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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원 기자의 와린이 칼럼 ①] 와인과 삶의 ABC: ‘오 봉 클리마’와 영화 ‘사이드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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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19호 윤지원⁄ 2022.03.02 09:11:35

'오 봉 클리마'의 피노 누아 와인. (사진 = 윤지원 기자)

 

■ 오늘의 와인
오 봉 클리마 피노 누아 산타바바라 카운티 2019 Au Bon Climat Pinot Noir Santa Barbara County 2019

타입 : 레드
포도품종 : 피노 누아 100%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카운티
와이너리(생산자) : 오 봉 클리마

수입사 : 티애니떼루와(주)
페어링 : 잠봉뵈르 샌드위치, 아보카도와 에그스크램블, 치즈 류


기자는 와린이다. ‘와인’에 관한 한 ‘어린이’ 수준의 초심자라는 뜻이다. 블리자드 게임 ‘와우’(WOW, World of Warcraft)를 생각하고 들어왔다면 미안하지만 이건 술 이야기다.

30년 주도락(酒道樂)을 찾다가 문득 와인에 몰두한 지 대략 1년, 많은 종류의 와인에 도전해봤다. 유튜브, 블로그, 인터넷 까페 등에서 여러 정보를 얻고, 이런저런 공부도 해가며 와인을 알아가는 재미에 빠졌다. 카베르네 소비뇽, 말벡, 리슬링, 소비뇽 블랑, 시라즈 등등 여러 주요 품종과 보르도, 론, 샹파뉴, 토스카나 키안티, 뉴질랜드 말보로, 아르헨티나 멘도사 등등 다양한 산지의 와인들을 도장 깨기 해왔다.

그런데 피노 누아 와인 만큼은 아직 제대로 맛본 적이 없었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가 워낙 귀하고, 비싼 와인의 대명사이다 보니 괜히 겁이 앞선 까닭이다.

피노 누아는 껍질이 얇고 잘 무르는 특성 탓에 재배하기 매우 까다롭고, 고도로 숙련된 양조 기술이 아니면 맛있는 와인으로 양조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유명한 부르고뉴 피노 누아 와인은 그 희소성과 까다로운 등급, 비싼 가격 등의 이유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피노 누아는 보르도와 함께 프랑스 와인의 양대 산맥인 부르고뉴 와인을 대표하는 품종이고, 비단 같은 식감, 탄탄한 질감, 풍부한 향기를 머금은 우아한 맛 등으로 명품 중의 명품으로 꼽힌다.

그래서 한번 맛을 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고, 빠져들면 비싼 가격을 감당하느라 삶의 나머지 부분이 피폐해진다는 얘기도 있다. 부르고뉴 와인에 빠지는 것의 위험성을 두고, 집 기둥뿌리를 가장 빨리 뽑을 수 있다는 하이파이 오디오 취미에 빗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미 와인에 발을 들인 이상 피노 누아도, 부르고뉴 와인도 마셔보고 싶었다. 물론 세상엔 값싼 피노 누아도 많고, 나 역시 부르고뉴 피노 누아 중 아주 저렴한 것을 마셔 보기도 했다. 그러나 “싸고 맛있는 부르고뉴는 없다”는 와인 업계 속설을 혀로 확인한 것이 유일한 수확이었을 뿐이다.

조금은 비싸더라도 적어도 한 번은 제대로 된 피노 누아를 맛봐야겠다는 생각에 괜찮은 입문용 와인을 알아보다가 오늘의 와인 ‘오 봉 클리마’를 알게 됐다.

 

오 봉 클리마 본사가 위치한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마리아 카운티의 포도밭. (사진 = Tim Mossholder on Unsplash)

 

와인의 'ABC'

‘오 봉 클리마’라는 와이너리는 미국 피노 누아 와인 중 손꼽히는 품질의 와인으로 명성을 쌓은 업체이며, 이곳의 라인업 중 저렴한 제품인 ‘오 봉 클리마 피노 누아 산타바바라 카운티’는 부르고뉴에서 생산됐다면 몇 배는 더 비쌌을 것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맛과 향이 뛰어난 ‘가성비’ 피노 누아로 유명하다.

‘오 봉 클리마’(Au Bon Climat)는 프랑스어로 ‘적절한 기후에서’라는 뜻이다. ‘봉’은 ‘쎄시봉’(Ç’est si bon, 너무 좋다) 할 때의 ‘봉’(bon)으로 ‘좋다’(good), ‘적당하다’(suitable)라는 뜻이다. 구글번역기의 다소 딱딱한 말투를 순우리말로 부드럽게 풀어 쓰면 ‘딱 좋은 날씨에서’가 된다.

그러니까 오 봉 클리마 와이너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마리아 밸리와 산타바바라 카운티 일대의 독특한 지리적인 조건에서 비롯된 ‘딱 좋은 날씨에서’ 잘 자란 포도로 와인을 양조한다는 의미다.

또 ‘오 봉 클리마’(Au Bon Climat)는 앞글자만 따서 ‘ABC’라는 애칭으로도 통한다. 와인을 더 잘 알고 싶은 와린이가 ‘와인의 ABC’부터 제대로 배운다는 의미를 부여하니, 서둘러서라도 반드시 이것을 먼저 마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오늘은 너로 정했다”를 외쳤다.

무엇보다 이날 고른 ‘ABC’가 미국 피노 누아 중에서도 산타바바라 지역의 피노 누아라는 점이 가장 유혹적이었다. 이유는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 2004)’ 때문이다.

‘사이드웨이’는 아마도 만화 ‘신의 물방울’과 함께 와인을 소재로 한 대중문화 콘텐츠로 가장 유명한 두 작품일 것이다. 특히 ‘사이드웨이’는 와인 애호가는 물론 영화 애호가 사이에서도 이견 없이 누구나 1등으로 꼽을 최고의 와인 영화일 것이다. 나 역시 와인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일부러 이 영화를 찾아봤다.
 

영화 '사이드웨이'의 포스터. (사진 = 폭스서치라이트픽처스)

 

'사이드웨이', 삼천포의 순기능

대학 신입생 때부터 절친인 두 중년 남자, 잭과 마일즈가 1주일의 여행에서 겪는 이야기로, 고단한 일상과 지리멸렬한 개인사를 잠시 떠나 새로운 인연과 엮이는 중년 남녀들의 사랑과 우정과 갈등, 끝나지 않은 꿈과 재기(再起)에 관해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한물간 배우지만 여전히 잘생기고 남성미 넘치는 잭은 결혼을 1주일 앞두고도 넘치는 성욕에 충실(?)하여 다른 여자들에게 거짓말로 작업을 걸어대는, 진지함·책임감·섬세함·교양 등과는 담을 쌓은 짐승남이다. 마일즈는 가난한 영어 교사(우리나라라면 국어 교사), 출판된 적 없는 무명 소설가, 이혼 후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위기의 중년남이며, 무엇보다 와인 ‘애호가’를 넘어 와인을 섬기다시피 하는 ‘와인 속물’이다.

이들의 여행은 잭의 총각파티인 동시에, 신랑 들러리를 실수 없이 서기 위해 이혼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하는 마일즈를 위한 힐링 프로젝트이다. 그래서 여행 테마는 마일즈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고, 목적지는 바다와 산과 포도밭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 많은 와이너리(양조업체)와 레스토랑,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끝내주는 날씨로 유명한 산타바바라 카운티다.

영화의 제목 ‘사이드웨이’는 ‘옆으로’라는 뜻. 와인을 보관할 때 세워두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눕혀두는 것을 의미한다. 포스터에도 옆으로 눕혀둔 와인 병 안에 두 친구가 들어가 있는 삽화가 그려져 있다.

또한, 사이드웨이는 특히 ‘앞뒤를 향해서가 아닌 옆을 향해서’라는 뜻이다. 전진이나 후진만 있는 방향성에서 어긋나는 것을 말하며, 그래서 길에서 곁가지로 난 샛길을 말하기도 한다. 영화는 두 남자가 각자 자신이 걷던 ‘인생길’에서 샛길로 잠시 벗어나는 이야기다.

마일즈의 정신 상태는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위태롭다. 하지만 잭의 대책 없는 무모함 때문에 그들의 샛길은 상당히 멀리, 삼천포로 빠진다. 하지만 모험이 커진 만큼 예상을 뛰어넘는 커다란 힐링과 깨달음으로 돌아온다.

극중 피노 누아를 가장 좋아한다는 와인 애호가 마일즈가 산타바바라의 여러 와이너리와 레스토랑을 다니며 계속해서 많은 와인을 마셔대고, 와인에 관해 쉴 새 없이 수다를 떨고, 와인과 인생에 관해 수많은 명대사를 쏟아 낸다. 여주인공 마야가 와인에 대해 말하는 대사처럼.

“포도가 자라는 그 1년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를 좋아해요. 햇살은 얼마나 비췄을까, 비는 얼마나 내렸을까 같은 거요. 그리고 그 포도를 재배하고, 수확한 사람들을 그려보기도 해요. 그래서 오래된 와인을 마시게 되면 그 사람들 중 몇 명은 세상을 떠났겠구나, 생각하게 되죠. 한 병의 와인이 계속해서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해 나갈지도 궁금해져요. 오늘 내가 따는 와인을 다른 날 땄다면 그 맛이 달랐겠죠. 한 병의 와인은 정말로 살아있으니까요. 그래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점점 복잡한 존재가 되니까요.”

와인과 인생이 닮아있다는 것을, 언젠가는 느끼게 될까? 중년의 와린이는 생각한다.

 

영화 '사이드웨이'의 한 장면. 마일즈(왼쪽, 폴 지아매티 분)가 한 와이너리의 시음장에서 잭(토머스 헤이든 처치 분)에게 와인 감상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사진 = 폭스서치라이트픽처스)

 

우아한 불금의 맛, 피노 누아

‘사이드웨이’로 인해 와인을 더 잘 알아가고 싶어졌고, 기회가 닿는다면 산타바바라도 가고 싶어졌다. 마일즈가 극찬하는 피노 누아에 대한 욕망도 더 커졌다. 그래서 오늘의 와인은 반드시 이 한 병이어야만 했다.

월요일부터 반복된 다섯 번의 출퇴근, 그리고 무사히 맞이한 금요일 저녁. 평소보다 긴 시간을 들여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셀러에 ‘사이드웨이’로 보관하던 와인 한 병을 꺼내 열었다. 드디어 ‘오 봉 클리마’다.

식사 1시간쯤 전 미리 마개를 열어두어 숨을 쉬게 했다. 병에 갇혀있던 와인이 기지개를 펴면서 산소와 반응하게 해 준다. 담근지 얼마 되지 않아 숙성이 덜 된 ‘어린’ 와인을 일깨워주는 과정이다.

잔을 코에 가져가니 맑고 투명한 장미향이 듬뿍 올라왔다.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쉬지 않아도, 더운 물에 포푸리를 적신 것처럼 향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혀에 단맛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달다는 느낌이다. 한 모금 삼키고 나니 입안에 남은 침이 꿀로 변한 것 같다. 우아하고 풍부한 향과 맛에 해방감이 느껴졌다. 이 황홀한 해방감의 극대화를 위해 주중의 스트레스를 극대화해야 하나 싶은 어리석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수도권 최저기온이 –10℃까지 떨어졌던 날이라 그다지 ‘봉 클리마’는 아니었지만, 일주일을 무사히 마친 직장인의 불금이자, 와린이가 처음 마신 피노 누아가 너무나도 맛있었던 저녁이니 기분만큼은 매우 ‘쎄시봉’ 했다.

< 문화경제 윤지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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