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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팔순 넘은 ‘오로라 작가’ 전명자의 고백 “이제야 내 그림이 보인다”

선화랑 개인전 ‘재현과 현전(現前)의 경계에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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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61호 김금영⁄ 2023.11.29 09:07:36

금빛 해바라기 옆에 선 전명자 작가. 사진=김금영 기자

오로라는 더 깊이감이 스며들어 오묘한 빛을 드러내고, 하늘을 향하는 해바라기의 빛깔은 더욱 찬란해졌다. 전명자 작가가 선화랑에서의 개인전 ‘재현과 현전(現前)의 경계에서’로 돌아왔다. 2020년 선화랑에서의 개인전 이후 3년 만의 개인전이다.

신비롭고 황홀한 빛의 오로라와 해바라기를 소재로 작업을 펼쳐 온 그는 ‘오로라 작가’라 불려 왔다. 실제로 작가는 1995년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처음으로 본 이후 매년 오로라를 보기 위해 노르웨이, 핀란드, 캐나다 등지를 방문해 왔다. 어언 30여 년 이어진 스스로와의 약속과도 같은 일정이다.

전명자 작가의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 전경. 사진=김금영 기자

오로라를 보기 위해선 깊은 산기슭으로 들어가야 해 비행기를 타고 가서도 또 이동해야 하고, 도착한 뒤에도 길이 험준하다. 그렇게 힘들게 도착하고 나서도 날씨 등 여러 변화무쌍한 여건으로 오로라를 100% 볼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작가 또한 초반 열 번의 시도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네 번은 실패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꾸준히 시도해온 건 처음 오로라를 봤을 때 느꼈던 선명한 감동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그 광경을 잊지 못한다. 껌껌하던 새벽하늘이 2~3시간 동안 온통 파랗게 물드는데 거대한 자연은 우리를 가득 품었고, 그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였다”며 “오로라를 처음 봤을 때 예술가로서 선택받은 느낌이었다. 마치 내게 ‘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해주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오로라 작가'라 불리는 전명자 작가는 자신이 직접 보고 느꼈던 오로라의 황홀감을 작품에 드러냈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와 오로라의 인연은 파리가 맺어줬다. 과거 서울여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오롯이 화가로서의 길을 걷겠다는 일념 속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건 파리였다. 작가가 학생이었던 시절, 자신을 가르치던 교수가 늘상 샹송을 불렀고, 예술의 도시 파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줘 어느덧 상상 속 파리는 작가에게 직접 가봐야 할 현실의 꿈으로 다가와 있었다.

실제로 그가 도착한 파리는 발걸음 하나하나 닿는 곳마다 예술이 넘쳐흐르는 도시였다. 특히 작가는 몽마르뜨 언덕을 사랑했다. 마음에 드는 카페에서 온종일 그림을 그리는 게 일상이었다. 작가는 “몽마르뜨 언덕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프랑스 온 국민이 염원하는 곳이자, 프랑스의 상징이기도 했다”며 “카페 앞에 이젤을 두면 주인이 ‘화가냐’고 묻고는 마실 차를 갖다 주면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라’고 권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몽마르뜨 언덕은 오로라와 더불어 작가가 매년 찾는 곳이기도 하다. 마음에 드는 그 카페는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오로라의 에메랄드빛에 둘러싸인 사람들은 즐겁게 음악을 연주하는 등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진=김금영 기자

그렇게 파리에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다가 퐁피두미술관에서 오로라를 그린 작가를 만나게 됐다. 지금이야 다양한 여행 프로그램 등을 통해 오로라에 대한 정보가 국내에도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더욱 오로라의 오묘한 빛에 더 마음이 갔다. 작가는 “그림을 그린 작가가 오로라 빛은 태양광선이 파생돼 나오는 색이라고 알려주더라. 그림을 보니 내 눈으로 직접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고, 그래서 노르웨이로 떠났다”고 말했다.

그렇게 부푼 마음을 안고 떠난 노르웨이에서의 첫 시도는 실패했지만, 재도전해 결국 오로라를 접했고, 그 만남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됐다. 파리로 떠났다가 오로라까지 이르게 된 과정이 마치 운명적으로도 보인다.

금빛 해바라기는 보는 사람에게 활기와 행복감을 전해준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오로라를 보러 갈 때 작은 스케치 도구를 챙긴다. 찍은 사진만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담을 수 없어 간단하게라도 즉석에서 드로잉을 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물들을 이번 전시에서도 볼 수 있다. 작가는 “국내에서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날 보면 ‘오로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어떤 특정 분야의 대표 작가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뿌듯한 일”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오로라·해바라기의 과거와 현재

파리 몽마르뜨 언덕은 전명자 작가가 매년 찾는 장소다. 초창기 그린 몽마뜨르 언덕 그림에선 세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사진=김금영 기자

오로라를 비롯해 해바라기 시리즈도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오로라가 에메랄드빛 신비로운 느낌으로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면, 해바라기는 찬란한 금빛으로 활기와 행복감을 전해준다.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가 수많은 꽃들 중 해바라기를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는 “해는 모든 만물에 에너지를 쏟아주는데, 해바라기는 그 에너지를 가장 강력하게 받는, 태양과 가장 가까운 꽃이다. 이 해바라기를 통해 자연이 주는 행복의 에너지를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해바라기는 그의 그림에서 산과 어우러진 모습으로, 도시를 포근하게 감싸 안은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때로는 해바라기에 둘러싸인 사람들이 즐겁게 티타임을 갖고 있기도 하다. 마치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행복이 만연한 유토피아와도 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이 해바라기를 그리는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다. 작가는 “해바라기는 올해까지만 그리려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해바라기의 금빛은 물감과 금가루를 섞어 이를 빻아서 손수 만들어낸 색인데 이 과정에서 흩날리는 가루에 시력이 많이 손상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구작들만 내걸지 않고 신작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해바라기는 더욱 찬란하게 자신의 빛을 발한다.

신작에선 오로라의 깊은 색감에 더 집중한 시도가 눈길을 끈다. 사진=김금영 기자

특히 이번 전시가 특별한 건 이 오로라와 해바라기의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변화를 한 공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시명에서도 현전(現前)을 언급한 연유다. 그리고 그림을 바라보다 보면 특별한 변화가 느껴진다.

작가가 파리로 떠나기 전, 한국에서 주로 활동을 했던 1990년대 이전 시기엔 자신의 삶을 캔버스에 일기를 쓰듯 그려냈다. 당시 살았던 여의도 아파트의 실내, 창밖의 풍경, 실내 정물, 아이들의 모습 등을 전형적인 구상화로 구사했는데, 세세한 구상적 재현과 작은 붓으로 하나하나 선을 그린 촘촘한 세밀함이 돋보였다.

이런 스타일은 초창기 오로라, 해바라기 그림에서도 엿보인다. 작가는 “그림에 작게 등장하는 창문과 인물 하나의 선까지 세세하게 그렸고, 그리면서도 수정에 또 수정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특히 전시를 준비할 때는 매일 우황청심환을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전명자 작가의 과거 작품부터 신작까지 함께 아우른다. 사진=김금영 기자

그런데 신작들에선 변화가 눈길을 끈다. 구체적으로, 또 세밀하게 그렸던 형상들이 추상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팔순이 넘어 원로화가의 반열에 들어선 그는 “이제야 내 그림이 보인다”고 고백했다.

작가는 “2020년 전시 때 내가 많은 것을 이미 깨달았다고 느꼈고, 할 이야기들을 다 했기에 그 전시가 내 생애 마지막 전시라고 생각했다. 과거엔 그림의 작은 요소 하나하나에 스토리가 필요하고, 정교한 묘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내려놓는 태도도 중요함을 느꼈다. 너무 작은 것에 의미 부여를 위해 머리를 쓰기보다는, 내가 마음 가는 대로 마음껏 그려보는 새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형태는 단순화됐고, 색은 더 깊이감이 생겼다. 몽마르뜨 언덕을 그린 그림을 봐도 초창기 화면에선 건축물과 인물의 형태가 뚜렷하게 보이는 데 반해 현재는 에메랄드빛 색감이 더 도드라진다. 오로라 시리즈에선 과거 인물이 많이 등장했는데, 근작에선 인물을 배제하고 오로라가 내뿜는 신성한 색에 더 집중한 시도가 눈길을 끈다.

전명자 작가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이처럼 구상화와 추상화를 넘나드는 그림이 보여주는 작가의 유토피아는 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세계로 범위가 확장됐다. 작가는 “흔히들 힘을 빼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힘이 더 들어가지 않나. 그래서 힘을 빼고 내려놓는 과정이 내겐 결코 쉽지 않았다”며 “‘시간이 연금술사를 만든다’고들 하는데 내게도 이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이제 느낀다”고 말했다.

작가는 내년 초에도 오로라를 보러 노르웨이로 떠날 예정이다. 이젠 팔순이 넘은 나이에 체력적으로도 힘에 부쳐 “이번이 오로라를 보러 가는 마지막 여정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작가이지만, 어김없이 그림 도구를 챙겨갈 계획이다. 또다시 시작될 작가의 제3막이 기대된다. 전시는 12월 12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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