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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73) 구담봉 옥순봉 ②] 봄날 옥순·구담에 올라 시간을 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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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96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03.30 09:44:08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계절은 무심하지 않아 온 세상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이런 철에 집에 콕 박혀 있는 것은 철부지(철 不知)가 아닐 수 없다. 방역 당국은 집에 있으라 하지만 온 겨울 방침을 잘 따랐으니 오늘은 마스크로 무장하고 배낭을 멘다. 단양팔경을 쓰면서 벌써 1년여 전에 다녀온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려 하니 현장감도 적고 영 흥취가 나지 않았다. 오늘은 구담봉과 옥순봉에 오르리라.

두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는 남한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하류 청풍에서 굽이굽이 오르는 강물은 옥순대교 지나 옥순봉과 구담봉을 어우르고 도담을 감돌아 영춘으로 올라간다. 봄날 구담봉과 옥순봉에 오르면 이 강물 위에 아른거리는 봄기운에 젖어 시간은 놓아두고 앉아 있었던 날이 생각난다.

이제 남한강 길 감돌아 장회나루 지나고 계란재(鷄卵峙)에 도착한다. 계란재는 제천 수산면 계란리와 장회나루가 있는 단양 장회리를 잇는 고갯길이다. 산양이 사는 국립공원 월악산의 북쪽 줄기가 벋어 내려와 남한강에 닿으면서 솟아난 명산이 구담봉과 옥순봉이다. 그러니 옥순봉(명승 48호)과 구담봉(명승 46호)은 월악산계에 속하는 명산인 셈이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무슨 고개 이름이 ‘계란(鷄卵)’고개란 말인가?
 

옥순봉 정상.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계란형 명당에 자리 잡은 토정 형제

정설은 없어서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토정 선생이 이곳 땅의 형세를 살펴보니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명당 자리였다 하는데, 밑도 끝도 없이 여기에서 어인 토정 선생이란 말인가? 그 연유를 알려면 그의 형을 살펴야 한다.

토정의 형님은 이지번(李之蕃)인데 토정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에게 글을 배웠고 그 후에는 서경덕 문하에서도 잠시 수학하였다. 그들은 목은 이색의 6세 손이며, 형 지번은 청풍(淸風) 군수를 지냈고, 형의 두 아들 중 이산해(李山海)는 영의정, 이산보(李山甫)는 이조판서를 역임한 명문가였다. 그런데 형 이지번에게는 한 때 피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한다. 잠시 선조실록을 보자.

 

옛 지도에 구담, 옥순, 계란재가 보인다. 

선조(수정실록) 8년(1575) 12월 기사에 이지번의 졸기가 실려 있다. 그 내용 중 일부는 이런 것이다.

아들 산해(山海)는 어릴 적에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졌는데 윤원형이 자기의 딸을 시집보내려 하자, 지번이 즉시 벼슬을 버리고 아우 지함(之菡)과 함께 단양(丹陽)의 구담(龜潭) 곁에 가 살면서 열심히 학문을 닦고 담박한 생활을 하며 만족스럽게 스스로를 즐기니, 사람들이 그를 구선(龜仙)이라 불렀다. 이황(李滉)이 그와 벗하여 도학(道學)을 권면하였다. 금상(선조) 초년에 청풍 군수를 제수하여 옛날 은거하던 곳에서 가깝도록 하였는데, 이황이 강요하여 취임했는데 무리하게 하지 않고도 청정하게 다스렸다. 그가 떠나가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기리었으며, 후인들은 모두 그의 풍절(風節)을 숭상하였다.

子山海幼稱神童, 尹元衡欲以女妻之, 之蕃卽棄官, 與弟之菡, 遁居丹陽 龜潭上, 攻苦食淡, 囂然自樂, 人稱爲龜仙. 李滉與之友, 勸勉以道學. 今上初年, 除淸風郡守, 使近舊隱, 李滉强之屑就, 臥理淸淨. 旣去而民思之, 紀石頌德, 後人皆尙其風節.

 

구담-옥순 등산 지도.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세도를 부리던 윤원형이 아들 산해(山海)를 사위 삼고자 하자 이를 피해 이지번이 단양의 구담(龜潭)으로 낙향했는데 이때 토정도 형님을 따라 구담으로 낙향했던 것이다. 여기서 이지번은 신선 같은 풍모로 살았기에 사람들이 구담의 신선이라 하여 구선(龜仙)이라 불렀다 하니 그 형님에 그 아우였던 셈이다. 창하정(蒼霞亭)을 세우고 은둔했던 윤지 이윤영과 더불어 이지번도 은거한 구담이고 보니 예사 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계란재에서 구담봉, 옥순봉 산행길 출발이다. 계란재에는 산행하는 이들을 위해서 주차장과 화장실을 잘 갖추어 놓았다. 주차장 한편에 돌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구담봉 길의 생강나무 꽃.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옥소권공섭묘소입구(玉所權公燮墓所入口).

옥소? 누구일까? 궁금증은 뒤로 미루고 산행길로 접어든다. 생강나무 노란 꽃이 부끄럽게 피어나 산객을 맞는다. 문득 김유정의 동백꽃이 떠오른다. 강원도에서는 이 꽃을 동백꽃이라 부른다지…. 다음 주에는 김유정의 금병산 산행길에 나서야겠다.

 

옥소 묘소.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옥소 권섭. 

고도가 어느 만큼 되는 계란재에서 출발하는 산행길은 숨 한 번 헐떡일 일 없이 구담봉과 옥순봉이 나누어지는 삼거리에 닿는다. 계란재에서 1.4km 지나온 곳인데 구담봉 0.6km, 옥순봉 0.9km를 알리고 있다. 두 봉우리를 찾기 전에 관심 있는 이는 찾아볼 곳이 있다. 입구에서 만났던 옥소 권섭의 묘소이다. 이곳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길 50여m 아래에 자리 잡았는데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옥소 권섭이 누구일까? 옥소(1671~1759)는 우리에게 늦게 알려진 조선 후기 대문학가이다. 작품의 숫자로 보나 장르로 보나 완성도로 보나 조선 최고의 문학가 중 한 사람으로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옥순과 구담 갈림길의 이정표.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옥소 음택 지형도. 옥소가 그렸다고 전해진다. 

최고 명문가 자제지만 문학을 택한 이유

안동(安東) 권씨 명문가 집안으로 서울에서 출생한 옥소는 일찍 아버지를 여위었으나 큰아버지는 학자 권상하(權尙夏), 작은아버지는 이조판서 권상유(權尙遊)이며 아우는 대사간 권영(權瑩)으로 의지할 울타리가 탄탄하였다. 외가는 어머니가 용인 이씨(龍仁李氏)로,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의 딸이니 본가 외가 모두 명문가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수재로 인정받았는데 송시열(宋時烈)을 위시한 주변 인물들이 사사(賜死) 또는 유배되는 참극을 보면서 관계(官界) 진출의 길보다는 문필 쪽을 택하였다.

일생을 전국 방방곡곡 명승지를 찾아 탐승(探勝) 여행을 하였고 보고 겪은 바를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오늘날 전해진 작품만도 한시 3000여 수, 시조 75수, 가사가 2편이나 된다. 전국을 다니면서 쓴 여행기들도 전해진다. 문집으로는 간행본 옥소집(玉所集, 13권 7책)과 필사본 옥소고(玉所稿)가 있다. 문집 속에는 손수 그린 주로 산수화 그림들도 전해지고 글씨 또한 명필이니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예술인이었던 셈이다. 묘소 자리도 스스로 그려 남긴 곳에 장사지냈다 하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무덤 자리라 한다.

묘비에는 가운데에 백취옹지묘(百趣翁之墓)라 씌어 있는데 옥소 이외의 호(號) 백취를 써서 권섭 자신을 나타냈고, 백취옹을 중심으로 좌(左)에는 월성이씨(月城李氏), 우(右)에는 가림조씨(嘉林趙氏)를 적고 있다. 일찍이 월성이씨와 사별하고 가림조씨와 재취했음을 알 수 있다.
 

옥소 권섭 묘소의 안내석.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부부 합장묘의 왼쪽 오른쪽 이야기

여기에서 잠시 부부(夫婦) 합장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부를 합장할 때는 남편의 좌측에 부인을 안장한다. 이를 부좌(祔左)라고 한다. 흔히 합장묘에 가면 묘표(墓表)에 OO지묘(OO之墓)라 쓰고 그 옆에 OO씨 부좌(OO氏 祔左)라고 씌여 있다. 부인이 남편 좌측에 모셔져 있다는 말이다. 부인과 사별하고 정식 가례를 올린 두 번째 부인까지 한 묘에 합장할 때는 두 번째 부인을 남편의 우측에 모신다. 부우(祔右)가 되는 셈이다. 결국 남편을 중심으로 첫 부인은 부좌, 둘째 부인은 부우로 안장되는 것이다.

경우는 드물지만 둘째 부인마저 사별하고 정식으로 세 번째 부인을 맞았는데 네 명의 합장묘를 쓴다면 세 번째 부인은 두 번째 부인 곁에 안장되는 것이 순서였다. 소실을 두거나 과수댁을 맞아 재취했다면 이 부인들은 합장묘에 안장될 수 없었다. 정말로 크게 인심 쓴다면 선영(先塋)의 한 귀퉁이에 묻어 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도 허락되지 않아 대부분 다른 곳에 장사지내는 것이 일반적 사례였으니 예(禮)란 이름 아래 사람 차별이 참 심한 사회였다.

 

나무데크 계단길과 함께 하는 구담봉 등정로.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갈림길로 돌아와 구담봉으로 향한다. 갈림길 삼거리 봉우리는 고도 374m, 구담봉 정상은 고도 330m이니 아이러니하게도 등산(登山)길이 아니라 하산길이다. 이 길은 대부분 바위 길이라서 초심자는 조심하며 나아가야 한다. 더욱이 가파르게 떨어지는 절벽 길을 내려가면 기다리고 있는 등정로(登頂路)는 수직 절벽 길이다. 다행히도 나무 데크와 철사 다리로 등정로를 만들어 놓아 별 위험 없이 구담봉에 오를 수 있다. 전에는 구담봉 정상에 올라 옥순봉 쪽으로 등로(登路)가 이어져 있었는데 길이 위험하여 사고가 잦다 보니 정상을 포함한 반대편 등산로는 폐쇄되어 있다. 따라서 정상석(330m)도 정상 바로 아래 평탄지에 세워져 있다. 정상석 곁에 앉아 인증사진을 찍어 본다. 카메오로 출연해 보는 것이다. 안전하게 나무 데크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구담(龜潭)의 푸른 물길 곁으로 윤지의 창하정 터, 장회나루, 두향묘가 코 아래 보인다. 이어지는 남한강 물길이 상류를 향하여 구불구불 벋어 나간다. 지난 호에 소개했듯이 겸재를 비롯한 화인(畵人)들은 그림으로 구담의 모습을 남겨 놓았다. 문장가들은 글을 썼고 시인들은 시를 남겼다.

여유당전서에 실려 있는 다산의 단양절구오수(丹陽絶句五首) 중 한 수 ‘구담(龜潭)’을 읽어 보자.

봉래섬이 날아와 푸른 못에 떨어졌네 蓬島飛來落翠池
돌문을 뚫고 가자니 낚시 배도 느려져 石門穿出釣船遲
누가 구름 속 솔방울 하나 가져 와 誰將一顆雲松子
물 나뭇가지에 바람 소리 더하는고 添得颼飅到水枝

다산은 신선들이 사시는 봉래도(蓬萊島)가 날아와 이곳에 자리 잡았다 한다. 구름 속 소나무에 매달린 솔방울은 바람이 불 때마다 솔 피리(松籟)를 불어 바람 소리를 더한다고 한다. 지금도 구담에는 변함없이 소나무들이 푸르다. 바람이라도 불면 쏴아~~ 솔 피리 소리가 난다.
미호집(渼湖集)에 실려 있는 김원행의 ‘구담에 배 띄우고(龜潭泛舟)’도 빠질 수 없는 구담 시 중 하나이다. 앞 일부만 읽고 가자.

단구의 협곡이여 웅장도 하구나 丹邱之峽何壯哉
밤낮으로 동쪽에서 큰 강물 흘러오네 大江日夜東出來
장회리 아래쪽 큰 물결 광활해라 長淮之下波浪闊
십 리나 툭 트여 푸른 비단 휘감은 듯 十里撒開靑錦廻
오로봉은 땅에서 구천 척이나 솟고 五老拔地九千尺
채운봉 현학봉 서로 높다 다투네 綵雲玄鶴爭崔嵬
그중에 구담 절벽 제일로 아찔하니 龜潭絶壁最神竦
창연한 층층 철벽 하늘까지 솟았다오 蒼然積鐵撑天開
서리서리 깊은 물에 굳건하게 뿌리박고 深蟠積水壯根蔕
반들반들 금옥 같아 티끌조차 사절하네 淨削金碧絶壒埃
부딪치는 격랑에도 꿈쩍조차 않은 채 衝波浩蕩不敢動
깊디깊은 구지에서 뇌성만 울리누나 蜿蜿九地深轉雷
지주와 용문이 어떤지 모르지만 砥柱龍門知何似
이 물결 부딪치면 서북쪽 무너지리 對此應欲西北頹
붉은 벼랑 푸른 절벽 구름 비단 펼쳐지니 丹崖翠壁雲錦張
넘쳐나는 원기 속에 오색 빛깔 난만해라 元氣淋漓五色堆
······
(기존 번역 전재)

이제 구담봉을 되돌아 나와 삼거리로 향한다. 전에는 정상을 넘어 강을 끼고 가던 길이 막혀 아쉬움이 크다. 갈림길 삼거리로부터는 0.9km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옥순봉 가는 길은 편안한 흙길이다. 단양팔경 답사길에 올라 구담, 옥순을 다녀가고자 하는 분 중 혹시 산행길 벅찬 분이 계시면 옥순봉만이라도 다녀가시기를 권한다. 남한강 뱃길도 아름답지만 거꾸로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는 남한강 뱃길은 지구상 명승을 꼽으라 해도 빠지지 않을 곳이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옥순대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옥순대교 뒤로 청풍이 보인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옥순봉(286m)에서는 옥순대교와 청풍 쪽 뱃길이 내려다보인다. 옥순봉은 단양팔경에는 넣지만 지금은 제천 땅 평풍면이고 예전에는 청풍현에 속한 지역이었다. 필자가 소개하는 이곳의 옛 지도도 물론 청풍현 지도다.

전호에서 소개했듯이 옥순봉(玉笋峰)이란 이름은 퇴계 선생이 지은 이름이다.

소탄을 거슬러 남쪽 언덕 절벽 아래로 따라 오르면, 그 위에 여러 봉우리를 깎아 세운 것이 죽순(竹筍) 같아서 높이가 천백 장(丈)이나 되며 우뚝하게 기둥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그 빛은 푸르기도 하고 창백(蒼白)하기도 하다. 푸른 등나무와 고목(古木)이 우거져 아득하고 침침한데 멀리서 볼 수는 있어도 오르지는 못하겠다. 내가 옥순봉(玉筍峯)이라 이름 지은 것은 그 형상 때문이다.

(泝灘而進. 循南涯絶壁下. 其上諸峯. 削立如筍. 高可千百丈. 突兀橕柱. 其色或翠或白. 蒼藤古木. 縹緲晻靄. 可仰而不可攀也. 請名之曰玉筍峯. 以其形也.)

 

옥순봉과 구담봉의 자료사진.
유람선에서 바라본 옥순봉.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퇴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옥순봉과 구담봉 사이 바위 농암(소석대)에 단구동문(丹邱洞門)이라는 글자도 새겼다는데 이제는 수몰되어 보이지 않는다(退溪名以玉筍. 手書丹邱洞門四字鐫於壁面. 玉筍龜潭之間. 有小石㙜二級. 俗稱聾岩… : 관암 홍경모의 저서 舟下龜潭記에서).

단구동문이란 청풍에서 단양으로 올라가는 골짜기 입구라는 뜻이리라. 이 바위에는 이인상의 유수고산(流水高山)이란 각자도 있다 한다. 산자수명한 곳이다 보니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시인은 시를 썼다.

겸재의 단사범주(丹砂泛舟), 단원의 옥순봉, 이인상의 옥순봉, 윤제홍(尹濟弘)의 지두화(指頭畵) 옥순봉 등이다. 겸재의 단사범주는 단양(丹陽)을 단사(丹砂)로 기록했는데 ‘단양 모래사장에 배를 띄우고’ 정도의 느낌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리라.

현대화가 연상시키는 윤제홍의 지두화

그림의 배경은 옥순봉을 지나면서 앞으로는 구담봉으로 보이는 두 봉우리가 보인다. 푸른 소나무는 봉우리와 기슭을 장식하고 있다. 곰곰 살피면 마치 금강산 어느 봉우리 같은 빼어난 봉우리들과 거기에 자리 잡은 소나무는 가히 일품(一品)이다. 강에는 삿대를 밀어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배에 손님이 가득하다. 구담봉 건너 평탄한 땅에는 당나귀와 말도 보이고 잘 정리된 울타리에 단아한 초가도 보인다. 아마도 단사(丹砂)란 이 땅으로 모래사장이었을 것 같다. 윤지의 창하정도 이 근처에 세워졌을 것이다.

그림에는 예의 千金勿傳(천금물전: 천금을 주어도 남에게 넘기지 마라)이라는 주인(朱印)도 보인다. 소장자가 자식들에게 남긴 당부였을 것이다.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앞서 가는 이들이 뒤에 오는 이들에게 하는 당부의 말은 지켜지는 경우가 드물다. 내가 사랑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겸재 그림에 찍혀 있는 천금물전, 아쉽게도 단 하나 지켜진 것이 없다.

 

이윤영 작 옥순봉.(자료사진)

병진년화첩에 남아 있는 단원의 옥순봉도 자꾸 눈길이 간다. 대가의 면모가 유감없이 배어 있다. 이윤영의 부채 그림 옥순봉도 있다는데 상태가 안 좋다. 참고로 자료사진으로 올린다. 능호관 이인상의 옥순봉도는 전해지는지 일실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단원 ‘병진화첩’의 옥순봉. 
겸재 작 ‘단사범주’.

지두화가(指頭畵家) 윤제홍의 옥순봉도 두 점은 이인상의 그림을 보고 영향을 받아 그렸다 한다. 그림을 모르는 필자는 손가락 끝으로 그렸다는 윤제홍의 옥순봉도를 보면 마치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현대 화가를 만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양반이 우리 시대에 있었다면 아마도 운보나 장욱진 수준의 화가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윤제홍 작 옥순봉 1. 
윤제홍 작 옥순봉 2.

이제 옥순봉을 보고 읊은 시(詩)도 읽고 가자.

관암 홍경모(洪敬謨)의 관암전서에는 퇴계의 시 한 편 전반부가 소개되어 있다. 단양 군수로 있던 퇴계가 청풍에 다녀오며 단구동문을 지날 때 쓴 시로 보인다. 제목은 ‘단양쉬과청풍(丹陽倅過淸風: 단양 수령이 청풍을 지나며)’.

푸른 물 단양의 경계 碧水丹山界
청풍에는 명월루가 있는데 淸風明月樓
신선은 기다려도 소용이 없어 仙人不可待
홀로 쓸쓸히 돌아가는 배 怊悵獨歸舟.

청풍부사를 지낸 농암 김창협도 한 수 읊었다
 

구담봉 정상에 오른 필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옥순봉(玉筍峯)
단구에 내 당도해 보니 丹丘我已到
영지초도 가히 캘 것 같구먼 三秀若可采
깊디깊은 푸른 못물 정적 감돌고 綠潭靜淵淪
위치 따라 산 모습 달라지는데 靑峯勢屢改
구름 노을 기운이 강하게 비쳐 映鬱雲霞氣
허공에다 비단을 깔아놓은 듯 橫空如錯綵
검은 일산 수령이 기다리는데 皁蓋倚延佇
푸른 깃발 아득하다 어디에 있나 羽旗杳何在
어이 이리 더딘고 따라오는 배 遲遲後來船
게으름 피우지 말고 노 저어 오소 鼓枻來勿怠
줄지어 늘어선 오로봉 모습 森然五老峯
기다린 듯 나에게 읍을 하누나 揖我如相待
(기존 번역 전재)

정조 때 문신 황경원도 강한집에 옥순봉(玉笋峰) 시를 남겼다.

치솟은 바위들이 물가에 이어져서 奔石連滄洲
구름 뚫고 신령스런 죽순 토했네 穿雲吐靈笋
우뚝한 백옥의 기둥들이 亭亭白玉楹
곧게 서 서로 얽혀 있네 矗立相錯紾
밤새도록 밝은 달이 걸리어 있고 終夜明月挂
온종일 떠다니는 운무를 끌어들이네 永晝游靄引
태산이 진동한다 할지라도 泰山雖云震
저주는 일찍이 무너진 적 없었지 底柱曾不隕
강 가운데 배를 대어놓고 中沚泊我舟
머리 들어 저 높은 산 바라보았네 矯首望嶾嶙
옆 사람이 기분 좋아 춤출 듯한 건 旁人喜欲舞
꼭 영지버섯 때문만은 아니라네 未必知仙菌
깎아지른 그 모습 정밀하고 교묘하니 戌削精且巧
여기에서 조화가 극진하구다 於玆造化盡
방황하다 어부에게 물어보니 彷徨問漁父
하늘이 하시는 일 다 알려 말라네 莫窮天所聯
(기존 번역 전재)

모두가 이곳을 신선과 연결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영지버섯(三秀, 仙菌)을 신선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 신선의 땅 옥순봉, 구담봉을 떠나 귀가길에 오른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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