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그림 길의 한강 수계(水系)를 마무리하고 이제 임진강(臨津江)으로 발길을 옮겨 보자. 겸재가 임진강 길에 남긴 그림은 현재 3점이 전해진다. 임진적벽(臨津赤壁)과 연강임술첩(涎江壬戌帖)에 전하는 웅연계람(熊淵繫纜)과 우화등선(羽化登船)이 그것이다.
우선 임진적벽도부터 찾아가 보자. 임진강과 그 지류 한탄강(漢灘江), 그리고 한탄강의 지류 차탄천(車灘川)은 화산에 의한 지각변동의 영향으로 주상절리(柱狀節理)가 잘 발달되어 있다. 크고 작은 규모로 살핀다면 수십 군데는 족히 넘을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절리(節理)라는 단어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마디가 생기는 이치(理致)나 이유(理由)인가? 혹시 연리지(連理枝)란 단어를 기억하시는지? 여기에서도 理(리)란 글자가 해득하기 힘들다. 理(리)에는 결, 켜와 같은 의미가 있다. 그러니 절리(節理)는 마디가 이어져 내린 결의 모습이고, 연리지는 나뭇가지들이 붙어 생기는 나이테가 이어진 모양, 즉 그 결을 가진 가지라는 말이 된다.
바위 이름에 리(理) 자가 들어간 이유
그런데 옛사람들의 글 속에는 우리가 쓰는 지질학적 용어 주상절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극소수는 석벽(石壁)이지만 대부분은 그다지 붉은색도 아닌데 구차스럽게 적벽(赤壁)이라 부른 석벽(石壁)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연강임술첩을 만날 때 살피기로 하고 이번 글에서는 그냥 적벽을 받아들이고 가 보자.
그런데 겸재가 그린 임진적벽(주상절리)은 많은 주상절리 중 어디를 그린 것일까? 임진강 최대, 최고(最高)의 주상절리는 연천 미산면 동이리 주상절리이다. 이 주상절리는 2015년 한탄강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을 받은 유서 깊은 명소다. 색깔도 비교적 붉은 빛을 띠어서 적벽이라 불러도 별 무리는 없다. 앞쪽으로 넓은 자갈밭이 있고, 근래에는 차박(車泊) 객들이 늘어 골치를 앓고 있다. 겸재의 그림에 비해서는 너무 웅장해서 임진적벽도의 배경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파주 두지리 황포돛대 지역이다. 지자체는 옛 임진강 뱃놀이나 선객(船客) 이동, 물자 이동의 기억을 잊지 않게 하려고 임진강을 오르내렸던 황포돛대 배를 재현하였다. 물론 이제는 물자의 수송도 선객의 이동도 없는 순수 관광여객선으로서, 원점회귀하는 황포돛대 노선을 운용하고 있다. 선착장 앞 건물 벽에는 겸재의 임진적벽도를 그려 놓았고 선장님은 저 그림의 배경은 이곳이라고 설명을 한다.
사실 겸재의 임진적벽 글을 쓰기 위해 지난 가을부터 이 황포돛대를 타려고 기다렸으나 날씨가 추워지니 최소 승객수 8명을 채우지 못해 해를 넘기고 말았다. 다행히 봄볕 따듯한 주말에 오니 정족수를 넘긴다. 배가 출발하자 이미자 씨의 황포돛대가 구성지게 울려 퍼진다. 이 뱃놀이와 이렇게 어울리는 노래였던가…. 선장님의 구수한 해설도 재미있다. 거북이가 물로 들어가는 모습의 거북바위, 옛 마을 빨래터, 남북으로 마주 보는 자장리와 원당리 적벽, 이제는 이북 땅이 된 상류 삭녕에서 떠내려 왔다는 삭녕바위, 수심이 낮아 미처 접근하지 못한다는 연천 출신 조선 시대 정치가 미수 허목의 괘암(掛巖) 등을 황포돛대가 다가가지 못하고 돌아옴이 많이 섭섭하다. 미수는 이곳에다 掛巖(괘암)이라 새기고 서명하였다. 그 전말이 기언(별집 제9권) 기(記)에 남아 있다. 황포돛대 뱃머리에는 괘암 각자 사진이 풍상에 찌든 채로 걸려 있다.
괘암제명기(卦巖題名記)
금상 9년 여름에 정군 도형(鄭君道泂)이 나에게 괘암의 제명 고적(題名古跡)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그 유래가 지금까지 300년이나 되었습니다. 아래위에 목은(牧隱), 도은(陶隱), 임서하(林西河)의 옛집이 있는데, 강가에 사는 노인들이 전하는 말로는 모두 볼만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서 정군(鄭君)을 따라가서 구경하고, 또 김하규(金夏圭), 고응문(高應文) 두 유생과 강가에서 만났는데,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와서 기다린 김 장로(金丈老) 무리가 또 노소(老少) 10여 인이었다.
이들과 함께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내려가서 괘암에 이르렀다. 그 아래로 많은 바위와 긴 강과 흰 모래가 펼쳐지고 이따금 높은 절벽이 강 속에 우뚝 서 있는데, 괘암은 그중에서도 가장 기이하고 빼어나서 깎아 세워 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어부와 낚시질 하던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기를,
“어릴 때는 바위를 타고 올라가면 이끼 사이로 근근이 자획(字劃)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알아볼 수 없게 된 지가 벌써 60년이나 됩니다” 하였다. 나는 그 밑에다 ‘괘암’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쓰고, 또 ‘미수서(眉叟書)’라고 쓴 다음 돌에 새겨서 괘암의 제명 고적을 드러내었다.
그 위로 강을 따라 몇 리를 올라가면 지포(芝浦)가 나온다. 그 북쪽 언덕은 동포(銅浦)로, 고려 때 임춘(林椿)이 이곳의 강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 하류에 관어대(觀魚臺)가 있으니, 목은의 시고(詩藁)에 관어대에서 지은 시가 있다. 지포에는 도은공(陶隱公)의 강가 정자가 있다 한다. 이때에 와서 기다린 사람은, 김계함(金誡緘) 노인이 가장 연장인데 나보다 두 살이 적었고, 윤파정(尹坡挺), 안정수(安廷燧)-안정유(安廷烠) 형제, 권수(權銖), 최세□(崔世□), 우유하(禹有夏), 김 장로의 아들 김유(金怮)-김강(金□), 괘암의 주인 곽처후(郭處厚)-곽처강(郭處江) 형제이다. 또 머리가 허옇게 센 선비 김원(金瑗)이 뒤따라 왔으니, 이 사람은 나와 어렸을 때 같이 배웠던 친구이다. 여러 사람이 술도 가져오고 고기도 낚아 와서 함께 마음껏 즐겼다.
미수는 기록한다.
卦巖題名記
上之九年夏. 鄭君道泂與我言. 卦巖題名. 古跡其舊遠. 如今三百年上下. 有牧隱, 陶隱, 林西河舊業. 江上老人相傳. 皆可觀. 余聞之喜甚. 從鄭君往而觀之. 又與金夏圭, 高應文兩生相從江上. 金丈老輩聞吾來. 來相待者. 又老少十餘人. 相與乘舟棹下. 至卦巖. 其下衆巖, 長江, 白沙. 往往有高壁浸江. 卦巖最奇絶. 石立如削. 有漁父釣魚者. 指言童稚時. 攀石上. 莓苔間. 僅見字畫. 今不見. 已六十年. 余從其下. 大書卦巖二字. 又書曰. 眉叟書刻石. 以表卦巖題名古跡. 其上沿江數里曰芝浦. 其北岸曰銅浦. 高麗林椿江上居云. 又下流. 有觀魚臺. 牧隱詩藁. 有觀魚臺作. 芝浦. 陶隱公江亭云. 其來相待者. 金誡緘丈最白首. 少於我二年. 尹坡挺, 安廷燧廷烠兄弟, 權銖, 崔世▣, 禹有夏, 金丈老子金怮, 金□, 卦巖主人郭處厚, 處江兄弟. 又有白首生金瑗踵至. 與我同學少年友者也. 諸君或載酒. 或釣魚. 相與樂甚. 眉叟. 識.
서울로 가는 두 번째 큰길이었는데…
배로 가 보지는 못했지만 저 멀리 포구 고랑포 옛터가 보이고, 고구려의 호로고루城 터도 보인다. 찾아가 보아야겠다. 그런데 황포돛대에서 만난 두 적벽은 나룻터 앞 건물에 그린 겸재의 임진적벽도와 공통점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이곳도 저 그림의 배경이 되는 곳은 아닌 것 같구나.
우선은 옛 포구 고랑포(古浪浦, 皐浪浦)로 가 본다. 사실 임진강 길을 걸어도 고랑포를 아는 이는 드물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이 막히면서 완전히 잊힌 땅이 된 곳이다. 예전 송도에서 남으로 오려면 파주 지나 혜음령 넘어 오는 길이 가장 큰 길이었다면 그 다음쯤 되는 길이 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 지나 고랑포를 건너 적성으로 가고 이어서 양주를 지나 의정부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또한 강원 북부 내륙이나 함경도 지방의 세곡은 육로로 해서 고랑포로 모이고 황포돛대 선박을 이용하여 임진강과 한강 수계를 통해 마포 광흥창으로 보내졌다. 그러다 보니 2, 8날 큰 장이 섰고 우(牛)시장은 근처에서 가장 컸다 한다. 1930년대에는 화신백화점 분점이 고랑포에 문을 열었다. 그때에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기와집들이 처마에 처마를 대고 이어져 있었다. 그러던 고랑포는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고 단 한 채의 집도 남지 못하고 폐허로 돌아갔다. 한국전쟁 이후 사람이 지나간 것은 1.21사태 때 김신조 일당이 지나간 일이 유일하다 한다.
이제는 지자체에서 고랑포전시관도 지어놓고 길손을 맞으며 “고랑포를 아시느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옛 지도에 고랑포 건너 땅은 적성(積城)인데 요즈음은 우리가 감악산이라고 부르는 ‘신(神)의 산’이 감박산(甘朴山)이라는 이름으로 임진강 넘어 고랑포를 바라다보고 있다.
고랑포에 오면 가슴 아픈 이의 무덤도 찾아보자.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의 능이다. 나라를 고려에 바치고 신라의 천년 사직을 마감한 이. 그는 조상 대대로 산 경주 땅에 묻히지 못하고 장단 고랑포 뒷산에 묻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경순왕의 이야기를 줄여서 살펴보자.
김부대왕(金傅大王: 경순왕의 이름)(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
제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의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서기 927) 9월에 백제 견훤(甄萱)이 신라에 침입해 고울부(高鬱府)에까지 이르렀다. 경애왕이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태조는 장수에게 명하여 날쌘 군사 1만으로 구원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구원병이 채 이르기도 전에 견훤이 겨울 11월에 수도 경주를 급습하였다.
이때 왕은 비빈 및 왕족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노닐며 잔치를 즐기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견훤의 군사가 들이닥치자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왕비는 후궁으로 달아났고 왕족과 공경대부와 그 외 남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지만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서,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엎드려서 노비가 되겠다며 목숨을 구걸하였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나라와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왕궁으로 들어가 머물면서 왕을 찾아내라고 명령하였다.
왕과 왕비 및 첩 몇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잡혀서 군사 속으로 끌려왔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제로 범하였으며 부하들을 시켜 빈첩들을 욕보였다. 그리고 왕의 일가 동생인 부(傅)를 왕으로 세웠다.
왕은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 왕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통곡하였다. 우리 고려 태조가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다음 해 무자년(서기 928) 봄 3월에 태조는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순행하여서 경주 근처에 이르렀다. 왕과 백관이 교외로 나가 맞이하고 궁궐로 들어와 서로 마주하였다. 마음과 예를 다하여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얼큰해지니 왕이 말하였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해 침략을 당하여 난리를 불러 일으켰고, 견훤이 불의한 일을 자행하여 우리나라를 망하게 했습니다.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면서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니 신하들도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조도 눈물을 흘렸다. 수십 일을 머물다 돌아갔는데, 태조 휘하의 군사들이 정숙하고 조용했으며 조금도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다. 도성의 남녀들이 서로 기뻐하며 말하였다.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이리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이 왔을 때는 마치 부모를 보는 듯하구나.”
8월에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비단 저고리와 안장을 한 말을 보내주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수들에게도 차등 있게 선물을 주었다.
청태(淸泰) 2년 을미(서기 935) 10월, 사방의 영토가 모두 다른 나라의 것이 되었고 나라는 약해지고 형세는 고립되어서,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곧 왕은 여러 신하들과 국토를 태조에게 바쳐 항복하는 것을 의논하였다.
(第五十六 金傅大王 諡敬順 天成二年丁亥九月 百濟甄萱 侵羅至高鬱府 景哀王請救於我太祖 命將以勁兵一萬往救之 救兵未至 萱以冬十一月掩入王京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 四散奔走 爲賊所虜 無貴賤匍蔔匐 乞爲奴婢 萱縱兵摽掠公私財物 入處王宮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 匿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而强淫王妃 縱其下亂其嬪妾 乃立王之族弟傅爲王 王爲萱所擧卽位 前王尸殯於西堂 與群下慟哭 我太祖遣使吊祭
明年戊子春三月 太祖率五十餘騎 巡到京畿 王與百官郊迎 入宮相對 曲盡情禮 置宴臨海殿 酒酣 王言曰 吾以不天 侵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痛如之 因泫然涕泣 左右莫不鳴咽 太祖亦流涕 因留數旬 乃廻駕 麾下肅靜 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 如見父母 八月 太祖遣使 遺王錦衫鞍馬 幷賜群僚將士有差 淸泰二年乙未十月 以四方地盡爲他有 國弱勢孤 不已自安 乃與群下 謀擧土降太祖)
마의태자의 전설이 말하듯 아버지 김부(경순왕)가 나라를 고려에 넘길 것을 결의하자 태자는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미 기운 나라를 다시 세우기는 어려웠다. 경순왕은 왕건의 결혼 정책에 따라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송도에서 살게 되었다.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으나 다시는 경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를 경주로 보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고려는 철저히 대비했던 것이다. 경주로 돌아갈 수 없는 인질이었던 셈이다. 죽을 날이 다가와 경주로 가려 했는지 아니면 죽어서 경주에 가까이 묻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임진강 건너에서 고향 경주 쪽을 그리며 1000년을 잠들어 있다. 대왕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고려의 사관은 이 일에 대해 말한다.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어쩔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이지만, 한편으론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때 만약 힘껏 싸우며 죽음으로 항전하여 태조의 군사에게 항거했다면,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해져서 반드시 그 가족들이 멸망하고 해악이 죄 없는 백성들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렇지만 항복하라는 명을 기다리지 않고 창고를 봉하고 군현의 문서를 작성해 귀순하였으니, 아마도 조정에 공이 있고 백성들에게 덕이 있는 것이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佳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則必覆其家族 害及於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 籍郡縣 以歸之 其有功於朝廷 有德於生民甚大“
임진강을 바라보며 고랑포는 아마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南無 티끌 세상!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