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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67) 한벽루] 으뜸경치 청풍은 물에 잠기고 겸재 그림만 남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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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89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12.15 10:07:53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그림을 따라 한강을 거슬러 오른 지도 긴 시간이 지났다. 행호관어의 현장 행주나루에서 출발하여 한강을 거슬러 올라 지난 회에는 황려호의 여주를 거쳤다. 당연히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겸재의 많은 그림이 그려지고 남았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그렇지를 못하다. 훌쩍 건너뛰어 겸재의 그림 따라 도착한 곳은 청풍(淸風)의 한벽루(寒碧樓)다. 뚱딴지같이 별안간 청풍 한벽루라니, 우리 땅에 청풍명월(淸風明月)도 아니고 청풍이란 땅이 있었던가? 그렇다. 청풍이라는 꿈 같은 고장이 있었고 지금도 조금 남은 자투리땅이 제천시 청풍면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85년 충주호가 세워지면서 2000년 가까이 자리 잡았던 고을은 온전히 물속으로 사라졌다. 이때 수몰된 제천 지역 상황만 해도 5개면 61개 리 3300여 가구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구려 때는 사열이현(沙熱伊縣), 신라 땅이 된 후에는 청풍이 되었다 한다. 청풍이라 한 이유를 알 수 있게 하는 설명은 ‘산천이 기이하고 빼어나서 남도의 으뜸이 된다(山川奇秀爲南道冠)’라는 설명이 따른다.
 

흔히 충주호라고 부르지만 ‘청풍호’라고 불러야 합당할 호수 물속에 옛 청풍부가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일제강점기 되면서 몰락한 ‘청풍부’

청풍은 각별한 지역이었다. 일찍이 고려 1317년(충숙왕 4)에 청풍현 출신 청공(淸恭)선사가 왕사(王師)가 되면서 청풍현은 군(郡)으로 승격하였고 조선 현종 때 왕후인 명성왕후(明聖王后: 숙종의 모친) 김씨의 관향(貫鄕)이 청풍이어서 부(府)로 승격하였다. 그러던 청풍은 일제 하에서 1914년 제천에 포함되어 일개 면으로 전락하였다. 그동안 모든 교통 흐름이 남한강 수계로 이루어지다가 제천 ~ 단양으로 이어지는 육로와 철도로 전환되면서 청풍은 오지로 남았다가 끝내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 중후기에는 아무나 지방관으로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서인의 영수 우암의 동문과 제자들 다수가 청풍 부사를 지냈고, 장동 김문(金門)은 김광찬부터 3대에 걸쳐 청풍부사로 부임했으니 청풍이란 땅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헤아릴 수 있다.

 

이번 호 답사 지역의 지도.

겸재의 녹운탄과 독백탄에서 언급한 바 있었던 삼연 김창흡의 단구일기(丹丘日記)는 이곳으로 이어진다. 1688년 3월 4일 덕포(미호나루)를 출발하여 녹운탄의 여가촌(呂家村)과 두물머리 독백탄을 지나 양근, 여주를 거쳐 가흥창, 목계나루를 거쳐 충주에 도착한다. 다음날 황강역에서 충주군수의 내방을 받고(至黃江驛前 入權持平家 忠州倅亦來會), 3월 10일에는 드디어 형님 김창협(金昌協)이 태수로 있는 청풍에 도착하여 객관 동쪽에 있는 한벽루에 오른다. 이 이후로 배에 피리 부는 사람을 태워 뱃놀이를 즐기며 시를 짓는다(初十日雨 夜登寒碧樓 使笛人乘船泛月 上下溯洄 得詩五言律).

우리에게 소중한 인문학적 자료를 제공한 단구일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백성의 삶과 지배층의 삶의 격차지감(隔差之感?)에 마음 아프다.

 

작가미상의 ‘한벽루’. 

한벽루는 청풍 관아에 세워진 누각(樓閣)이었다. 현재는 보물 제5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청풍면 읍리에 있었지만, 충주댐 공사 이후에 마을이 수몰되자 1983년에 수몰 지구에서 벗어난 청풍읍치 위 언덕에 옮겨 세웠다. 고려 1317년(충숙왕 4)에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면서 청풍현이 군(郡)으로 승격될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군(郡) 객사의 동쪽에 세웠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1397년(태조 6)에 청풍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중수하였으며, 이후 1634년(인조 12)에 권경(權璥)이 중창하였는데, 오늘날의 모습이 이때의 건축 양식이라 한다.
 

옮겨 지어진 한벽루.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시와 그림이 많이 남겨진 한벽루

한벽루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청풍 땅을 밟는 이라면 응당 한벽루에 올라 경치에 감탄하였고, 시인은 시를, 화인은 그림을 그렸다. 겸재의 한벽루, 이방운의 그림 금병산에 그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최북의 그림에 도담삼봉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혹시 최북도 한벽루를 그리지 않았을까 기대도 걸어 본다.

 

이방운 작 ‘금병산’. 

한벽루는 특이하게 누(樓) 옆으로 이어진 작은 건물(익랑: 翼廊)을 지었는데 이런 모습의 누정이 남원의 광한루와 밀양의 영남루에 남아 있다 한다. 또한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삼척 죽서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조선 시대의 5대 누각으로도 꼽힌다고 한다. 현재 한벽루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글씨로 된 ‘한벽루(寒碧樓)’ 현판이 정면 중앙에 걸려 있다. 한때 청풍부사 김수증(金壽增:1624~1701)이 쓴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편액과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쓴 ‘청풍한벽루(淸風寒碧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유실되었다 한다. 정자 안에는 2002년 진양하씨(晉陽河氏) 대종회에서 복원한 하륜의 「한벽루기」가 게시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판독하기 좋은 글씨로 남아 있으니 한 번 읽고 가자.

 

겸재 작 ‘한벽루’. 

내가 옛날에 여러 번 죽령 길을 지났는데, 청풍 군수(淸風郡守)가 매양 길옆에서 맞이하고 전송하였다. 고을의 형세를 물으니, 한벽루(寒碧樓)를 일컫고 또 주 문절공(朱文節公)이 네 구절의 시를 읊었다. 나는 듣고 즐거웠으나 바빴기 때문에 한 번 들어가서 올라가 구경할 여가가 없었다. 지금 정군 수홍(鄭君守弘)이 편지로 내게 청하기를, “이 고을의 한벽루가 한 방면에서 이름나 참으로 기이하니 구경할 만한데, 수십 년 동안 비에 젖고 바람에 깎여 거의 장차 못쓰게 될 지경이었다. 내가 고을에 이르러 다행히 나라가 한가한 때를 만나서 금년 가을에 공장을 불러 수리하여 들보, 도리, 기둥, 마루의 썩고 기울어진 것을 새 재목으로 바꾸지 않은 것이 없으니, 청컨대 그대는 다행히 기를 지어서 뒤에 오는 사람에게 보여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누정(樓亭)을 수리하는 것은 수령으로서 말단의 일일 뿐이다. 그러나 그 흉하고 폐하는 것이 실상 세도(世道)와 서로 관계된다. 세도가 오르고 내림이 있으매 민생이 즐겁고 불안함이 같지 않고 누정의 흥폐(興廢)가 이에 따르니, 한 누각의 흥하고 폐함으로써 한 고을의 즐겁고 불안함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즐겁고 불안함으로 세도의 오르내림을 알 수 있으니, 어찌 서로 관계됨이 심한 것이 아닌가. 지금 이 누각이 수십 년 꺾이고 썩은 나머지 정군이 정사하는 날에 이르러 중수하여 새롭게 하였으니, 세도가 수십 년 전과 다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군현(郡縣)에 아직 수리하지 않은 누정이 있으니, 또한 어찌 다만 세도의 탓이랴. 정군 같은 이는 세도에 순응하여 다스림을 하는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 내가 옛날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을 때에 정군은 바야흐로 지안성 군사(知安城郡事)로 있어서 이름이 치적(治績)의 가장 높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비로소 그 사람됨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써서 기(記)를 삼는다. 또 계산(溪山)의 승경(勝景)과 누각의 제도의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지 않으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청풍(淸風)의 칭호와 한벽(寒碧)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뼈가 서늘하게 한다. 훗날 혹 능히 적송자(赤松子)와 함께 놀 소원을 이루어 다시 죽령 길을 지나게 된다면, 마땅히 군을 위하여 한 번 들어가 올라서 주 문절(朱文節)의 시를 읊어 그 사람을 수백 년 위에 상상하여 보고, 또 군의 유애시(遺愛詩) 한 편을 짓고 가리라.

昔余屢過竹嶺路. 淸風郡守. 每於路旁. 相候而送之. 言郡形勢. 必稱寒碧之爲樓. 且誦朱文節公四句詩. 余聞而樂之. 乃緣悤悤. 未暇一入而登覽. 今鄭君守弘. 以書請余曰. 郡之寒碧樓. 名於一方. 儘奇絶可償. 數十年來. 雨漏風摧. 殆將廢矣. 余到郡. 幸値國家閑暇. 今年秋. 請工人修之. 樑棟軒楹. 朽者欹者. 靡不易之以新. 請子幸爲記. 以示後來. 余謂樓觀之修治. 守令之末務耳. 然其興廢. 實與世道相關. 世道有升降. 而民生之休戚不同. 樓觀之廢興隨之. 夫以一樓之廢興. 而一郡之休戚可知矣. 一郡之休戚. 而世道之升降可知矣. 豈非相關之甚者哉. 今此樓. 以數十年摧朽之餘. 至鄭君爲政之日而重新之. 可以觀世道之有異於數十年之前矣. 然今之郡縣. 尙有不修之樓觀. 則亦豈直世道哉. 若鄭君. 可謂順世道而爲治者矣. 余昔觀察忠淸道. 鄭君方知事安城. 名在最中. 余始識其爲人. 故書此以爲記. 且溪山之勝. 制度之美. 則非目接. 無以致詳矣. 淸風之號. 寒碧之名. 聞之尙能使人骨冷. 他日倘能遂赤松共遊之計. 再過竹嶺之路. 則當爲君一入而登. 詠文節之詩. 想見其人 (기존 번역 전재)
 

망월산성.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그림 그대로인 한벽루

이제 한벽루를 찾아 길을 나선다. 한벽루가 재건된 곳은 답사 지도에서 번호 2의 위치 ‘청풍문화재단지’이다. 청풍이 물에 잠기면서 한벽루를 비롯하여 소중한 문화유산과 삶의 흔적들을 되도록 많이 현의 뒤쪽 망월산성 기슭으로 옮겨 재건한 곳이다. 지도에 번호 1로 표시한 위치는 물속에 잠긴 읍리 곧 청풍부가 있던 읍치였다. 번호 3은 청풍부에서 마주 바라본 금병산(錦屛山, 또는 병풍산/屛風山)이다. 청풍의 옛 지도에는 한벽루를 비롯한 관아의 모습과 주변 산천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사진 1은 제천시 자료사진인데 옮겨 세운 청풍관아를 조망할 수 있는 사진이다. 필자가 화살표로 표시한 누각이 한벽루다.

 

사진 1. 옮겨 지어진 청풍관아의 자료사진. 

이제 출발이다. 개인 차편을 이용하면 편하지만, 느리고 자유롭게 백패킹 차림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떠나는 방법도 괜찮다. 제천 시외버스 터미널에는 차편은 자주 없지만 청풍문화재단지로 떠나는 시내버스 편이 여럿 있다. 953, 958, 960, 961, 970, 980, 982 등이다.

 

지도 1. 청풍부 옛 지도. 

청풍문화재단지에 도착하면 우리를 맞는 것은 팔영루(八詠樓)라는 이름의 성문이다. 청풍관아의 관문인 셈이다. 현재는 재건해 놓은 단지(團地) 동쪽에 문이 세워져 있는데 지도 1의 옛 지도를 보면 팔영문은 관아의 서쪽에 있었다. 아마도 단지를 조성하면서 출입문을 동으로 내는 것이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관아의 복원이 아니라 중요한 문화재를 이건해 놓은 것이니 문제는 없다. 팔영루라 부르는 내력은 고종 때 부사 민치상이 청풍의 8경을 읊었기에 팔영문이라 했다 한다.
팔영시(八永時)는 이렇게 읊어졌다.

淸湖眠鷺 (청호면로) 맑은 호수에 백로는 졸고
尾島落鴈 (미도락안) 섬 끝에 기러기 내려 앉았는데
巴江流水 (파강류수) 청풍강(巴江)은 유유히 흐르고
錦屛丹楓 (금병단풍) 금병산에는 단풍이구나
北津暮煙 (북진모연) 북쪽 나루에는 저녁 연기
霧林鐘聲 (무림종성) 안개 낀 숲속에는 종소리
中野牧笛 (중야목적) 들 가운데에는 목동의 피리 소리
飛鳳落照 (비봉낙조) 비봉산에는 낙조로구나

 

지방 관아의 아문으로서는 우뚝한 위세를 자랑하는 청풍관아의 아문(衙門) 금남루.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팔영문을 들어서 길을 따라가면 청풍관아의 아문(衙門) 금남루를 만난다. 충북 유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풍답게 지방관아의 아문으로서는 우뚝한 위세를 자랑한다. 조선 순조 25년(1825)에 부사 조길원이 세운 관청의 정문으로 고종 7년(1870)년에 고쳐 지었고, ‘도호부절제아문(都護府節制衙門)’이라는 현판은 건물을 세울 당시에 부사 조길원이 썼다고 한다.

이곳만은 충주호 아닌 청풍호로 불러줬으면

이제 겸재의 그림 속 한벽루를 찾아간다. 동쪽 수몰된 옛 청풍관아가 있었을 곳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다시 세워 놓았다. 한벽루는 그 강을 바라보면서 떠나온 곳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무심히 그 강을 충주호라 부른다. 댐을 막은 후 생긴 호수를 통칭하여 충주호라 부르는 것이지만 청풍부가 있던 이 강만은 청풍호(淸風湖)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현재는 보물 5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송시열의 편액과 하륜의 기문이 있다. 이건해 놓은 한벽루는 겸재 그림 속 한벽루와 거의 차이가 없다.

겸재가 단양, 청풍을 그린 그림은 한벽루, 사인암, 삼도담(도담삼봉), 하선암, 봉서정, 단사범주, 구담이 전해진다. 삼도담, 하선암, 봉서정은 구학첩(丘壑帖)에 묶여 있다는데 다른 그림들은 낱장으로 남아 있으니 어느 화첩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일까? 사군첩(四郡帖, 청풍, 제천, 단양, 영춘)이란 말도 있으니 더 많은 그림들이 모여 유래가 밝혀지면 좋겠다. 또 어떤 인연으로 겸재가 청풍, 단양을 그렸는지도 더 소상히 밝혀졌으면 좋겠다. 장동 김문(金門)과의 인연이었을까?

겸재의 한벽루 그림은 정적(靜的)이다. 한벽루와 이어지는 건물들이 소상히 그려져 있는 반면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파강(巴江: 청풍강)에도 배 한 척, 뱃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건물 앞 층계를 오르는 사람도 없고 앞 병풍산가에 낚시를 드리운 사람도 없다. 강과 가까웠던 관아 앞뒤로는 버드나무로 보이는 나무만 무성하다.

병풍산 뒤로는 산들이 우뚝하다. 수름산(552m), 대덕산(567m), 금월봉(226m), 당두산(496m), 적성산(844m)들일 것이다. 제천의 명산인 동산(895m)과 금수산(1016m)은 동쪽에 치우쳐 있어 이 화폭에는 담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제목 옆에는 역시나 천금물전(千金勿傳: 천금을 주어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이라는 당부의 도장이 찍혀 있다. 간송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 당부는 지켜지지 못했다.

한편 이 그림과 비교할 만한 그림이 전해진다. 이방운(李昉運: 1761~1815)의 화첩 사군강산삼선수석(四郡江山三仙水石) 속에 들어 있는 금병산(錦屛山)이라는 그림이다. 겸재와 동일 시점(視點)에서 그린 그림인데 이방운은 앞 한벽루보다는 한벽루 너머 산의 이름 금병산으로 제목을 달았다. 그림도 아주 동적인데 겸재의 버드나무 대신 화사한 분홍 꽃(아마도 복사꽃)이 핀 관아에 건물마다 사람들이 자리하고 앞 강에는 네 척의 배에 선객이 가득하다. 강 건너 금병산 아래 모래사장에는 소 몰고 가는 농부와 강가 아이들도 보인다. 어쩌면 이리 동정(動靜)이 다를 수 있을까? 한편 역사박물관 소장의 작가 미상의 ‘한벽루도’도 전해진다.

한편 한벽루는 빼어난 곳이다 보니 수많은 인사들이 들러갔다. 고려 시대의 주열(朱悅), 조선 시대의 하륜, 서거정(徐居正), 이석형(李石亨), 이승소(李承召), 유운(柳雲), 유성룡(柳成龍), 허균(許筠), 송시열, 김수항(金壽恒), 권상하(權尙夏), 김창협(金昌協), 송상기(宋相琦), 황경원(黃景源), 이긍익(李肯翊), 서영보(徐榮輔), 정약용(丁若鏞), 홍직필(洪直弼), 김윤식(金允植) 등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문사들이 다녀가고 글을 남겼다. 한 편만 읽고 가자.

동문선에 실려 있는 고려 시대의 문신 주열의 ‘청풍객사 한벽헌(淸風客舍 寒碧軒)’이란 시다.

물 빛 맑고 밝아 거울 아닌 거울이요
水光澄澄鏡非鏡
산 기운 자욱하니 안개 아닌 안개로다
山氣藹藹煙非煙
차고 푸른 기운 서로 엉기어 한 고을 되었거늘
寒碧相凝作一縣
청풍은 만고에 전하는 이 없네
淸風萬古無人傳

 

출장 온 관속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응청각.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한벽루 옆으로는 겸재의 그림처럼 관아 건물들을 옮겨 놓았다. 간단히 살펴보자. 옆으로는 응청각(凝淸閣)이 있는데, 관아의 누각 건물로 19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벽루 옆에 나란히 세워졌던 2층 누각이었다. 지금은 떨어져 있다. 출장 온 관속들의 객사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건물 뒷면에는 관수당(觀水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그 사유를 알 길은 없다. 충북 유형문화재 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금병헌.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금병헌(錦屛軒)은 충북 유형문화재 34호로 지정된 집회 및 부사의 집무를 처리하던 동헌이라고 전해진다. 다른 이름은 명월정 또는 청풍관이라고도 한다. 조선 숙종 7년(1681)에 처음 지어졌으며, 영조 2년(1726)에 다시 옮겨 짓고 이름을 금병헌으로 바꾸었다. 건물의 오른쪽은 대청이고 왼쪽은 온돌방이다. 죄인을 가두어두던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조선 말기에 없어졌다 한다.

 

옮겨다 놓은 옛 가옥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물태리 석불.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곳에는 관아 건물 이외에 읍리 대광사(大光寺) 입구에 서 있던 부처상도 옮겨다 놓았다. 보물 546호 물태리 석조여래입상이다. 또한 마을에 있던 여러 석물들도 옮기고 백성들의 가옥도 옮겨 놓았다. 황석리, 도화리, 후산리, 지곡리의 고가(古家)들도 옮겨 놓아 민속박물관 같은 느낌도 있다. 우리가 잊은 농기구나 가구 등 소중한 생활유산들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사열이현이었던 청풍현

이어지는 언덕길에는 망월산성(望月山城)이 있다. 충청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해발 373m의 망월산 정상을 돌로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 둘레는 495m이다. ‘사열이산성’ 또는 ‘성열산’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문무왕 13년(673)에 사열산성을 더 늘려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청풍은 고구려의 사열이현이었는데, 신라에 귀속되어서는 경덕왕 16년(757)에 청풍현으로 고쳐졌으니 신라에 귀속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은 완전한 모습으로 잘 남아 있다. 한벽루에서 내려다보는 청풍호도 이름답지만 망월산성에서 내려다보는 청풍호와 주변 경관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청풍은 없지만 경관은 남아 산과 물이 기이하고 빼어난(산천기수: 山川奇秀) 고장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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