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은⁄ 2026.03.09 11:04:07
전 세계에서 가장 직관적인 브랜드를 꼽으라면 단연 애플(Apple)이 첫손에 꼽힌다. 사용자는 복잡한 매뉴얼 없이도 기기를 직관적으로 다루지만 그 이면에는 수만 개의 부품과 고도의 소프트웨어가 정밀하게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국내 카드업계에서 이와 닮은 행보를 보이는 기업으로 현대카드를 꼽을 수 있다. 소비자에게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경험을 제공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체계적인 데이터 인프라와 기술 기반을 구축해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 유사하다.
지난달 발표된 현대카드의 2025년 잠정 실적은 이러한 시스템 경영이 실제 재무 성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카드 업계 전반이 수익성 둔화, 규제 강화, 조달 비용 증가라는 삼중고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현대카드는 4년 연속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정태영 부회장의 경영 철학이 실제 조직 시스템으로 구현된 결과로 평가한다.
그의 경영 철학은 크게 ‘업의 본질에 대한 재정의’, ‘아키텍처 중심의 브랜드 관리’, ‘실용주의 기반의 조직 혁신’이라는 세 축으로 요약된다.
금융을 넘어 테크 기업으로, 업의 본질을 재정의하다
정 부회장의 경영 철학은 금융업을 단순한 자금 중개업이 아닌 데이터 기반의 테크 산업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는 2015년 ‘디지털 현대카드’를 선언하며 기술을 단순한 지원 수단이 아닌 기업의 핵심 정체성으로 삼았다. 기존 서비스를 디지털로 옮기는 방식이 아니라 기획 단계부터 디지털 환경을 전제로 서비스를 설계하는 ‘현대카드만의 페이스’를 강조한 것이다.
2015년 출시된 ‘락앤리밋(Lock & Limit)’과 ‘가상카드번호’ 서비스는 이러한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사용자가 결제 기능을 직접 잠그거나 해제할 수 있도록 설계한 이 서비스들은 출시 이후 10년 가까이 디지털 환경에서 보안과 편의를 동시에 제공하며 활용되고 있다.
현대카드는 2016년 알고리즘 전문 조직을 신설하며 데이터 전략에서도 차별화를 시도했다. 무조건적인 데이터 수집보다 목적에 맞는 데이터 선별과 핵심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내는 해석과 활용에 집중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초개인화 서비스로 이어졌다. 정 부회장은 2019년 IBM THINK 기조연설에서 초개인화(Super-Personalization) 비전을 제시했고, 이후 현대카드는 데이터 레이크 구축과 인공지능·머신러닝 기술 고도화에 집중했다. 그 결과 고객 행동과 성향을 구조화한 ‘태그(Tag)’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구현하는 AI 플랫폼 ‘유니버스(UNIVERSE)’를 개발했다.
유니버스는 현대카드가 자체 기술로 개발한 데이터 사이언스 기반 고객 초개인화 AI 플랫폼이다. 이 플랫폼은 태그로 구조화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마케팅 목적에 맞는 최적의 고객 조합을 추천하며 기존 방식 대비 약 6배 높은 효율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술력은 해외 시장에서도 성과를 냈다. 현대카드는 2024년 10월 일본 빅3 카드사인 SMCC(Sumitomo Mitsui Card Company)에 유니버스를 수백억 원 규모로 수출했다. 일본 금융시장의 엄격한 기술 검증을 6개월간 거친 뒤 PoC(기술 실증)를 통해 도입이 결정된 사례다. SMCC는 이 플랫폼을 활용해 가맹점 마케팅 고도화뿐 아니라 여신 업무, 고객 상담, 부정사용 감지 등 다양한 영역에서 AI 활용을 확대할 계획이다. 현대카드는 이를 시작으로 북미와 유럽 등 글로벌 시장으로 AI 테크 비즈니스를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상품 ‘에디션’ 전략, 인지 장벽 낮추고 고객 유입 확대
정 부회장은 브랜딩을 단순한 마케팅 활동이 아닌 정교한 구조 설계 과정으로 이해한다. 현대카드의 상품 전략 역시 이러한 ‘아키텍처 중심’ 사고에서 출발한다.
현대카드는 상품을 반복적으로 단종하고 새로 출시하는 대신 기존 브랜드를 유지하면서 시대 변화에 맞게 발전시키는 ‘에디션(Edition)’ 전략을 사용한다. M·X·Z와 같은 기존 브랜드를 유지하면서 세대별로 상품을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이는 고객이 상품 체계를 쉽게 이해하도록 해 인지 장벽을 낮추는 효과를 만든다.
또한 2024년 ‘아키텍트 오브 체인지(Architect of Change)’ 전략을 통해 카드 상품의 복잡한 적립률과 할인 구조를 단순화하고 체감도가 높은 혜택 중심으로 재편했다. 고객이 혜택을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전략은 실제 시장 반응으로 이어졌다. 소비 영역별 혜택을 직관적으로 구분한 ‘알파벳 카드’는 출시 한 달 만에 1만 장이 발급됐다. 직관적 포트폴리오 관리는 기존 시장에서 간과되었던 ‘틈새’ 역시 발견하게 했다. 연회비 5~15만 원대라는 ‘프리미엄과 매스(Mass)의 중간 지대’를 발견하고 출시한 ‘부티크’ 시리즈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포화된 카드 시장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며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상품 전략을 바탕으로 현대카드 회원 수는 2022년 말 1104만 명에서 2025년 1267만 명으로 3년 만에 160만 명 이상 증가했다. 현대카드는 2024년 10월부터 2025년 12월까지 1년 3개월 연속 신용판매 취급액 업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PLCC와 애플페이로 구축한 데이터 동맹
현대카드는 데이터 기반 생태계 구축에서도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PLCC(상업자 표시 신용카드) 전략이다.
현대카드는 유통·플랫폼 등 각 산업의 대표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데이터 협업 구조를 구축했다. 유니버스 플랫폼을 통해 파트너사 비즈니스 문제를 함께 해결하면서 단순 제휴를 넘어 데이터 동맹 형태의 생태계를 만들었다. 파트너사 간 마케팅 협업 건수는 초기 10건 수준에서 현재 연간 3000건 이상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국내 유일의 애플페이 파트너십과 해외 결제 서비스 경쟁력이 더해지면서 해외 신용판매액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025년 상반기 해외 신용판매액은 전년 동기 대비 1718억 원 증가하며 2년 연속 업계 1위를 기록했다.
정 부회장의 경영 철학은 조직 문화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형식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실용주의를 강조한다. 그는 ‘Zero PPT’ 캠페인을 통해 보고용 프레젠테이션을 줄이고 메신저나 전화 중심의 신속한 보고 체계를 도입했다.
의사결정 속도 역시 빠르다. 팀원이 올린 결재 문서에 대한 CEO의 평균 결재 시간이 7시간일 정도로 신속한 의사결정과 효율적인 프로세스로 본질에 집중하는 기업문화를 추구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인사 역시 학력이나 성별보다 성과와 역량 중심으로 운영된다고 밝혔다. 그 결과 여성 임원 비율 40%와 젊은 리더층 확대라는 조직 변화가 나타났다.
업의 본질 재정의, 브랜드 아키텍처 전략, 실용주의 조직 혁신으로 이어지는 정 부회장의 경영 철학은 현대카드가 불황 속에서도 4년 연속 성장세를 이어가는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업계 불황 속, 4년 연속 실적 성장
현대카드의 시스템 경영 성과는 재무 지표로 입증되고 있다. 당기순이익은 2022년 2530억 원에서 2025년 3503억 원으로 증가하며 3년 만에 약 40%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특히 지난해 연간 순이익이 전년 대비 10.7% 증가하며, 최초로 당기순이익 기준 업계 3위를 기록했다.
이번 성과는 손익뿐만 아니라 회원수, 해외 신용판매액, 월 평균 이용액 등 전 영역에 걸쳐 고른 성장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카드사의 본업 경쟁력을 보여주는 연간 신용판매취급액(개인·법인)은 전년 대비 6.2% 증가한 176조4952억원을 기록했다. 2024년 10월 이후 지난해 12월까지 1년 3개월 연속으로 업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업권 전반에서 연체율이 상승하는 상황에서도 현대카드는 선제적인 리스크 관리로 안정성을 유지했다. 지난해 12월 기준 연체율(1개월 이상 대환 미상환 금액 미포함)은 직전 분기와 동일한 0.79%로 집계됐으며, 5년 연속 0%대 연체율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상품과 데이터사이언스를 기반으로 한 경쟁력과 함께 건전성 중심의 경영으로 양적 질적 성장을 이뤄나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문화경제 김예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