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서울에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가 소환됐다. 가나아트와 가나문화재단이 올해 첫 기획전으로 ‘김병기와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마련한 것. 그리고 이번 전시를 가능케 한 인물이 바로 고(故) 김병기(1916~2022) 화백이다.
올해는 김 화백을 둘러싼 특별한 두 가지 의미가 맞닿는 해이다. 2022년 3월 1일 작고한 김 화백의 3주기임과 동시에 그가 커미셔너이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던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60주년이다.
가나문화재단 김형국 이사장은 “올해 김 화백의 3주기를 맞아 회고전을 생각했는데, 마침 상파울루 비엔날레 6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했다”며 “김 화백이 커미셔너이자 한국인 최초로 국제미술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던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던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에 이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하면 보다 뜻 깊겠다고 생각했다”고 전시 기획 배경을 밝혔다.
전시를 위해 생전 김 화백과 끈끈한 인연을 이어왔던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힘을 합쳤다. 그는 1985년 뉴욕에 체류할 당시 김 화백을 만났고, 이후 그가 106세에 타계할 때까지 인생 후반을 함께 했다. 1986년 서울 가나화랑에서 열린 작가의 귀국전을 성사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윤 전 관장은 “김 화백이 죽기 전 한번 서울을 보고 싶다고 해 그의 작품을 모아 전시를 추진했다. 당시 20년만의 귀국전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며 “생전 100세 현역 화가로 활동했던 김 화백은 자신에게 주어진 에너지를 100% 소진하고 영원한 잠에 들었다. 100세가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만날 때마다 1930년대 유학 시절 이야기를 마치 어제 일인 양 생생하게 몇 시간씩 들려주곤 했다. 그렇게 그의 삶은 오롯이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고 김 화백을 회상했다.
미술평론가·예술행정가로서의 김병기도 읽다
전시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된다. 첫 번째 주제는 ‘김병기의 예술 세계’로, 그가 미국 사라토가에 정착했던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주요 작품 10여 점을 선보인다.
대표적으로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정면에서 가장 관람객을 맞이하는 ‘토기가 있는 정물’(1998)은 사각형, 선이 화면을 분할하고 신라토기 등의 요소를 이질적으로 조합한 실험성이 돋보인다. 말년기의 ‘메타포’(2018)는 김병기를 대표하는 선의 표현이 한층 더 강조된 작품이다. 더불어 1970년대 사라토가 시절의 풍경을 드린 드로잉도 살펴볼 수 있는데, 유족의 협조를 통해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특히 이 공간에서는 화가뿐 아니라 교육자, 미술평론가, 예술행정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한 김 화백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다. ‘화성 피카소의 생애와 사상’이 실린 ‘문학예술’ 창간호(1954)를 비롯해 ‘신태양’, ‘사상계’, ‘새벽’ 등 세계미술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분석이 돋보였던 미술평론가 김병기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1950~60년대 잡지들을 전시한다. 또한 1986년 가나화랑에서 열렸던 귀국전 ‘김병기 작품전’ 도록도 공개한다.
가나아트와 가나문화재단은 “김병기 화백은 작품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그에 못지않게 1950~60년대 미술평론가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며 “이번에 자료를 살펴보면서 굉장히 놀라웠던 점은 김 화백이 다룬 평론의 주제가 어느 한쪽에 국한되지 않고 매우 광범위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과 전문성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직접 만나보는 비엔날레 출품작들
두 번째 주제는 ‘상파울루 비엔날레’다. 한국이 1963년부터 참여한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전환점이 된 중요한 행사였다. 특히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당시 ▲김병기의 심사위원 선임 ▲김환기 특별전시 개최 ▲전통 회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응노의 명예상 수상은 한국 미술의 독창성과 예술적 역량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받는다.
이번 전시는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여 작가인 이응노, 김종영, 이세득, 권옥연, 정창섭, 김창렬, 박서보 총 8인의 작품을 통해 그 역사적 순간을 재현한다. 특히 비엔날레에 출품됐던 작품 5점(김환기 3점, 이응노 1점, 김창열 1점)을 모았다.
김환기의 경우 제8회 비엔날레에 출품됐던 ‘에코(Echo)’ 연작 중 ‘Echo 1’, ‘Echo 3’, ‘Echo 9’를 선보인다. 이중 Echo 1 뒷면엔 비엔날레 출품 당시의 원본 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관 브로셔에 수록된 이응노의 1960년 작 ‘구성(Composition)’, 김창열의 ‘제사 Y-9’도 소개한다.
가나아트와 가나문화재단은 “특히 1960년대 유화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 당시 국내 물감 회사가 일을 막 시작했고, 외국 미술 재료 수입을 금지하는 등 환경적으로도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남은 작품이 별로 없었다. 이번에 소개한 작품들은 정말 어렵게 구해 더 소중하다”며 “대부분의 비엔날레 출품작들이 망실된 상황에서 당시 출품작의 실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윤 전 관장은 전시를 소개하며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이응노의 명예상 수상의 배경에 김 화백이 큰 역할을 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하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의 커미셔너인 자크 라센느가 김 화백에게 프랑스 출품 작가인 빅토르 바자렐리를 대상으로 투표하면, 명예상으로 이응노를 추천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김 화백은 한국 작가에게 상을 주겠다는 제안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어 이에 동의했는데, 막상 바자렐리의 작품을 보고 만족스럽지 않은 작품성에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며 “결국 라센느와의 약속을 어기고 이탈리아 출신 알베르토 부리에게 투표했는데, 한 표 차이로 부리가 1위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유럽의 한 심사위원이 근소한 차이니 공동 수상을 제안했고, 다른 심사위원들도 동의해 결국 부리와 바자렐리가 대상을 공동 수상했다”며 “김 화백 입장에서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고, 한국의 이응노는 명예상까지 수상해 여러모로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김 화백에게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준 자리였다”고 말했다.
이를 비롯해 전시는 작가마다 1960년대 초·중반 시기의 작품들을 함께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당시 작가들의 연령이 30대에서 50대 청년 시절로, 후반기 작품들도 함께 전시해 청년기부터 완숙기까지 화풍과 주제가 변화하는 과정을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기점으로 한국 미술이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고유한 정체성을 구축, 발전시켜 나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박서보의 초기 순수 추상, 권옥연의 색채와 구도에 대한 탐구, 이세득의 절제된 형태와 색의 조화, 김창열의 조형적 실험, 정창섭의 비정형 추상 작업, 김종영의 현대적 조각 어법, 이응노의 문자 추상, 그리고 김환기가 순수 추상으로 진입하는 뉴욕 초기작품까지, 작가 개인의 창작을 넘어 1960년대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 미술의 흐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변모해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과도 같다.
특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한국 작가들의 출품을 주도한 핵심 인물인 김 화백의 예술적 안목과 적극적인 지원은 한국 작가들이 국제적 감각을 확장하고 한국적 조형 언어를 세계 미술계에 각인시키는 기반이 됐다. 이렇듯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 진출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며, 이번 전시는 그 의미 깊은 순간을 되새긴다.
가나아트와 가나문화재단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제와 작품 찾기가 만만치 않아 미술관급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미술관에서도 쉽지 않았을 법한 전시였다. 하지만 보다 한국 미술사가 보다 풍요로워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전시를 기획했다”며 “이번 전시가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무대에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되짚고, 당대 작가들이 펼쳐 보인 예술적 도전을 재조명하는 뜻 깊은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시는 가나아트센터에서 4월 20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