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2호 안용호⁄ 2023.12.22 18:10:05
해마다 이맘때면 다음 해를 예측하는 트렌드 서적이 쏟아집니다. 그중에서 가장 독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책은 아마도 ‘트렌드 코리아 2024’(김난도·전미영·최지혜·이수진·권정윤 저 외 6명, 미래의창)일 것입니다.
독자들은 ‘점쟁이 문어’라도 만난 심정으로 책을 열독합니다. 그만큼 미래 트렌드에 대한 궁금증이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연말연시, 불확실성의 허들을 뛰어넘어 분초를 다투는 속도 사회의 새로운 트렌드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올해도 이 책은 10개의 미래 소비트렌드 키워드를 제시했습니다. 책 소개를 중심으로 트렌드 키워드를 하나씩 살펴볼까요. 먼저 Don’t Waste a Single Second: Time-Efficient Society 분초사회는 시간이 돈만큼 혹은 돈보다 중요한 자원으로 변모하면서 ‘시간의 가성비’가 중요해진다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단지 바빠서가 아니라, 소유 경제에서 경험 경제로 이행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볼 것, 할 것, 즐길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키워드는 Rise of ‘Homo Promptus’ 호모 프롬프트. 프롬프트는 AI에게 원하는 답을 얻어내기 위해 인간이 던지는 질문을 뜻합니다. 인간이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AI가 내놓는 결과물이 달라지기 때문이죠. 그런데 책은 이 키워드가 ‘호모’, 즉 인간으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언급합니다.
Aspiring to Be a Hexagonal Human 육각형인간은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집안, 성격 등등 모든 것에서 하나도 빠짐이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강박적인 완벽함의 반향으로 작용합니다. 어차피 닿을 수 없는 목표라면, 포기를 즐기는 놀이이자 타인을 줄 세우기 위한 잣대로 활용하자는 것이죠.
오늘날 ‘일물일가’의 법칙은 사라졌습니다. 소비자의 지불 의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빅데이터의 활용과 실시간으로 모든 변수를 측정해 내는 AI의 발달은 시간, 장소, 유통 채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일물N가’의 세상을 열었습니다. 이제 ‘최저가’가 아니라 ‘최적가’가 중요해지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 책은 네 번째 트렌드 키워드로 Getting the Price Right: Variable Pricing 버라이어티 가격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다섯 번째 키워드로 게이머가 ‘파밍’하며 아이템을 모으듯, 사람들은 재미를 모은다는 의미로. On Dopamine Farming 도파밍을 제시했습니다. 재미는 늘 인간의 화두였지만 요즘만큼 재미를 좇는 일이 일상이 된 적은 없었습니다. 엉뚱하고 기발하고 지극히 무의미한 일들이 주목을 끌고 ‘역대급 도파민’이 매번 기록을 경신합니다.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가 범람하는 오늘날 도파밍은 피할 수 없는 추세라는 얘기입니다.
여섯 번째 키워드는 Not Like Old Daddies, Millennial Hubbies 요즘남편 없던아빠. 얼핏 읽으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결혼이 인생의 가장 큰 선택이 된 오늘날, 결혼 후 남자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전에 없이 달라졌습니다. 가사 노동과 육아, 가족 관계의 균형점이 이동하고 있고요. 권위적 가장에서 평등한 동반자로 역할이 바뀌어가는 ‘요즘남편’,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6시 신데렐라’를 자처하는 ‘없던아빠’들이 가정과 기업, 나아가 소비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panding Your Horizons: Spin-off Projects 스핀오프 프로젝트.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쓰이던 스핀오프가 이제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는 추세입니다. 비교적 저 예산과 유동적인 전략으로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도해보는 스핀오프는 기업 입장에서 실패에 대한 부담이 적고, 또 성공할 경우 예상 밖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죠. 개인들도 커리어 개발을 위해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한편, '나도'라는 의미의 ‘Ditto’가 소비 현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나의 가치관과 취향을 오롯이 반영하는 사람, 콘텐츠, 유통 채널의 선택을 따라 하는 디토소비는 구매 의사결정에 따르는 복잡한 과정과 시간을 건너뛰어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You Choose, I’ll Follow: Ditto Consumption 디토소비.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FOBO, 즉 실패의 두려움을 줄이기 위한 손쉬운 방편이라 할 수 있겠죠.
인구는 감소하고 광역 교통은 발달하는 현대사회에서 유목적 라이프스타일을 구가하는 소비자가 늘어나며, 지역은 이제 하나의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이동하고 흐르는 유연한 모습을 보입니다. 정주인구보다 관계인구에 방점을 찍는 유연도시 리퀴드폴리탄이 주목받습니다. 아홉 번째 트렌드 키워드 ElastiCity. Liquidpolitan 리퀴드폴리탄은 이동의 강요되었던 코로나19 시대를 겪으며 참았던 이동성에 대한 갈구를 표현하는 듯합니다.
초개인화된 나노사회, 1분 1초가 아쉬운 분초 사회에서, 돌봄의 시스템화가 중요해졌습니다. 돌봄은 이제 단지 연민이 아닌 경제의 문제입니다. 나이와 건강 상태에 따른 사회적 약자들만이 그 대상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서비스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Supporting One Another: ‘Care-based Economy’ 돌봄경제는 바로 나의 문제인 동시에, 우리 조직과 사회의 경쟁력입니다.
이번 호 문화경제는 특집기사로 ‘2024 트렌드 키워드’를 다룹니다. 앞서 소개한 ‘트렌드 코리아 2024’에 나오는 트렌드 키워드들이 이미 나타나고 있는 현장을 실제 기업들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어 더 생생하게 내년 트렌드를 짚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홈플러스는 ‘아빠 육아’의 중요성이 커지자 아빠와 함께 하는 강좌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기존 홈플러스 문화센터 주요 참여층이 여성이었지만 새로운 공략층으로 아빠 회원에 주목합니다. 아빠와 특별한 하루를 제공하는 가족 이벤트 ‘EDM 키즈 댄스파티’, 아빠오 아이가 2인 1팀이 돼 협동심을 기를 수 있는 ‘트리트니 플레이 데디’ 등이 그것이죠.
삼성, 롯데 등 대기업들은 아빠들의 육아휴직이 하나의 기업 문화로 스며들고 있는데요. 이런 현상은 ‘요즘남편 없던아빠’들이 늘며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나의 가치관과 취향을 오롯이 반영하는 사람, 콘텐츠, 유통 채널의 선택을 따라 하는 디토소비는 주류업계에서도 나타납니다. 지난해 10월 술을 주제로 한 유튜브 채널 한 곳에 소주 ‘화요’ 테이스팅 영상이 올라왔는데요. 제품 다섯 가지를 들고나와 하나씩 마시고, 이를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이 셀럽 추천 영상 콘텐츠는 조회 수 270만 회를 넘길 만큼 인기가 좋았습니다.
게임사들은 기존 게임 타이틀과 세계관을 확장하는 전략으로 ‘스핀오프’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라이엇 게임즈는 라이엇 포지로 ‘솔’ 세계관을 확장했습니다. 엔씨와 넷마블은 게임 속 캐리터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신한은행은 후행적 돌봄 사업의 일환으로 고령층 고객을 위해 매월 복지관을 방문, 금융 서비스 및 교육을 제공하는 ‘찾아가는 시니어 이동점포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보험업계의 경우, 삼성생명은 내년 1분기 요양사업 계획을 확정 짓기 위해 관련 태스크포스를 신설했습니다. KB라이프생명은 올해 10월 도심형 요양시설을 운영하는 ‘KB골든라이프케어’를 자회사로 편입해 요양사업 진출을 공식화하기도 했죠.
2023년 트렌드 서적이 예측한 트렌드가 몇 개나 적중했을까요? 그런데 이번 특집기사를 통해 볼 수 있는 트렌드들은 현재와 미래에 겹쳐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AI의 등장으로 더욱 빨라진 시대, 그래도 마지막 ‘화룡점정’은 인간의 몫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선택에 따라 새해는 청룡을 타고 비상하는 2024년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