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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48) 궁산 탑산 ③] 그림 속 위치와 실제 위치가 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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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66-667호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2.03 09:29:48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기념관이 자리한 궁산을 떠나 탑산(塔山)으로 간다. 오늘 만나러 가는 그림은 양천팔경첩 속의 소요정(逍遙亭)과 이수정(二水亭), 그리고 경교명승첩 속 공암층탑(孔岩層塔)이다. 한강을 끼고 강 건너 고양(高陽)계를 바라보는 양천현 강변 풍정(風情)들이다. 지금은 강서구가 된 지역이다. 겸재 시절에는 강을 끼고 산과 들에 붙은 오솔길로 가거나 아니면 양천현을 지나가는 대로(강화대로)길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겸재의 그림을 보면 겸재는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세 그림을 그렸다.

이들 그림의 배경 속에 그려진 풍경들은 어찌 되었을까? 우선 공암층탑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찾아가 보자. 궁산으로부터 가려면 궁산둘레길을 내려와 가양나들목 건널목을 건너자. 옛 강이었을 지점은 모두 육지가 되어 공원 길이 되었다. 80년대에 올림픽대로를 만들면서 강은 잘리고 메어져 육지가 되었고 겸재가 배를 타고 그림을 그렸을 위치는 모두 공원 길이 되었다. 공원 길은 쾌적하다. 올림픽대로의 강변 쪽은 산책 길과 자전거 길이 되었고, 올림픽대로와 아파트 단지 사이는 공원 길이 되었는데 모두 걷기에 그만인 길들이다. 역사유적순례길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다. 이 공원 길로 1km 남짓 상류 방향으로 나아가면 구암 허준근린공원을 만난다. 의성 허준(許浚)의 연고지가 이곳인 까닭에 공원을 조성하고 허준의 이름을 살렸다.
 

강이 변한 공원 길.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위치 이전 따라 혼란 생긴 공암나루

양천현 읍지에 있는 옛 지도를 살펴보자(지도 1). 좌측에 이미 지나온 소악루 터가 표시되어 있고, 우측 강 상류 쪽에 산이 하나 보이면서 공암(孔岩)이라 적혀 있다. 그 오른쪽에는 강물 속에 바위 세 개가 일렬로 쪼르르 서 있다. 더 오른쪽 상류로 가면 영벽정(暎碧亭)과 이수정(二水亭) 두 정자가 기록되어 있다. 한참 우측에는 우리가 잘 아는 선유봉(仙遊峰)도 만난다. 또 하나의 옛 지도를 보자(지도 2). 붉은 글씨로 쓴 1에는 소요산(逍遙山)이라 쓰여 있고, 2는 공암(孔岩), 3은 지금은 학천(鶴川), 4는 이제는 없어져 평지가 된 후 아파트가 세워진 낙산(洛山?), 5는 염창산(鹽倉山), 6은 안양천(安養川), 7은 선유봉(仙遊峯), 8은 양화진이다. 오늘 만나는 겸재 작 세 그림의 배경은 소요산(공암), 강물 속 나란한 세 바위와 동쪽에 떨어져 있는 염창산이다.

 

지도 1. 양천현 고지도. 
지도 2. 양천현 고지도 2.

다시 요즈음의 지도를 보자(지도 3). 구암 허준공원 지역이다. 여기에서 1은 현재 지명으로 탑산(塔山)이다. 2는 공암(孔岩) 또는 허가(許哥)바위이며 3은 허준박물관, 4는 광주바위, 5는 학천이다. 겸재의 그림 공암층탑(孔岩層塔)과 소요정(逍遙亭)은 바로 이곳의 1740년대 모습을 한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그린 그림이다. 그림 제목 공암층탑에서 공암(孔岩)은 굴이 뚫려 있는 바위를 뜻한다. 겸재의 그림에서 보듯 이 산에는 탑이 있어 탑산이라 했다. 양천현 옛 지도에는 소요산(逍遙山),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진산(津山)이라 하면서 현 동쪽 10리에 있는데 일명 공암(孔岩)이라고 소개되어 있다(在縣東十里 一名 孔岩). 진산(津山)이라 한 까닭은 바로 이곳에 나룻터 공암진(孔岩津)이 강 건너 행주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양천현 읍지에 따르면 이곳 나루 강바닥에 흙이 쌓여 왕래가 순조롭지 못해 궁산 북쪽으로 나루를 옮겼다고 한다. 공암진 위치에 혼동이 생기는 이유는 이렇게 나루를 이전한 까닭에 생긴 것이리라.
 

지도 3. 공암층탑 배경 장소의 현재 지도
정선 작 ‘공암층탑’.

금을 내던진 형제

이곳 공암나루에는 아름다운 형제애의 전설이 전해진다. 공암 앞 안내판에 만화 형식을 빌려 이 이야기를 그려 놓았다. 원전은 동국여지승람인데 그 이야기를 살펴보자.

공암진(孔巖津) 북포(北浦)라 하기도 한다. 현 북편 1리 지점에 있다. 바위가 물 복판에 섰고 구멍이 있으므로, 이것이 이름으로 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에 평민(平民)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워서 형에게 하나 주었다. 나루터에 와서 형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을 물속에 던지므로 형이 괴이하게 여겨서 물으니 대답하기를, “제가 평소에 형님을 독실하게 우애하였는데, 금을 나누어 가진 다음에는,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갑자기 생깁니다.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니, 강에 던져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다. 형이 말하기를, “네 말이 참으로 옳다” 하고, 형도 또한 금을 물에 던졌다. 그때 같은 배에 탔던 자는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뿐이었던 까닭에, 그 형제의 성씨와 거주하는 마을을 묻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高麗 恭愍王時 有民兄弟偕行 弟得黃金二錠 以其一 與兄 至孔巖津 同舟而濟 弟忽投金於水 兄怪而問之 答曰 吾平日 愛兄篤 今而分金 忽生忌兄之心 此乃不祥之物 不若投諸江而忘之 兄曰 汝之言 誠是矣 亦投金於水).

 

공암나루 표지석.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그러나 성주이씨 세보에 따르면, 이 형제는 고려 말 충의로운 학자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이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조년의 시조 한 수 읽고 가자.

梨花(이화)에 月白(월백)하고 銀漢(은한)이 三更(삼경)인 제
一枝春心(일지춘심)을 子規(자규)ㅣ야 아랴마는
多情(다정)도 病(병)인 냥하여 잠못드러 하노라

높이라야 기껏 32m밖에 되지 않는 작고도 작은 산이 이렇게 그림과 글로 남아 있는 까닭은 아마도 이런 스토리와 역사적 인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탑산이 공암(孔岩)으로 불리는 까닭은 작은 자연 석굴이 있기 때문인데 겸재의 그림에는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으나 물가 가까이 그 석굴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 석굴은 온전히 남아 있다.
 

공암 석굴.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양천을 대표하는 성씨는 허씨였으니

양천읍지에 의하면, 이 석굴에서 양천 허(許)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암은 일명 허가바위다. 허선문은 고려 태조(918∼943)가 견훤을 정벌하러 갈 때 90여 세의 나이로 도강의 편의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군량미까지 제공했었다. 태조 왕건은 허선문을 공암촌주(村主)에 봉하고 그 자손이 이 땅을 대대로 물려받아 살게 했다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양천현읍지를 보면 양천을 대표하는 성씨는 허씨(許氏)이다. 그 허씨 중 우리에게 가장 인상적인 이가 바로 의성 허준(許浚 1546~ 1615)인데, 이곳에는 허준박물관과 허준공원이 자리잡았다.

 

허준 조형물.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박물관 전시 내용 중에는 산허거사라는 이가 쓴 ‘파릉산집(巴陵散集)’이 있다. 파릉이란 양천 지역의 또 다른 이름이다. 거기에는 “許浚在於孔庵下漏屋 是洞作著 浚卒爲庵(허준은 공암 아래 비 새는 집에 거주하면서 이 동굴에서 저술했는데 여기에서 돌아가셨다?)”란 글이 있다. 아마도 허준의 동의보감은 이곳 허가바위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또한 이 공암은 양천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일성록에는 정조 21년(1797년) 9월 12일 정조가 장릉(章陵)에 행행(行幸)했는데 어가가 지나는 열 고을 유생들에게 시를 짓게 해서 상을 내렸다. 이때 양천(陽川)에는 “사방 들녘의 누런 벼 이삭을 보기 위하여 삼십 리 양천에 잠시 군사를 머물게 하다(爲看四野黃雲色 一舍陽川小駐兵)”로 부(賦)의 제목을 삼게 하고, “선유봉지주라 제하다(仙遊峯題砥柱)”로 시의 제목을 삼았으며, “공암(孔巖)”으로 명(銘)의 제목을 삼았으니 작은 언덕 같은 산은 결코 작지 않게 대접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나…, 겸재도 낮은 언덕을 우뚝한 산으로 그려 놓았다.

 

투금탄의 유래를 보여주는 조형물.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여지승람의 투금탄 이야기 부분. 

이제 겸재 그림에서 물결이 찰랑이고 한가하게 낚시를 담갔던 그 물길은 길이 되었다. 올림픽도로가 강을 가르면서 지나간 결과다. 저 넘어 강물은 이억년, 이조년 형제의 금 투척 사건으로 이후 투금탄(投金灘: 금덩어리를 던진 여울)이란 이름을 얻어 후세까지 전해졌다. 1700년대, 1800년대를 살다간 하려 황덕길(下廬 黃德吉: 1750~1827)은 이곳 두호(斗湖)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궁산 북쪽에 북두칠성의 국자 자루/斗柄처럼 우뚝한 바위가 있어 이 지역을 일명 두호라 했다 한다) 그의 문집 하려집에는 이 지역을 대상으로 쓸 시 제목 20 장(章)을 두호교거잡제(斗湖郊居雜題)라는 제목으로 적어 놓았다. 파산(巴山), 두호(斗湖), 투금탄(投金灘) 등등이다.

 

공암바위를 알리는 표지석.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잠시 강가로 나아가 투금탄을 바라본다. 이제는 나루 대신 가양대교가 자리 잡았고 건너로는 난지도의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 우뚝하게 투금탄을 내려다보고 있다.

기왕 이 지역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짚고 가련다. 연전 경매에 옛 필사본 책 한 권이 나왔다. 제목이 바로 두호방언(斗湖放言)이었다. 얼른 보면 ‘두호(양천)의 거리낌 없는 말(放言)’처럼 읽혀지는데 실은 하려 황덕길이 쓴 실용적 글이었다. 하려(下廬)는 자신이 사는 곳 두호(斗湖)를 또 다른 호(號)로 삼아 글을 쓴 것이다. 내용은 양천 지역 7개 마을의 동규(洞規: 마을 규약)를 적은 것으로 이 땅의 향약, 서원 등 운영 규칙을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였던 것이다. 양천현읍지를 찾아보니 아마도 군내면 일곱 마을의 자치 운영 규칙인 듯하다. 겸재 그림 속 공암리, 지금 신도시가 된 마곡리, 향교동 등등 지역인 것 같다.

탑산의 현재 모습.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탑산의 탑은 도대체 어디로?

다시 겸재 그림 공암층탑으로 돌아가자. 탑산(공암산, 소요산, 진산)에는 석탑이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삼층탑, 오층탑이 아닌 높은 기단부 위의 탑신에는 옥개석이 한 개 얹혀 있다. 어찌 보면 건물 형태처럼 보인다. 불탑이 아닌 어느 스님의 사리탑이다. 이 사리탑으로 인해 지금도 이 작은 언덕을 탑산이라 부르고 있고 산 옆 초등학교 이름은 탑산초등학교이니 의미 있는 탑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탑은 언제부터인가 자취를 감추었다. 전하는 말로는 일제 때 우체국 소장이 옮겨 갔는데 그 후 행방을 알 수 없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양천현읍지 사찰(寺刹) 조(條)에는 이와는 다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진산(탑산)에는 진사(津寺)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사되었다. 그 유지에 10층쯤 되는 사리탑(舍利塔)이 있어 탑산리라 했는데 연전 홍우룡(洪祐龍) 후(候: 사또)가 관아 건물 중수 시에 마음에 두지 않고 가져다 사용했으니 정당(政堂)의 동서 담장이 되었다 한다.

(津山有津寺今廢 其遺地有舍利塔十許層 故亦稱塔山里 年前 洪侯祐龍 重修關解時 以石材不膽取 用之. 爲政堂東西牆云).


이 기록이 맞는다면 탑산의 탑은 사또 홍우룡이 관아 건물 담장용으로 반출해 간 것이다.

탑산 아래 석굴 앞에는 강서구가 세운 허가바위라는 표지석이 있고 그 앞쪽으로는 공암진 나루 표지석이 있다. 현재 탑산의 위 부분에는 허준의 이미지를 살려 각종 약재를 심은 약초 밭을 꾸며 놓았다. 아주 낮은 작은 언덕이라서 겸재 그림과 같은 위용은 없다. 겸재 그림에 일엽편주에 앉아 낚시를 드리웠던 그림 속 배 위치쯤 되는 곳은 이제 아스팔트 길로 바뀌어 있다. 그 길을 걸어 구암공원 방향으로 간다. 길 옆에는 사회적 기업 그라나다 커피(granada coffee)가 있다. 지체장애우들이 운영하는 카페다. 이렇게 몸이 불편한 친구들의 일자리를 위해 만든 가게다. 커피도 맛있고 가격도 합리적이니 이 길을 가시거든 들려 보시기를. 100여m 상류 방향으로 가면 탑산의 뒤편은 허준박물관, 그 옆으로는 구암공원이 잘 정비되어 있다.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조경석처럼 보이는 바위 셋이 자리하고 있다. 둘은 서 있고 하나는 납작하게 자리 잡았다. 연못 가운데에 무슨 바위들일까? 겸재 그림 공암층탑과 소요정에 보이는 바위들이다. 이른바 광주바위로 불리는 바위들이다. 겸재 그림 속에서는 한강수 탑산 옆에 물속에 솟아 있는 두 우뚝한 바위와 평평하게 자리한 바위 하나가 그려져 있는데 이렇게 초라하게 연못에 갇혀 있다니….
 

광주바위의 현재 모습.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연못에 볼품없이 갇힌 광주바위

80년대 올림픽대로가 뚫리면서 이곳 한강의 상당 부분이 육지화되고 하마터면 없어질 위기에 놓였던 이들 광주바위는 명(命)을 구해 연못이 된 곳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연못가에는 이 광주바위의 전설을 안내판과 만화로 살려 세워놓았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옛날 경기도 광주에서 큰 홍수가 났을 때 커다란 바위가 물에 떠내려 왔다고 한다. 비가 그친 후 광주의 명물인 바위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 광주현감은 바위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위가 양천고을까지 떠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광주현감은 바위를 제자리로 옮겨 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세금을 내라고 요구했다. 양천현감은 거절하지 못하고 바위에서 자라는 싸리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어 매년 세 자루씩 바치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한 생각이 들어 광주현감에게 바위를 도로 가져 가라고 하고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바위를 가져갈 수 없었던 광주현감은 더 이상 세금을 내라는 요구를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본래 순박하고 인정 넘치는 양천 고을 사람들의 착한 심성과 멋진 광주바위의 풍광을 잘 나타내는 전설이다.”

그런데 양천현 옛 지도를 보면 광주바위가 아니라 광제바위(廣濟岩)로 기록되어 있고 그 옆으로 학천(鶴川)이 흐르고 있다. 이제 학천은 그 물길을 확인하기 어렵다. 한편으로는 이 광주바위 이름이 제차바위이기도 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구려 때 이 지역 이름이 재차파의(齊次巴衣)였으니 이 지명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겸재의 작풍을 따라 그린 한 어린이의 그림에도 겸재의 ‘공간 이동’ 방식이 적용돼 있어 흥미롭다.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그런데 겸재의 그림을 보면 광주바위와 탑산의 위치가 이상하다. 마치 광주바위와 탑산이 삼형제처럼 일렬로 늘어선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이곳을 그린 공암층탑이나 소요정 두 그림의 바위와 산의 위치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마도 겸재는 그림의 완성도를 위해 탑산을 100m 정도 상류로 이동시켜 광주바위 곁에 그린 것이리라. 겸재의 그림은 실제 그 모습보다 그림의 완성도가 더 중요시되는 점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겸재는 멋진 그림을 위해 공간의 재배치도 서슴지 않았던 것 같다. 실체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겸재의 그림을 가지고 이 위치에 무엇이 있고, 저 위치에 무엇이 있고 하는 사진 속 모습 같은 개념으로 접근하면 자주 낭패를 보게 된다. 그는 아마도 와유자(臥遊者), 곧 그림의 배경이 되는 곳에 와서 직접 자연경관을 접할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채에 비스듬히 누워 그림을 감상할 이들을 위해 최대한 멋진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것 같다.

겸재기념관에 가면 옹벽에 타일로 모자이크한 어린이들의 겸재 그림 패러디 작품들이 있다. 이곳 광주바위를 그린 그림들도 있는데 한 어린이는 겸재의 그림에 빠져 광주바위와 탑산의 위치를 잘못 그리고 있다. 심지어 이 어린이는 탑산을 광주바위보다 더 상류 쪽에 그려놓았다. 겸재의 그림에서 비롯된 사실관계 왜곡인 셈이다.

이제 사천 이병연이 공암층탑에 부친 시화상간의 시(詩) 한 편 읽고 가자.

孔岩多古意  공암(孔岩)에 옛 사람들 뜻 많이 서렸는데
一塔了洪蒙  탑(塔)하나 아득하구나.
下有滄浪水  아래로는 창랑(滄浪) 수(水) 흐르고
漁歌暮影中  고기 잡는 이 노래, 저녁 빛 속에 있네

사천은 낚시 드리운 이에게 초점을 맞추어 서정적인 시를 썼다. 평성(平聲) 동(東)으로 운(韻)을 잡고 평측(平仄)도 평안하다. 시의 고수답게 가히 일품(逸品)이다. <다음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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