽 물굽이에서는 씻을 수도 있고 수영을 할 수도 있다. 들판은 비록 높고 소금기가 있지만 지세가 넓게 뻗어 있어 청색과 황색이 뒤섞여 수놓아진 비단을 펼친 듯하니, 또 심고 거두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아름다움을 우리 3대의 소유로 삼아 처소에서 휘파람 불며 읊조리니, 어찌 세상 근심 잊고 내 삶을 보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후략, 기존 번역 전재함)


漢水自鷺梁分而爲二。至楊花渡。復合爲一。而石峰峙其中。名曰仙遊。皇朝萬曆。天使李宗誠題砥柱二字於北崖。盖倣於黃河之砥柱。而山之石皆可以礪。未知河之柱。亦皆以砥而名歟。今其字畫。經百歲不滅。砥柱之南。漁戶數十。鑿崖而居。余先人舊亭處其中。當山之半。前有小沱。東入爲匯。西會于鐵津。又西北入于江。大野微茫幾數十里。冠嶽蘇來諸山羅列拱揖。登眺足以快心目也。余於前秋。困于多口。數月出棲于舊亭。亭凡六楹。無餘地。乃買亭東隙地于隣人。今秋辭憲職復來。新營五楹。噫。余堂搆之宿志。江湖之晩計。今可以並諧矣。亭旣成。名之以三有。或有問其義者。余曰人之有亭。或於山或於水或於野。有其一。足以爲名。今吾亭。於斯三者兼有之矣。况斯亭也。先人之所築。斯地也先王考文貞公之所卜。今傳于余。爲三世有。則亦可謂之三有也。山雖小。屹立乎中流。凝然有不拔之勢。大江北流。雖背而不見。其南流之屈曲而來者。迎數里而謁焉。前之匯。可濯可泳。野雖斥墳。地勢曠迤。靑黃錯布如繡。又可以觀稼穡也。以此三者之美。爲吾三世之有。寢處嘯詠。豈不足以忘世慮而送吾生也(후략)

샛강 덕에 때론 섬이 됐을 선유봉

이 글을 보면, 1. 선유봉 북면에 1596년(만력 연간)에 온 중국 사신 이종성(李宗誠)이 쓴 지주(砥柱)란 글씨가 100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다고 했다. 지주는 중국 황하(黃河) 삼문협(三門峽) 동북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우뚝 하여 절개나 지조를 상징한다고 한다. 다른 문집들에선 이 글씨 지주가 중국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라고도 했다. 주지번은 학문이 깊고 인품이 훌륭하여 조선 임금이나 신료들로부터 두고두고 존경의 대상이 된 인물이다. 주지번은 언제부터인가 흠모의 대상이 되어 누가 쓴 글씨인지 모르는 그럴듯한 글씨가 있으면 주지번의 글씨라 했고, 묏자리도 그럴 듯하면 주지번이 잡아 주었다는 등 전설이 되어 갔다. 지주(砥柱)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선유봉에 쓴 지주(砥柱)란 글씨는 유명하여 정조도 장릉(章陵)에 행행(幸行)할 때 어가(御駕)가 지나갔던 10개 고을의 유생들에게 제목을 내려 시로 응하게 하고 상을 내렸는데 양천현 선비들에게 내려진 시의 제목은, ‘사방 들녘의 누런 벼이삭을 보기 위하여 삼십 리 양천에 잠시 군사를 머물게 하다(爲看四野黃雲色 一舍陽川小駐兵)’로 했고, 아울러 부제를 ‘선유봉 지주로 시를 쓰게 했다(仙遊峯題砥柱)’고 기록됐다. 아쉽게도 이 지주는 선유봉과 함께 지금은 사라졌다.

 

한강의 양쪽 양화나루를 잇는 지점.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그림 1의 2 표시 부분은 이건명이 선조로부터 물려받고 본인이 증축한 삼유정(三有亭)으로 보인다. 지주 남쪽에 어민들 집이 있고 그 가운데 삼유정이 있다 했으니 글과 그림이 일치한다. 3은 어민들 집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4는 물줄기인데 지금의 양평동 쪽과 선유봉 사이, 즉 정자 앞쪽으로 흘러드는 물줄기이다. 이 물줄기가 그림 속 배 몇 척 있는 선유봉 서쪽 철진(鐵津)에 모였다가 서북쪽 한강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 선유도로 넘어가는 구름다리 선유교가 있는 위치쯤 될 것이다. 이 설명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선유봉의 대강(大江: 큰강, 한강) 쪽 나루(그림의 5)가 양화진이며, 뒤쪽 지금의 샛강쪽 작은 나루는 철진(鐵津, 그림의 4)이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자에서는 한강(대강)이 보이지 않는다 했으니 그림 속 한옥 건물이 이건명의 삼유정임은 추론 가능하다. 그곳은 영등포 방향 큰들을 면하고 있어 관악, 소래산이 마주 보였을 것이다. 여기서 또한 추측 가능한 것이 정자 앞쪽, 즉 대강(한강, 양화진 쪽) 반대쪽 철진으로 들어온 작은 물줄기(지금의 샛강 쪽)는 물이 불면 선유봉 지역과 육지를 갈랐을 것이며, 물이 빠지면 건너다닐 수 있는 정도였기에 지도에서는 구지 선유도(仙遊島) 대신 선유봉으로 육지의 일부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던 선유봉은 뒤에 언급했듯이 근세에 와서 파괴되고 콘크리트로 축대를 쌓아 샛강을 만드니 고립된 섬 선유도가 되었다.

옛 선유봉은 아름다웠기에 중국 사신은 물론, 조선의 시인묵객의 뱃놀이 장소로도 유명하였다. 선유봉과 잠두봉, 망원정 뱃놀이를 언급한 글들은 한둘이 아니다. 일례로 인조 때 온 중국 사신은 선유봉 뱃놀이 후 흡족하여 감격해 하기도 했다.

다주례(茶酒禮)를 행하여 한 잔 든 후에 배에 올라 중류로 가 좌상에서 행주(行酒)하게 하여 10여 순배에 이르렀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유봉(仙遊峯)에 이르러 해가 이미 황혼이 되어 촛불을 밝히고 배를 돌렸는데, 아주 흡족하게 즐기었다. 파할 무렵에 여러 사람을 앞에 늘어서도록 하여 한꺼번에 행주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러분께서 현왕의 성의을 받들어 여러 차례 조용한 기회를 만들어 주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현왕은 밝고 거룩하시니, 여러분은 잘 섬기십시오. 상봉한 지 오래지 않아 헤어질 날이 이미 박두하니, 슬픈 마음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재삼 정녕하게 말하면서 아주 친근한 뜻을 보였다.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行茶酒禮。 一酌後, 乘船中流, 令座上行酒, 至十餘巡, 從容談話。 到仙遊峯, 則日已向昏, 秉燭回船, 極其歡洽。 臨罷, 令諸人列立于前, 一時行酒, 且曰: “諸公奉承賢王誠意, 屢致從容, 多謝多謝。 賢王明聖, 願諸公善事。 相逢未久, 別日已迫, 無任悵然。” 再三丁寧, 極致懃懇之意, 夜深而歸)“。

시인묵객의 글은 여럿 전해지는데 비교적 근세 1800년대에 쓴 홍직필의 매산집(梅山集)에서 시 한 편 읽고 가련다.

舟下仙遊峯 배가 선유봉을 내려 가네
仙遊峯下水如天 선유봉 아래 물 하늘처럼 넓어
不辨端倪在那邊 끝간 곳 어디인지 모르겠구나
直向涬洲江上去 곧바로 행주를 향하여 강물 위 떠가는데
櫓聲驚起白鷗眠 노 젓는 소리 갈매기를 놀래 잠을 깨우누나

선유도 공원.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겸재 그림만큼 아름다운 선유도공원


그런데 선유봉이 꼭 아름다움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때에는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기도 했다. 임진란에 목숨을 바친 김천일(金千鎰) 선생의 건재집(健齋集)에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평양, 송도, 한양 수복을 위해 나서자 모든 지리 정보나 적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선유도에 보루를 쌓고 수군을 노량진에 출병시키는가 하면 무악재를 공격하기도 해 제독 이여송을 도왔다(天將李提督如松剋復兩京。進次松都。將合攻京城賊。公悉具道里地勢及賊情以報。乃築壘於仙遊峯)’고 기록돼 있다.

이렇듯 조선인의 곁에 있던 선유봉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발생하자 일제가 제방을 쌓기 위해 암석을 캐냈고 1929년에는 여의도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도로를 만들려고 또 파냈으며 1936년에는 누대를 걸쳐 살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한강 치수 사업을 위한 채석장으로 전환했다고 한다. 광복 후에도 미군이 인천 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골재를 채굴하는 등 채석장으로 활용되기는 변함이 없었다. 이렇게 수난을 당하던 선유도를 완전히 잃은 것은 1960년대 한강 개발 사업 때문이라 한다. 1962년 제2한강교, 지금의 양화대교를 선유도 위에 짓게 되는데, 다리를 세우기 위해 길을 내고 골재를 채취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선유봉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한다. 1968년에는 한강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콘크리트 제방으로 둘러싸이면서, 다리의 교각을 받쳐주는 기초의 일부가 되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

 

잘 가꿔진 선유도공원.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선유정.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그렇게 사라지는 듯했던 선유도는 1978년 선유정수장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지 않아 2000년에 폐쇄되고 2002년 정수 시설을 재활용한 선유도 한강공원이 태어났다.

다시 태어난 선유도 공원은 아름답다. 필자는 적어도 일 년에 한두 번은 가 보는데 색 바랜 콘크리트와 오래 묵은 탱크들, 낡은 공간들, 퇴색해 가는 색 등 모든 것이 시간 속에 녹아 어우러진다. 사진 좀 찍을 줄 알면 공원은 전체가 스튜디오다. 모든 분께 들려 보시기를 권한다. 겸재의 선유봉은 안타깝게도 그림으로만 남아 있지만 공원으로 우리 곁에 돌아온 선유도는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가을을 맞고 있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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