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왕에 행호관어도를 보면서 행주산성 앞 웅어(葦魚) 이야기를 꺼냈으니 웅어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가려 한다. 동국세시기에서 언급했듯이 웅어 잡이가 가장 활발했던 곳은 행주산성(幸州山城) 앞 강물이었다. 유역이 넓고, 유속이 느려 행호(幸湖)라 불렀던 곳이다. 겸재가 양천 현령 시절 이곳 행호에서 고기잡이 하는 모습을 보며(觀漁) 그린 그림이 경교명승첩에 남아 있는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임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 그림에는 5살 연상의 친지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년)이 제시(題詩)를 붙였다.
春晩河豚羹(춘만하돈갱) 늦봄에는 복어국
夏初葦魚膾(하초위어회) 초여름에는 웅어회
桃花作漲來(도화작창래) 복사꽃 물 가득 떠내려 오는데
網逸杏湖外(망일행호외) 그물질 바삐 하세, 행호 멀리
14척의 날렵한 웅어 배 그림을 보고 사천은 멋진 제화시(題畵詩)로 격(格)을 맞추었다. 한시(漢詩)를 공부하신 분들은 아시지만, 거성 태 운(去聲 泰 韻)으로 운을 잡아 회(膾)와 외(外)로 리듬을 끌어 올렸다. 위 시의 해석을 어렵게 하는 행호외(杏湖外)에서의 외(外)는 의미보다 운을 맞추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행호의 명물이었던 황복
그런데 사천(槎川)의 시를 보면 첫 구절에 복어(河豚)를 꼽고 있다. 과연 행호에서 복어가 잡혔던 것일까? 그랬다. 복어는 웅어처럼 강으로 올라와 알을 낳고 바다로 돌아가 성장하는 회귀성 물고기이다. 웅어와 더불어 한강과 임진강으로 올라와 알을 낳는데 봄철 행주의 별미는 황복(하돈: 河豚)이었다. 웅어 철이 되기 전인 음력 2월경부터 황복이 행주에서 많이 잡혔다. 황복은 4~5월 행주강가 바닥에 모래와 자갈이 깔린 곳에서 알을 낳으며, 알에서 깨어난 새끼 복어는 여름 한철 강에서 크다가 가을쯤 서남해 바다로 내려가서 성장한다. 황복은 배를 갈라 알과 간을 꺼내버린 후 물에 씻어 하루 이틀 빨래 줄에 걸어 말린 후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요즘처럼 회로는 먹지 않았다. 특히 산란기 직전 음력 2-3월에 잡히는 놈이 가장 맛이 좋았다. 그러나 알과 피에는 독성이 심해 알은 모아서 강가에 비치된 옹기 항아리나 드럼통에 두었는데 이것이 변하면서 황갈색 기름으로 변했다. 이 기름을 한때 약장사들이 무좀이나 치질 특효약으로 팔러 다녔다고 하니 참 약도 귀한 세상이었다. 그러던 황복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남획으로 멸종 상태가 된 데다가 행주 하류에 수중보를 설치해 강 위로 오르지 못하니 행주 복어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이제는 임진강 수계에서나 가끔 만나는 황금 어종이 되었다.
그런데 행호에서의 웅어 스토리는 행호관어도로 끝이 난 것일까? 아니다 또 다른 겸재의 웅어 그림이 남아 있다. 겸재는 아마도 이 웅어를 엮어 척재(惕齋) 김보택(金普澤)에게 보낸 듯하다. 웅어 산지인 양천현의 현령으로 있으니 그리 했을 것이다. 겸재의 그림 화제(畵題)를 보면 주변 인간관계에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어렵게 입신(立身)한 그로서는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노론 주요 멤버로 중요한 포스트에 있는 데다가 글과 그림에 조예도 깊었던 척재였다. 웅어를 받은 척재는 시(詩)로 화답했던 것 같다. 아쉽게도 그 시(詩)는 알 길이 없고 겸재가 그린 그의 모습만 그림으로 남아 있다. 이른바 惕齋題詩(척재제시: 척재가 시를 짓다)라는 그림(56쪽)이다.
파초의 이국풍에 심취했던 조선 문인들
파초(芭蕉)가 훌쩍 큰 사랑채에 앉아 아랫것이 엮어 가져온 웅어를 보며 먹을 갈아 붓을 잡고 있다. 무어라 시 한 수 적어 보냈을까? 궁금해진다.
척재의 사랑채 앞에 훌쩍 자라 있는 파초에서 보듯 조선의 선비들 사이에선 남방의 이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파초 사랑이 지극했다 한다. 그들은 호박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보다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더 사랑했던 듯하다.
심지어는 임금인 정조도 파초 그림을 남겼고, 겸재, 단원, 현재(玄齋)의 그림에도 파초가 남아 있다. 시문(詩文)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중 당시 파초 가격을 알 수 있는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년)의 시 ‘파초를 심다(種芭蕉)’ 한 편을 읽고 가자.
斗粟買諸隣 좁쌀 한 말로 이웃에서 사 와,
敎兒窓外種. 아이 시켜 창밖에 심었네.
還愁夜雨聲, 밤비 소리 오히려 수심 겨운데
驚我歸田夢. 초야로 돌아갈 꿈 나를 놀라게 하네.
임억령은 좁쌀 한 말 주고 사온 파초를 키워 그 잎에 떨어지는 밤비 소리를 듣는다. 어찌 보면 그들만의 고상한 취미였다.
또 하나, 이 그림 제목인 척재제시 오른쪽에 붉은 네모 도장이 찍혀 있다. 잘 보면 천금물전(千金勿傳)이다. 겸재의 다른 그림에도 이 네모 도장이 찍혀 있는 것들이 있다.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천금을 주어도 타인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 내지 경고 글이다. 그런데 이 당부는 과연 지켜졌을까? 아쉽게도 그렇지를 못했다. 몇 년 전 정조의 편지 수백 통이 발견되어 매스컴의 조명을 받았던 정조의 정치 파트너 만포 심환지(沈煥之, 1730~1802년)의 손으로 넘어갔으니 말이다. 나 떠난 뒤 뒷일을 “이리이리 해라”고 당부하는 일, 참으로 허망한 일임을 많이도 본다.
낙건정과 귀래정을 찾아
이제 양천팔경첩에 실려 있는 겸재의 또 다른 그림 낙건정(樂健亭)과 귀래정(歸來亭)을 찾아 행주산성 마을과 산성 안을 찾아가 보련다. 이 주변으로 다니는 버스 노선은 두어 개 있지만 답사의 편리함을 위해 3호선 화정역과 경의선 능곡역을 지나는 011 마을버스에 오른다. 답사는 행주산성 마을 초입 나루터에서 시작이다. 이제는 나루가 없어지고 행주대교가 강을 넘어 다니지만 행주대교나 신행주대교가 생기기 이전에는 한강 하류 큰 나루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밀물과 썰물이 크게 교차하는 한강 수계에서 아주 작은 배가 아니면 썰물 때에는 물이 빠져 큰 배는 마포나 용산강까지 도달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무심히 보면 모르지만 겸재의 행호관어도를 보더라도 강물 가운데에 길게 모래톱이 드러나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래도 행호는 넓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배들이 썰물 때에는 행주나루에 정박하여 밀물을 기다렸던 큰 포구였다.
답사를 위해 행주산성 답사길 사진과 겸재의 행호관어도 시점에서 본 사진을 올려 번호를 달았다. 출발은 번호 1 아래쪽 나루터 정류장에서 시작한다. 번호 1은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낙건정 터 위치로 이 마을 옛사람들은 용정(龍汀)이라 부르던 곳이다. 2는 장밀헌 등 또 다른 정자가 있던 봉정(鳳汀), 3은 귀래정이 있던 학정(鶴汀) 근처를 표시해 보았다. 4는 행주(幸州) 기씨(奇氏) 유허지(遺墟址), 5는 권율 장군 사당 충장사, 6 지역은 덕양산으로 행주대첩 기념비가 자리잡고 있다. 돌아가는 길 7에는 신라의 토성이 자리한다. 행주산성 경내를 돌아 나와 산줄기가 흐르는 길을 이어 걸으면 8 오래된 행주성당을 만난다.
이제 버스정류장 출발이다. 평화누리 길은 한적한 강가로 이어지지만 장어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차로(車路) 옆길로 잠시 걷자. 우측에는 주차장, 좌측으로는 음식점 뒤로 높이 자리한 언덕을 만난다. 지금은 언덕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은 없다. 100여m 나아가 좌측 행주교회 가는 골목길로 접어들면 흰 선박 모양 카페가 자리 잡은 길로 그 언덕에 오를 수 있다. 요즈음은 공원 공사로 인해 출입금지 중. 이곳이 겸재의 그림 속에 자리 잡은 낙건정(樂健亭) 옛터(舊址)다. 그림 속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언덕 아래 음식점 앞쪽으로는 주차장이 자리 잡았고, 주차장 한 모퉁이에는 너무나도 을씨년스럽게 행주나루터 표석이 서 있다. 낙건정임을 알리는 표지나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인들 겸재의 그림이 아니었다면 낙건정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곳 행주 지역은 겸재의 그림 행호관어, 낙건정, 귀래정에서 볼 수 있듯이 이른바 사회 지배층들의 별장지 중 하나였는데 아마도 제일 많은 별장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지역이 넓고 산수(山水)가 어우러진 승경(勝景)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숲, 강, 배 어우러진 명당
겸재의 그림 낙건정을 보면 최고의 별서(別墅) 터답게 숲이 우거진 언덕 위 평평한 땅에는 서너 채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답사 지도 1 위치). 이 그림 속 어느 건물인가가 겸재가 썼다는 당액(堂額)이 붙어 있는 건물일 것이다. 우측으로는 이 별서를 오르내리는 오솔길 같은 층계가 이어지고 층계 아래 강가 쪽으로는 사립문도 없이 싸리 울타리 오두막이 자리 잡았다. 이제는 어느 장어집이거나 카페가 되었을 것이다. 또 낙건정 앞쪽으로는 우뚝한 바위가 길게 강을 향하여 뻗어 나갔다. 예부터 행주나루를 대표하는 이정표 ‘돌방구지’다. 한양에서 내려올 때, 반대로 조강에서 올라올 때 저 멀리 우뚝한 돌방구지를 보면 행주나루가 가까워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한다. 그림에서 보듯이 배가 한두 척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돌방구지 주변 행주나루에는 언제나 많은 배가 정박하거나 왕래했다고 한다. 저 삼남에서 오는 조운선이거나 고깃배거나, 장삿배거나 이 행주나루에서 밀물이 오기를 기다려 떠났으니 그림보다는 훨씬 더 활기찼을 것이다.
그런데 낙건정이 누구의 별서였기에 겸재는 이 그림을 그렸을까?
간송의 최완수 선생에 의하면 낙건정은 육조판서(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를 모두 역임한 호(號)를 낙건정으로 쓰는 김동필(金東弼, 1678∼1737년)의 별서라 한다. 김동필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의 문인(門人)으로 사천 이병연의 이종사촌 아우였다 하니 겸재와도 잘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당색은 노론이었는데 소론과 사이가 안 좋은 때가 있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경종 1년 돌방구지 위 용정(龍汀)에 낙건정을 지었다 한다. 김동필의 동문 친구인 전의후인(全義後人) 서당 이덕수(西堂 李德壽, 1673∼1744년) 선생은 친구 김동필의 낙건정에 대해 1726년 낙건정기(樂健亭記)를 써 낙건정을 짓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뛰어난 경치를 취한 게 아니라 송나라 학자 구양수(六一居士 歐陽修, 1007∼1072년)의 ‘은거를 생각하는 시’에서 따왔다 했다.
‘몸이 건강해야 비로소 즐거워지니, 쇠약하고 병들어 모름지기 부축받기를 기다리지 말라(及身强健始爲樂 莫待衰病須扶携)’. 구양수가 이 시를 지은 때가 44세였는데 마침 김동필이 낙건정을 지을 때도 44세였다는 것이다.
겸재가 낙건정을 그릴 때 이미 김동필은 세상을 뜬 지 3년이 지난 뒤였지만 김동필의 둘째 아들 상고당 김광수(尙古堂 金光遂, ·1699∼1770년)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서화골동 수집과 감식의 1인자로 겸재 그림을 지극히 애호하던 사람이었다.
월산대군이 낚시 드리웠을 합수지점
이곳 낙건정은 상당히 유명했던 것 같다. 원교 이광사도 ‘낙건팔경’이라는 시를 남겼다 하고, 이이엄(而已广) 장혼도 ‘낙건정 빙연에 또 오다(樂健亭氷淵又至)’는 칠언율시(七言律詩)를 남겼으며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도 ‘낙건정(樂健亭)’이라는 시를 남겼다. 낙건정(樂健亭)은 아들 상고당 김광수 등 후손들이 물려받아 사용되다가 6.25 때 폭격으로 파손되었다 한다. 파손된 낙건정 자재는 행주성당에서 구입하여 행주공소 및 신양학교 자리로 옮겨와 고쳐 지어 거주용으로 사용하다가 그나마도 2003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한다. 이제 낙건정의 흔적은 겸재의 그림으로만 남았다.
또 하나 겸재의 그림은 귀래정(歸來亭)이다. 겸재의 그림을 보면 행주서원 동쪽 지금의 행주역사공원 위 덕양산이 시작되는 지점에 그려져 있다(답사 지도 3 위치). 혹 어느 자료에는 창릉천변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도 있는데 덕양산 동쪽 창릉천변은 급경사 지역으로 건물이 들어설 공간이 없는 곳이다. 기껏해야 낚시 정도 할 공간뿐으로 가끔 낚시하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월산대군도 행주에 낚시하러 자주 들렀다 하는데 창릉천과 대강(大江, 한강)의 합수 지점이라 고기가 그 중 잘 잡혔을 터이니 이곳에서도 낚시를 했으리라.
그러나 언제나 마음이 쓸쓸했던 대군에게는 고기도 잘 물지 않았나 보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대군의 시조가 실려 있다. 어떤 이들은 추강(秋江)이 바로 가을 행호(幸湖)라 한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낙건정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동쪽으로 이동, 행주서원을 지나왔다. 임진난에 충성을 다한 권율 대원수를 비롯하여 행주대첩에 목숨을 다해 싸운 이들을 제향(祭享)하는 서원이다. 이 서원을 지나 강가로 빠져 나오면 잘 정비해 놓은 행주역사공원을 만난다. 덕양산이 시작되는 지점 강가에는 수자원공사 산하기관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 뒤쪽 덕양산이 시작되는 학정(鶴汀) 앞쪽에 겸재는 귀래정을 그렸다. 상당한 규모의 건물군이다. 이것이 모두 귀래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귀래정은 광해군 5년(1613)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다 모친상을 핑계 삼아 병조정랑의 벼슬을 버리고 행주로 물러 나와 10년간 은거해 살았다는 죽소 김광욱(竹所 金光煜 1580∼1656년)이 세운 정자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인 1742년에는 김광욱의 증손자인 동포 김시민(東圃 金時敏, 1681∼1747년)이 주인이 되어 있었다 한다. 김시민은 겸재와 인왕산 밑 동네에서 함께 지낸 사이였다. 게다가 김시민은 사천 이병연과 함께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년)의 외현손이라 서로 8촌 형제에 해당하는 사이였다. 최완수 선생에 의하면 낙건정(樂健亭) 주인 김동필은 사천의 이종사촌 아우이면서 김시민과도 8촌 형제간이었고, 장밀헌 송인명(藏密軒 宋寅明, 1689∼1746년)도 이정구의 외현손이라 한다. 그러면 송인명, 이병연, 김동필, 김시민과 서로 8촌 형제에 해당했다. 비록 장밀헌은 겸재의 그림에 전해지는 것이 없지만 행주 나지막한 산줄기에 쪼로록 자리한 세 별서, 동쪽으로부터 귀래정(歸來亭), 장밀헌(藏密軒), 낙건정(樂健亭)은 8촌 형제들의 별서인 셈이다. 그러니 사천이 드나들면 겸재도 때로는 드나들었을 것이다. 정자 이름은 동진(東晋)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자, 돌아가자 / 歸去來兮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 田園將蕪胡不歸
이미 스스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네 / 旣自以心爲形役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 奚惆悵而獨悲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 悟已往之不諫
(후략)
행주 강변의 쟁쟁한 정자들
이곳 행주에는 앞에 언급했듯이 겸재의 두 그림뿐 아니라 장밀헌을 비롯한 많은 정자가 있었다 한다. 행호관어도에 보이는 많은 정자, 별서가 그 상황을 짐작케 한다. 간단히 살펴 보면,
매학당(梅鶴堂)은 김광욱의 손자 목사 김성최(金盛最)가 세운 것으로 귀래정의 서쪽 경계에 있었다고 하며,
관란정(觀瀾亭)은 의령 현감 김시좌(金時佐)가 세운 것으로 귀래정 동쪽 기슭에 있었다고 한다.
유사정(流沙亭)은 외성동(外城洞) 봉정(鳳汀)에 있던 것을 인제현감 김성대(金盛大)가 세운 것으로 이태백 시의 “우리 조상의 流沙”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범허정(泛虛亭)은 조선 숙종 4년(1678) 이조판서 송광연(宋光淵)이 세운 것으로 외성동(外城洞) 유사정 북쪽에 있었다. 범허정이란 이름은 “學海泛虛舟”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연체당(聯棣堂)은 감역(監役) 김현행(金顯行)이 건립한 것으로 외성동(外城洞) 봉정(鳳汀) 유사정 옆에 있었다. ‘聯棣’란 주공(周公)의 소아(小雅)에서 나오는 말로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귀락당(歸樂堂)은 판서 이만성이 세운 것으로 외성동(外城洞) 범허정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애연당(愛蓮堂)은 처사 민후철(閔後哲)이 세운 것으로 내성동(內城洞)에 있었다.
관가정(觀稼亭)은 현령 최로(崔櫓)가 창건한 것으로 내성동(內城洞)에 있었다. 정자가 넓은 들판에 임하여 농사짓는 모습을 구경하기 좋아 관가정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육회정, 숙여루 등 수많은 정자와 별서들이 한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