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손자 손암(巽庵) 정황(鄭榥)의 그림에 양주송추(楊州松楸)라는 그림이 있다. 양주는 경기도 양주이며, 송추(松楸)라는 말은 소나무와 가래나무라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무덤에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심었기에 무덤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였다. 그러니 양주송추는 양주에 있는 묘역이라는 말이다.
이 그림에 정황이 쓰기를 황경사(榥敬寫)라고 써넣었다. ‘황(榥)이 삼가 그립니다’라는 말이다. 존경하는 분의 묘역을 정황이 삼가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이 지역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한눈에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림 좌측에 우뚝한 바위 봉우리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봉우리에는 업힌 듯 작은 바위 하나가 붙어 있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부아암(負兒岩), 즉 인수봉이다. 그 우측으로는 도봉산 오봉(五峯)과 도봉 주능선의 연봉(連峰)이 자리 잡고 있다.
양주송추도는 도봉산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에 있는 무덤을 그린 것을 알 수가 있다. 손암이 존경하는 이, 누구의 묘역을 그린 것일까? 광주 정씨(光州 鄭氏) 세보(世譜)에 그 힌트가 있다.
정봉림(鄭鳳林)이 간행한 광주정씨 세보 정선에 대한 기록을 보자.
자는 원백이요, 호는 겸재다. 숙종 병진 정월 삼일 출생하였고 음직으로 위수(衛率)를 지내고 한성 주부를 거쳐, 하양-청하 두 현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사도시첨정을 지내고 을해년 첨추에 올랐다. 병자년 가선동추가 되었고 영조 기묘년 3월 24일 졸하였으니 향년 84세이다. 뛰어난 그림 솜씨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도설경해(圖說經觧) 등 책이 있으며 유고가 수십 권이다. 배우자는 연안 송씨이며 그녀의 부친 송병규는 주부를 지냈고 송백흥의 후손이다. 묘는 해등촌면 계성리 간(艮) 방위에 합장하였다. 2남 2녀.
鄭鳳林 刊編 光州鄭氏世譜 9卷9冊, 刊寫者未詳, 1928 원문
字元伯號謙齋 肅宗丙辰正月三日生 陰任歷衛率漢城主簿 河陽淸河二縣監 司導寺僉正乙亥陞僉 樞丙子嘉善同樞 英祖己卯三月二十四日卒 香年八十四 以墨妙明耳天下 著圖說經觧等書有 遺稿數十卷 配延安宋氏 父主薄奎炳延安伯興后 墓海等村面鷄城里 艮坐合兆 二男二女.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海等村面 鷄城里)는 지금의 어느 지역일까? 우이동에서 방학동으로 넘어가는 신작로(新作路)길 이름은 해등로(海等路)이다. 해등촌면 계성리는 지금의 방학동, 쌍문동 지역의 옛 지명이다. 겸재의 묘는 이곳에 간(艮) 방향으로 앉아 부인과 합장(合兆, 合葬)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정황은 할아버지 묘역을 그리며 ‘삼가 황(榥)이 그립니다(榥敬寫)’라고 썼던 것이다.
겸재는 1767년(숙종 2년) 1월 3일 유란동에서 태어나 1759년(영조 35년) 3월 24일 84세를 일기로 인왕곡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해등촌면 계성리에 장사지냈다. 다행히 정황의 그림을 보면 사진처럼 정교하지는 않으나 겸재의 묘소 위치를 어림할 수 있다. 일단 번지수는 없지만 계성리라는 지명과 묘의 방위 그리고 산세(山勢)를 어림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림을 살피기 전에 간(艮)이란 방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간(艮)은 동북을 뜻하는 방위로서 묘의 뒤가 동북이 되며 서남 방향을 바라보는(곤향: 坤向)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려면 서북(西北)에서 동남(東南)으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의 서남(西南)쪽 기슭에 묘가 있어야 한다. 즉 묘의 뒤쪽은 동북(艮)이 되고, 앞쪽은 서남(坤)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겸재의 묘는 서북에서 동남으로 뻗어 내리는 산줄기의 서남쪽 기슭에 자리 잡았다는 말이다.
손자가 삼가 그린 묘역의 위치는?
이제 정황의 양주송추도를 보자. 편의상 필자가 숫자를 써넣었다. 번호 1은 인수봉이며 번호 2는 오봉(五峯)을 비롯하여 남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에 여러 봉우리를 그려 넣었다. 번호 1과 2 사이는 고갯길이 이어지고 길 위에는 나귀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우이령(牛耳嶺)이다. 옛사람들은 어마동(於馬洞) 고개라 불렀다. 3은 도봉산 주요 봉우리들이다. 만장봉, 선인봉, 신선봉, 주봉 등등. 4는 너무 낮게 그렸지만 위치로 볼 때 보문능선으로 보인다. 그 끝에 필자가 녹색으로 표시한 위치의 봉우리는 우이암으로 상정하는 게 합리적일 것 같다. 우이암 아래에는 원통암이 있는데 이 그림에는 그려 넣지 않았다. 원경(遠景)으로 그린 그림이다 보니 작은 암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어지는 번호 5는 방학능선으로 이 지역 주민들의 주요 도봉산 산행 코스로 우이동 기점과 방학동 기점에서 올라 도봉 주능선으로 가는 길이다. 능선 길은 번호 6 방학동으로 갈라져 나가고 본줄기는 길게 내려와 방학로(放鶴路)와 해등로(海等路) 구름다리를 넘어 우이빌라 뒤 능선까지 내려온다. 이 능선길에는 정황의 그림에서 보이는 묘들이 이제는 주인을 잃고 밟히거나 묘석은 쓰러지고 상석은 땅에 파묻혀 가고 있다. 나무가 우거지고 묘역을 반듯하게 그린 것으로 볼 때 겸재의 묘역은 7 또는 8의 위치로 보인다. 7의 위치에는 그림을 자세히 보면 비석이 없는 둥근 묘 4기(基)가 보인다. 아마도 지금의 우이빌라가 자리잡은 주변으로 여겨진다.
겸재의 벼슬(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종2품)로 볼 때 석물(石物)도 없는 민묘(民墓)로 묘역을 마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의 위치에는 구획이 확실한 서너 기(基)의 묘역이 보이고 능선 쪽으로는 작은 기와집으로 보이는 건물 지붕도 보인다. 이곳이 겸재의 묘역 아닐까? 이곳은 연립 주택을 비롯한 주택가가 되었는데 뒷 산줄기에는 지금도 묘임을 구분할 수 있는 자리들을 찾아 볼 수 있고 잊혀져 가는 묘석(墓石)들과 무단 반출에도 끈질기게 자리를 지킨 문인석(文人石)들도 남아 있다. 언덕 위에는 작은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고, 앞쪽으로는 정황의 그림에서 번호 9로 표시한 밭이 지금도 일부 남아 약초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효문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추측대로 8의 위치가 겸재의 묘역이라면 묘는 몰라도 묘역을 비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겸재 묘역을 찾아가는 과정에 자료 중에는 정선 묘비 건립을 추진했다는 기사도 있다. 1983년 6월 27일 중앙일보 유홍준 기자의 기사였다.
조선시대 최대의 화가 겸재 정선묘비 건립 추진
한국적 화풍의 창시자이자 조선시대 최대의 화가로 추앙받고 있는 겸재 정선(1676∼1759)의 묘비를 세우자는 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정양모(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안휘준(서울대교수), 이태호(전남대교수)씨 등 미술사학계 학자들이 중심이 돼 일고 있는 이 운동에는 박주환 씨(동산방화랑 대표) 등 고미술 동호인들도 적극 참여할 뜻을 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겸재의 묘비를 세우려면 우선 그 묘소를 찾아야 하는데, ‘겸재 묘소 찾기 운동’이 갑자기 일어나게 된 것은 지난 4일 제25차 전국 역사학 대회에서 이태호 교수가 ‘겸재 정선의 가계와 생애’를 발표하는 중 지금까지 미궁에 묻혔던 그에 관한 사실들과 함께 묘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냈기 때문… (이하 줄임)
또 하나 알게 된 것이 용인 광주정씨 선산에 겸재의 묘단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실된 묘를 아쉬워하는 문중의 배려인 것 같다.
겸재 선생님, 고이 잠드소서.
이제 겸재 그림 길을 여기에서 마무리한다.
읽어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福 받으세요.
‘매월당의 한시 따라가는 길’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