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5호 윤지원⁄ 2022.06.10 09:12:04
■ 오늘의 와인 바소 카베르네 소비뇽 2017 Vaso Cabernet Sauvignon 2017
타입: 레드 / 포도품종: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쁘띠 베르도, 말벡, 카베르네 프랑 / 지역: 미국>캘리포니아>나파 카운티>나파 밸리 / 와이너리(생산자): 다나 에스테이트 / 수입사: 에노테카 코리아
최근 한 미국 와인이 크게 화제가 됐다. 우리나라 정치 및 현대사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이 와이너리의 ‘스토리’ 때문이다.
지난달 21일.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만나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이날 저녁 공식 만찬에서 만찬주로 사용된 세 가지 와인이 주목받았다.
이날 국산 와인으로 경북 문경에서 오미자로 만드는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 결’이 건배주로 사용됐고, 만찬에서 음식과 함께 제공된 와인은 미국 캘리포니아산 와인 2종이었다.
미국산 와인 중 레드와인은 미국 나파밸리의 한국인 소유 와이너리 다나 이스테이트(Dana Estate)에서 만든 ‘바소’(Vaso) 2017년산이고, 화이트와인은 1882년 나파밸리에 설립된 샤토 몬텔레나(Chateau Montelena)에서 만든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이다.
한국산 와인 1종, 미국 와인을 대표하는 와이너리의 와인 1종, 그리고 미국 와인이지만 한국인 소유인 와이너리의 와인 1종을 각각 선택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미로제 결’과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가 각각 한국과 미국의 정상을 대변하고, ‘바소’는 양국의 하모니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조합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 대변인실 역시 “‘바소’는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만찬주였으며, 공식 만찬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는 의미”라며 “양국 특색을 느낄 수 있는 주류를 (건배주와 만찬주로) 선정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인이 주인인 미국 와인업체,
그런데 그 주인이 바로...
그러나 대통령 대변인실은 ‘바소’에 담긴 다른 스토리를 읽지 못했는지, 이 선택이 잘못됐다는 비판이 일었다. 다나 이스테이트의 공동 운영자인 전재만 씨가 다름 아닌 전두환 전 대통령의 넷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씨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자국민에 대한 학살을 자행한 것을 비롯해 뇌물 수수, 비자금 조성 등의 여러 범죄로 인해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이자 민주주의 체제에서 절대 따르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로 평가받는다. 또 그는 각종 혐의로 무기징역과 함께 추징금 2205억 원을 판결받았으나 지난해 2021년 사망할 때까지 추징금 원금의 40% 넘는 돈을 미납했다.
특히 1997년 말 사면된 후에 추징금 완납을 거부하면서 “예금이 29만 원뿐”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도 이후 20년 넘게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한 점 때문에 국민 대다수로부터 원성을 샀다.
다나 이스테이트는 전재만 씨와 이희상 전 동아원그룹 회장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1000억 원대 규모의 와이너리다. 전 씨와 이 전 회장은 다름 아닌 사위-장인 관계. 즉 다나 이스테이트는 ‘독재자의 후손과 사돈의 공동 사업체’라는 평가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박영훈 더불어민주당 전국대학생위원장은 지난 5월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과거 전두환에게 ‘김대중·김영삼 탄압 말라’ 편지 쓴 바이든 대통령에게 전두환 아들이 만든 만찬주를 올린 윤석열 대통령”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바이든 대통령은 1986년 미 상원의원 시절 전 전 대통령에게 한국의 많은 정치범이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채 구금된 데 우려를 전하며 이들에 대한 탄압을 멈출 것을 요청한 과거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바이든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자에게 경고의 서한을 보냈음에도 시간이 지나 그 독재자 아들이 만든 와인을 마신 셈”이라고 지적하며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이 사실을 모르고 선정했다면 대통령실 의전 시스템 붕괴고, 알고도 선정했다면 외교적 결례”라고 덧붙였다.
또한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5월 24일 YTN 라디오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에 출연해 “대통령 참모들의 준비 부족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면서 “사람을 설득할 때는 팩트도 중요하지만 스토리도 중요하다. 바이든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라고 한다면 보다 세심하게 섬세하게 접근했어야 되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와인은 와인일 뿐” VS “와인은 스토리가 중요”
야당 인사들이 아니라 일반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다나 이스테이트는 구설수가 있는 와이너리로 통한다. 최근 한 와인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한 회원이 다나 로터스 비냐드 카베르네 소비뇽 한 병을 선물 받았다는 게시물을 올렸는데, 이 게시물에 60개가 넘는 댓글이 바로 달리며 논란이 일기도 했다.
회원들은 두 의견으로 나뉘었다. 일부는 “독재자가 불법 축적한 비자금으로 만든 와이너리라 거들떠보지 않는 와이너리”라는 단호한 입장이었다. 심지어 한 회원은 “피 맛이 날 듯”하다며 “심정적으로 마실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다른 일부는 “정치적 호불호가 심하지만 와인 자체는 맛있다”, “와인은 와인으로만 보자”라는 등 유보적 입장이었다.
그리고 다시, 유보적 입장의 회원들을 향해 “와인은 와인일 뿐이라고? 와인만큼 전통과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음료가 있나?” 라는 네티즌의 지적이 일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이 논란을 정리한 분위기다. 와인은 와이너리, 프로듀서와 관련된 스토리와 히스토리가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문화를 자양분으로 성장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전두환 와인’ 논란보다 더 심한 독재자에 관한 와인 논란이 이미 수십년째 이어지고 있다.
세계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 혹은 폭군을 꼽는다면 제2차세계대전의 원흉이자 홀로코스트의 주범인 독일 나치의 아돌프 히틀러가 첫 손가락에 들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잘 팔리는 ‘히틀러 와인’
히틀러는 생전에 와인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나치는 히틀러의 직속 수하인 궤링이나 궤벨스, 히믈러 등의 수뇌부의 탐욕 때문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와인을 약탈한 것으로 유명하다. 연합군이 히틀러의 별장이던 ‘독수리 둥지’의 지하 저장고에서 발견한 고급 와인이 무려 50만 병이 넘었을 정도였다.
히틀러는 ‘절대 악’으로 여겨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범이자 대량살인마다. 그런데 히틀러의 초상이나 나치 슬로건의 이미지를 라벨로 만들어 재미를 보는 와이너리가 있어, 글로벌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잊을 만하면 논란이 일고 있다. 이탈리아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 지역의 ‘비니 루나르델리’(Vini Lunardelli)가 바로 문제의 와이너리다.
이 와이너리는 알레산드로 루나르델리가 1968년에 설립했다. 그는 와인 산업을 대대로 이어 온 가문의 후손으로, 이 와이너리도 처음에는 이탈리아 와인 산업의 전통에 따라 와인을 양조해 다른 와인 사업자에게 대량으로 판매하는 사업체였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그의 아들인 안드레아가 입사한 후, 직접 병입해서 소비자에게 파는 사업을 시작했고 그의 마케팅이 큰 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비니 루나르델리는 1995년부터 역사적으로 논란이 되는 인물이나 역사적 포스터의 이미지들로 와인 병의 라벨로 만들고, ‘역사적 선(線)’(liña de la storia)라는 이름으로 팔기 시작했다. 예컨대 나폴레옹 1세, 윈스턴 처칠 같은 역사적 인물의 초상도 있고 ‘공산당 소장품’이라는 이름으로 체 게바라, 요제프 스탈린, 칼 마르크스 등의 라벨이 붙은 와인들을 컬렉션으로 팔기도 했다.
문제가 된 라벨은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 그리고 나치의 수뇌부인 히틀러,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같은 파시스트들의 초상과 그들의 슬로건이다.
독일에서는 나치와 관련한 이미지와 슬로건의 사용이 엄격하게 규제되어 있기 때문에 비니 루나르델리의 판매가 금지됐다. 2007년에는 ‘총통’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히틀러의 정치적 위상을 강조하는 라벨의 와인을 팔다가 2만 병이 경찰에 압수되기도 했다.
하지만 비니 루나르델리 측은, 이 라벨들은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이 아니라 단지 장난일 뿐이고, 자유로운 표현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탈리아 법원도 법적으로 이를 제재할 근거가 없다며 무혐의 판결을 내렸다. 이후 이들은 히틀러 얼굴이 그려진 와인을 지금까지도 당연한 듯 팔고 있다.
악명도 명성이라고, ‘역사적 선’ 시리즈가 올리는 매출은 비니 루나르델리의 전체 생산량의 50%를 차지하며, 심지어 히틀러 얼굴이 담긴 와인은 전체 매출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씁쓸한 일이다.
불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독재자의 후손이 외국에서 만들어 파는 와인과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의 얼굴을 떡하니 내걸고 파는 와인. 이들이 자행한 비극적인 역사에 조금이라도 공감한다면, 그 어느 쪽에도 쉽게 손이 가지 않을 것 같다. 이번 한미의 중요한 공식 외교 석상에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는 스토리의 와인이 '굳이' 채택되면서, 우리의 히스토리가 좀 더 찜찜해진 건 아닌가 싶다.
< 문화경제 윤지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