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희 서울옥션 경매사 겸 경매기획운영팀장⁄ 2026.03.05 10:52:52
멀리서 보면 그저 검게 보이는 회화가 있다. 아무런 이미지도, 화려한 색도 없다. 그저 검은 화면 하나가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 걸음 다가가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화면 위에는 숯 조각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고, 그 단면들은 빛의 방향에 따라 서로 다른 질감과 깊이를 드러낸다. 단순한 검은색이 아니라 수많은 층위가 겹쳐 만들어낸 ‘검은 풍경’이다. 바로 작가 이배의 작품이다.
현대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주목받는 이벤트는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다. 이배는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베니스 빌모트 재단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세계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전시에 선보인 작품뿐 아니라 영상 작업도 눈길을 끌었는데, 한국의 전통 의식인 ‘달집태우기’에서 얻은 숯을 작품의 재료로 활용한 프로젝트였다.
불길이 지나간 뒤 남겨진 숯이 다시 회화와 조형 작업의 재료가 되면서 불과 재, 생성과 소멸의 순환이 하나의 예술적 이야기로 펼쳐졌다. 베니스를 찾은 관람객들이 숯을 활용한 회화와 설치 작업 앞에서 놀라움을 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장 원초적인 물질인 숯이 작가의 손을 거쳐 새로운 조형 세계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숯이라는 재료의 발견
이배는 195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수학했다. 이후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구축해 왔다. 프랑스 체류 초기 그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시기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이 바로 숯이었다. 나무가 불을 만나 완전히 다른 물질로 변해 탄생하는 숯은 작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숯을 단순한 태움의 재료가 아니라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남겨진 시간의 흔적이자 자연의 변형을 담은 물질로 바라보았다. 이후 숯은 그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재료가 됐고, 작가는 이 물질을 통해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작가에게 숯은 단순한 회화 재료가 아니다. 나무가 뜨거운 불 속에서 태워져 검은 숯이 되고, 그 숯이 다시 작품의 구조가 되는 과정은 곧 생성과 소멸, 그리고 순환이라는 자연의 원리를 상징한다.
숯으로 만든 회화의 구조
이배의 대표적인 작업 가운데 하나가 ‘Issu du feu(불로부터)’ 시리즈다. 이 작업은 숯 조각을 잘라 캔버스 위에 하나씩 붙여 화면을 채우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이후 표면을 다듬는 과정을 거치며 숯가루와 재료가 결합해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멀리서 보면 단순한 검은 화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수백 개의 숯 단면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빛을 반사한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보이는 단면 구조는 화면 전체에 미묘한 리듬을 만든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화면은 평면이지만 실제로는 숯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입체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배의 작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숯이라는 재료는 여러 시리즈로 확장됐다. ‘Landscape(풍경)’ 시리즈에서는 숯가루를 화면 위에 두껍게 쌓아 올리며 물질의 밀도를 강조한다. 검은 덩어리들이 만들어내는 화면은 마치 추상적인 풍경처럼 보인다. 또 다른 작업인 ‘Brushstroke(붓질)’ 시리즈에서는 숯가루로 만든 먹을 이용해 종이나 캔버스 위에 큰 붓질을 남긴다. 화면에는 작가 몸의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이 그대로 기록된다. 특히 종이 작업에서는 동양의 서예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선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완전히 추상적인 형태로 확장된다.
공간으로 확장된 숯 작업
이배의 작업은 평면 캔버스나 종이에만 머물지 않는다. 숯이라는 재료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과 설치 작업으로도 확장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선보인 설치 작업이다. 작가는 수백 개의 숯 오브제를 공간에 배치하며 거대한 조형 구조를 만들었다.
반복적으로 배열된 숯덩어리들은 자연의 암석이나 지층을 연상시키며 회화에서 보여주던 물성의 개념을 공간으로 확장한다. 숯은 원래 나무가 불을 지나 탄생한 물질이다. 작가는 그 숯을 다시 하나의 조형 요소로 재구성하며 자연과 시간의 흔적을 공간 속에 드러낸다. 그래서 그의 설치 작업은 단순한 오브제의 집합이 아니라 불과 물질의 변화를 기록한 하나의 조형적 풍경처럼 느껴진다.
청도 달집태우기 프로젝트
최근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프로젝트가 바로 청도 달집태우기 작업이다. 달집태우기는 정월 대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달집을 태우며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한국의 전통 의식이다. 이배는 자신의 고향인 청도에서 이 전통 의식을 예술 프로젝트로 확장했다.
거대한 달집 구조물을 세우고 불을 붙이는 퍼포먼스를 진행한 뒤 그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서 남은 숯을 작품의 재료로 사용했다. 불이 지나가며 나무는 숯이 되고, 그 숯은 다시 작가의 손을 거쳐 회화와 조형 작업으로 탄생한다. 이 과정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순환 구조를 이루는 셈이다. 청도에서 탄생한 숯이 베니스 전시장으로 옮겨지면서 지역의 전통과 세계 미술 무대가 연결되는 장이 만들어졌다.
미술시장에서의 존재감
이배는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국제 미술계에서도 꾸준히 존재감을 보여 왔다. 그의 작품은 유럽과 아시아 여러 기관과 컬렉터들에게 소장되어 있으며 국제 아트페어와 전시를 통해 점차 더 넓은 관객과 만나고 있다. 경매사로서 바라볼 때 이배의 작품이 갖는 경쟁력은 단순히 독특한 재료 때문만은 아니다. 숯이라는 재료는 한국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나 익숙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조형 언어로 완성한 작가는 많지 않다.
또한 그의 작업은 제작 과정 자체가 상당한 시간을 요구한다. 숯을 자르고 붙이고 다듬는 반복적인 과정은 작품의 물성을 구성하는 동시에 작업의 밀도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제작 방식은 시장에서도 쉽게 대체될 수 없는 독자적인 작업 세계로 인식된다. 또한 이배는 캔버스, 종이, 설치 작품, 브론즈 및 판화 작품까지 다양한 카테고리와 시리즈를 완성해 가고 있다. 다양한 층위의 컬렉터 접근성을 넓히는 일이기 때문에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수요층을 충족시키는 작품 구성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결국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것은 단순한 검은 화면이나 덩어리가 아니다. 그 안에는 작가가 숯이라는 물질과 마주하며 축적해 온 오랜 시간과 작업의 에너지가 검은 형태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검은 화면의 숨겨진 의미
처음 이배의 평면 작품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게 뭐야?’라는 단순한 질문에 봉착한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을 들여 바라보면 그 안에는 숯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변화와 리듬이 숨어 있다. 그의 작업은 화려한 색이나 극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기보다 관람자가 천천히 화면과 공간을 바라보며 그 구조를 발견하도록 만든다.
검은 화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남겨진 시간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나무가 숯이 되고, 그 숯이 다시 하나의 회화와 조형 구조로 태어나는 순간 그의 작품은 자연과 인간의 시간이 교차하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배의 검은 화면은 그렇게 완성된다. 비어 있음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 속 나무가 불에 검게 타 숯이 되어 다시 예술로 완성된 과정이다. 숯의 조각 하나하나는 그 깊은 시간과 물성을 내포하고 있다. 숯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재료를 통해 회화와 입체 조형의 또 다른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