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진행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통일부의 업무보고에서 권영세 통일부장관은 윤 대통령이 그간 언명해 왔던 이른바 ‘담대한 계획’에 대해 “한미 간 긴밀한 조율 및 공조를 거쳐 조만간 이를 대북 제안으로 구체화하여 제시할 방침”이라고 보고했다고 밝혔다.
‘담대한 계획’을 마련 중이라는 얘기와 함께 권 장관은 “북한인권재단을 하반기 국회에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해 금년내 출범시킬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보고했다”고 용산 대통령실 기자단에 대한 브리핑에서 밝혔다.
결국 새 정부는 북한이 더 이상 핵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경제 협력 및 안전 보장 안을 담은 ‘담대한 계획’을 북한에 제시함(A)과 동시에 북한인권재단을 연내에 출발시키는(B) 투 트랙 전략을 서두르겠다는 말인데, 그 A와 B는 마치 상극 같은 존재다. 즉, A를 추진하려면 B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하고, B 추진이 진정한 목적이라면 A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A와 B가 왜 상극인지는 오랜 청와대 생활 덕에 남북한 교류사의 속사정에 대해 밝고, 실제로 평양을 방문해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속깊은 대화를 나눠봤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한 마디 말만 들어보면 된다.
박 전 대통령은 2007년 7월 월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대화를 하려고 마주 앉아서 인권 어떻고 하면 거기서 다 끝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북한 사람과 대화를 하겠다면 인권이란 단어 자체를 꺼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인권이란 말을 꺼내는 순간 분위기는 얼음이 돼 버린다는 경험담일 게다.
늑대와 황새의 “이거 맛이 최고야” 대접 이야기
그런데 새 정부는 북한이 받아들일 만한 담대한 계획을 곧 제시하겠다면서 동시에 북한인권재단을 서둘러 만들겠단다. 이는 마치 이솝 우화에서 황새가 “이거 최고급 생선이야”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호리병 속에 생선을 담아서 늑대에게 주고, 늑대는 “이거 정말 맛있는 수프야”라면서 황새에게 넓은 그릇에 담긴 수프를 제공하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음식을 통해 상대방의 환심을 사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으려면 상대방의 취향에 맞춰야지, 내 취향에 맞춰서는 아무 소득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의 약을 올릴 뿐이라는 게 이솝 우화의 교훈이다.
박 전 대통령의 말대로, 인권 거론이 북한과의 대화 테이블에서는 ‘거의 쥐약급’이라는 사실을, 남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국민의 인권을 보살펴야 한다”는 좋은 말이 왜 대화를 멈추게 만드는지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좀 쉬울 듯하다. ‘인권 = 다양한 의견 존중 = 다당제’라 생각해보면 된다. 인권을 보장한다는 것은 곧 다양한 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이고, 다양한 의견에는 ‘정통-통념과 어긋나는 의견’도 포함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기에 다당제가 허용된다. 반면 ‘당이 주인’이라는 북한 사회에선 자유로운 다당제는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
따라서 남한인이 북한인에게 인권 얘기부터 꺼내면, 북한인은 입을 닥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 말에 동조했다가는 반체제 사범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사우디 왕세자에게 인권을 말하기 시작하면 이는 곧 "왕정을 포기하라"는 요구가 되기에 대화는 스톱되기 마련이다.
만약 북한인이 남한인에게 시작부터 “지금부터 돈-경제란 두 단어는 금기어”라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할 말이 엄청 줄어들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권이란 좋은 말이 얼음 땡을 만드는 까닭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단일 지배 체제(왕정)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이 “인권 어쩌고”를 꺼내는 순간, 빈 살만 왕세자 같은 지배자는 얼음 땡이 되버린다. 그리고 그 관계 복원이 엄청 힘들다는 사실은 최근 바이든의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따라서 북한이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당-왕의 단일 지배 국가와 아예 절교하겠다면 모를까, 교섭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인권 얘기부터 꺼내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게 박 전 대통령의 말이다.
이명박 정권 시절에 이른바 ‘비핵 개방 3000’(북한이 먼저 비핵화 하면 북한 국민소득을 3000달러로 올려주겠다는) 계획을 정권 초창기부터 내세웠지만, 이명박 정권 내내 대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아 결국 연평도 포격이라는 비극까지 빚어졌었다.
이런 교훈이 있는데도 담대한 제안과 인권재단설립을 투 트랙으로 진행하겠다는 통일부의 제안에 그저 어리둥절해질 뿐이다. 바라건대 함께 해선 안 될 두 전략을 동시에 구사하면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지기 쉽다. 새 정부는 담대한 제안이든 북한인권재단이든, 둘 중에 하나만 충실히 하면 좋겠다. 섞어 놓으면 엉망이 되는 두 식재료를 섞어 “이거 아주 좋은 두 재료로 만든 거야”라면서, 황새가 늑대에게 ‘호로병에 맛난 음식 담아 내밀 듯’ 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