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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코로나19 같은데 왜 中-日 차별? ‘전염병의 윤리학’ 배웠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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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70호 최영태 편집국장⁄ 2020.03.02 09:24:53

(CNB저널 = 최영태 편집국장) “문재인 대통령은 왜 중국인 입국을 막지 않아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아갔지? 정말 이민을 가든지 해야지 원!”

중국인 입국만 막았다면 모든 사태가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 텐데…라는 탄식이었다. 맞는 말인가?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26일 국회 답변에서 정갑윤 미래통합당 의원의 “왜 중국인 입국 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느냐”는 추궁에 “가장 큰 원인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었다”라는 대답을 했다가 현재 사퇴 압력을 미래통합당으로부터 받고 있다.

박 장관의 발언을 저 문장 하나만 딱 떼어내 보면 화낼 만도 하지만, 박 장관의 이어진 발언까지도 들어봐야 한다. “하루에 2000명씩 들어오는 (중국발) 한국인을 어떻게 다 격리 수용할 수 있겠는가”라는 첨언이다.

공포에 휩싸이면 원시인 되는 인간

코로나 대란을 보면서 관찰되는 현상 중 하나는, 경악할 만한 전염병 사태를 맞아 지구인들이 너나없이 인종차별적 속내를 마구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중국인들이 야생동물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대는 바람에 동물에만 존재했던 바이러스가 사람 몸을 침투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는 데서 중국인의 식습관을 비난하는 것까지는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유럽에서 동양인만 보면 “바이러스야, 꺼져!”라며 야유하고, 한국 정치권에선 “중국‘인’ 입국을 차단하지 않은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라는 논의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 그렇다.

바이러스는 인종을 가리지 않는데도, 중국‘인’만을 선별 입국금지시켰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논의는, “매일 2000명이 넘게 들어오는 중국발 한국인은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 하느냐?”는 합리적 반문 앞에 이르면 말문이 막히게 마련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26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공포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그래서 동물적인 감각이다. 공포에 휩싸인 사람은 동물적-비이성적-원시적 행동양식에 따르기 쉽다. 코로나 사태에서 중국‘인’,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마구 터져 나오는 모습에서 이런 원시인적인 반응을 본다.

인종뿐 아니라 이웃나라에 대해서도 차별적-비이성적 대응이 터져나왔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한에서 처음 시작됐기에 중국인에 대한 혐오 감정이 터져 나온 건 당연하다 쳐도, 또 다른 이웃 일본에서도 코로나19가 창궐하고 있는데도(일본에서 입국한 12번째 확진자는 일본 내 동료가 “내가 확진됐으니 너도 검사를 받아보라”는 말을 듣고 확정 진단을 받음) “일본‘인’에 대한 입국제한을 왜 하지 않느냐?”는 정치권의 질타가 거의 없는 걸 보면, 확실히 일부 한국 정치인의 마음속에선 중국과 일본을 다르게 취급함을 알 수 있었다. 일부 댓글은 중국을 과거의 멸칭 ‘중공’으로 부르면서 비하하는 양태도 보였다.

‘더러운’ 중국인은 질병을 묻혀서 들어오니 100% 차단해야 하고, ‘깨끗한’ 일본인은 본의 아니게 바이러스를 묻혀 들어와도 어쩔 수 없다는 걸까?
 

김진태 미래통합당 의원(가운데), 이동욱 경기도의사회 회장(왼쪽), 박대출 미래통합당 의원이 23일 오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중국인 전면 입국금지 요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 김진태 의원실 

중-일이 망하면 한국이 좋다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이후 “너네 나라 죽어 내 나라 잘살자”는 논리가 진리인 것처럼 횡행하고 있다. 물론 이런 자국이기주의는 국제정치 무대에선 바탕에 깔린 정서이지만, 그래도 2차대전 이후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니 자유니 하는 대의명분이 내어걸리는 게 상례다. ‘너 죽고 나 잘살자’는 트럼프식 국제정치를 따라 배운 아베 일본 총리는 한국에 대해 느닷없는 수출규제를 해 우리를 희생시키려 들기도 했다.

일본 극우들이 잊지 못한다는 ‘메이지의 영광’이 조선의 희생 위에 이루어졌다는 것(나카츠카 아키라 저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 183쪽)이 역사적 사실이고 보면, ‘메이지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당치 않은 꿈을 꾸는 아베류(流)들의 첫 과제는 대한민국 희생시키기가 되겠지만, 달라진 환경에서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착각은 제 발등 찍기로 결말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경제에서도 이럴진대, 전염병에 이르면 이웃의 폭망은 곧 나의 폭망이 된다. 경제나 정치에서는 ‘너 죽으면 내가 잘산다’가 실현될 가능성이 일부라도 존재하지만, 전염병에서는 ‘이웃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가 진리다.

그렇기에 비단 전염병뿐 아니라 정치-경제에서도 “이웃이 잘돼야 내가 잘 된다”는 진리를 한국인들이 체득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열국지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중국 춘추시대의 어진 재상 안영(晏嬰)의 집을 왕이 크게 늘려줬지만, 안영은 곧 “집이 너무 커서 줄이고 있다”고 왕에게 보고한다. 안영의 집을 늘려주는 과정에서 이웃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때 나온 말이 ‘집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점친다’는 말이다(김영사 펴냄 ‘평설 열국지’ 9권 126쪽). 주거환경이란 이웃 사람들의 좋고 나쁨에 달렸지, 집의 크기에 달려 있지 않다는 말이다. 아무리 넓고 좋은 집이라도 이웃이 흉포하거나, 전염병으로 죽는다면 그 집은 좋은 집일 수 없다.

옆집이 잘되도록 기원하고, 잘되면 배 아파 하기보다는 힘들지만 함께 기뻐해주고, 어려움에 빠지면 도와주는 것이 내 행복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배웠으면, 즉 ‘전염병의 윤리학’을 깨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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