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의 반발을 뒤로 하고 지난 해 12월 국회를 우여곡절 끝에 통과한 비정규직법이 올해 7월 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시행될 비정규직법은 ‘정규직과 동일업무를 하는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금지’, ‘기간제와 단시간 노동자의 보호’, ‘파견법 개정’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노동부는 비정규직법이 ‘노동 유연화를 유지하면서도 비정규직의 남발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해 기업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일하는 빈곤층’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모두 고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 시행을 앞둔 시점에서 노동현장에서 벌써부터 벌어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사태와 외주용역화를 통한 간접고용은 비정규직법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는 데 얼마나 무기력하고 소극적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비정규직 괴담’이란 우려섞인 말까지 나돌고 있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는 취지로 만든 비정규직법이 오히려 비정규직을 고착화하고 합법화하는 면죄부로 전락하고 있는 양상이다. ■ 해고나 외주용역이나… 어딜가도 낭떠러지 사례.1 = 법원행정처는 2006년 12월 27일 계약직 민간 경비원 40여명에 대해 재계약 거부 방침을 밝혔다. 법원은 공익근무요원으로 경비대를 새로 창설한다는 이유를 들어 설명하지만 비정규직 입법에 따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회피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려는 것. 또한 법원행정처는 직접고용 비정규직이던 운전사도 용역으로 전환하려는 계획을 밝혔다. 사례.2 = 한국철도공사는 새마을호 승무원을 직접고용 비정규직에서 외주화할 계획을 밝혔다. 앞서 지난 해 11월 16일 철도공사는 새마을호 승무원 100여명에 대해 ‘KTX관광레저’로 전적을 강요하는 공문을 보냈다. 철도공사는 공문을 통해 “12월 31일자로 계약이 끝나면 새마을호 승무원으로 계약하지 않을 예정이므로 KTX 관광레저로 옮길 것”이라고 밝혔다. 사례.3 = 한국은행은 2006년 10월 계약직 운전기사 5명에게 재계약 없이 용역으로 전환하겠다고 통보했다. 서울대병원도 2006년 8월 31일 단체협상에서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 240명을 단계적으로 정규직화하겠다고 합의했지만, 같은 해 12월 31일 근무일수가 2년이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계약종료를 통보했다. 공공기관과 공기업이 나서 비정규직 기간제 노동자와 계약해지를 하거나 외주화하는 움직임은 최근 민간기업으로까지 확산되는 양상이다. 이랜드그룹 계열사인 뉴코아 킴스클럽은 5월 9일 계산원을 전원해고하고 이들을 모두 용역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뉴코아 측은 지난해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10개월 계약을 해오다 이를 6개월, 3개월로 단축했다. 올해는 1개월짜리 계약과 ‘0개월 계약’이라는 방식까지 동원했다. 언제든지 계약해지를 하기 위한 회사 측 방침에 노동자들은 계약해지나 간접고용으로 대변되는 고용불안에 무방비상태로 전락한 것이다. 뉴코아 측의 방침은 7월 시행될 비정규직법의 핵심 조항인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금지와 정규직 전환 의무를 회피하려는 방침으로 해석된다. 뉴코아 관계자는 “비정규직 관련 경총 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실제 뉴코아 킴스클럽의 계산원 업무직에 일하는 노동자들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율은 5:5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법이 시행되면 동일업무에 종사하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차별을 시정해야할 의무가 주어진다. 기간제법은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전원 정규직화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상응하는 금전적 보상을 해야한다고 정하고 있다. 비정규직법 도입 이전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량해고가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현실로 나타났다.
홈에버는 4월말 인건비 절감을 위해 주차·보안·카트·시설·청소미화 간접고용 용역노동자 500여명을 미리 해고했다. ‘18개월 이상 근무시 계약기간 만료를 이유로 계약해지할 수 없다’는 단체협상 조항까지 어기면서 해고를 단행한 것이다. 홈에버는 5월에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계약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잇달아 계약해지 통보를 하고 있다. 비정규직보호법이 간접고용 형태와 해고라는 낭떠러지로 비정규직을 내몰고 있는 양상이다.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은 “이번 뉴코아 발표는 이미 경총이 밝힌 지침을 통한 법 악용사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며 “즉 뉴코아를 시작으로 업종과 지역을 떠나 유사한 사례가 우후죽순처럼 튀어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 경총, “직접고용은 무슨…그냥 벌금으로 때우세요” 비정규직 관련 3법 가운데 ‘기간제 및 단시간 노동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아래 기간제법)’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기간제 노동자의 계약기간을 2년으로 정하고 이 기간이 끝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손쉬운 고용 구조조정을 통해 비정규직 규모를 계속적으로 늘려온 기업들의 대처는 이미 비정규직법의 차별금지 조항과 정규직전환 의무의 틈새를 공략해 이를 기업에 ‘교육하고 예습’하는 수준에 달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지난 1월 비정규직법의 허점을 이용해 법망을 피해갈 수 있는 요령을 담은 75쪽 분량의 ‘비정규직 법률 및 인력관리 체크 포인트’ 책자를 제작해 400여 산하 기업에 배포했다. 경총은 이 책자에서 기간제법과 관련해 기간제 노동자를 2년 사용한 후 일정 기간 경과 뒤 동일 노동자를 다시 고용하는 ‘반복교체’ 지침을 권고했다. 또한 기간제 노동자 예외조항인 신규채용 시 고령노동자와 전문직 노동자의 사용을 적극 권장했다. 경총은 이어 “직접고용 의무를 적극 회피하고 과태료로 해결하라”며 “직접고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건당 3천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되지만 내지 않아도 추가 과태료가 없으니 직접고용보다 과태료를 활용할 것”이라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노동자를 ‘2년짜리 부품’이나 ‘3천만원’보다 못한 물건으로 취급하는 노동 유연화 맹신도들의 광기를 보는 듯하다. 노동계는 이같은 일을 이미 예견해 그동안 수차례 정부와 정치권을 상대로 우려의 뜻을 분명히 밝혀왔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소장 김성희)가 지난 3월 발표한 ‘비정규법안의 비정규직 보호 효과에 대한 평가와 대안’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기간제가 상대적으로 명시적 계약고용이므로 제도화의 효과가 있고 상대적으로 임금조건도 나아 진전일 수 있지만, 직접고용 기간제에서 간접고용으로 전환될 경우 직접적 사용자 책임을 회피해 해당 노동자의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고 전망했다. 또한 김성희 소장은 올 3월 보고서에서 “정규직화는 전체 기간제의 최대 4.5%수준인 11만 5천명이지만 더 많은 전체 기간제의 6%는 계약해지가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또한 당장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하는 일자리의 경우에도 일단 기간제로 뽑고 2년 계약직으로 쓰는 일도 예상된다고 우려섞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 재계 입장만 충실히 반영한 ‘노동부 비정규직법 시행령’ 노동부가 기간제 예외조항과 파견대상 업종을 대폭 확대한 비정규법 시행령(안)을 5월 17일 확정했다. 이와 관련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지난달 19일 노동부가 입법예고한 비정규법 시행령(안)에서도 후퇴한 ‘개악’이라며 일제히 강력 반발했다. 노동부 비정규법 시행령안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노동부는 17일 규제심사위원회를 열어 지난달 19일 입법예고안에서 언급한 16개 전문직 종사자에서 경영지도사, 기술지도사, 사업용 조종사, 운송용 조종사, 자가용 조종사, 항공교통관제사, 항공기관사, 항공사, 한약업사, 한약조제사 등 10개 전문직 종사자를 포함한 총 26개의 직종을 정규직 전환 예외 대상으로 확정했다. ‘비정규직 법이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노동부와 보수양당, 한국노총의 주장이 2년 동안 비정규직을 쓸 경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아래 기간제법)’이 예외조항 확대로 무력해진 것이다. 특히 이번 기간제법 예외조항에는 대학 조교 등도 포함돼 논란이 일고 있다. 무기계약화 의무를 피하고 인건비 절감 차원에서 악용됐던 ‘조교들의 2년 주기 계약해지’도 합법적인 정당성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에 대해 노동부는 대학교 조교를 “직업의 성격이 낮고 업무 자체가 특정한 사용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또한 노동부는 파견허용 업종을 기존 138개 업무에서 4월 19일 입법예고 당시 187개로 늘린데 이어 콜센터(고객상담 사무원), 주차장 관리원, 우편물 집배원, 신문배달원, 물품배달원, 수하물 운반원, 계기 검침원 등 10개를 추가했다. 노동계는 이같은 파견업종 확대로 인한 기존 정규직노동자의 대량해고와 비정규직 전환으로 인한 고용불안과 처우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 비정규직, 고착화 그리고 합리화되나 민주노총은 “앞으로 창출될 서비스 신규일자리를 모두 비정규직으로 채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콜센터산업정보연구소에 따르면 고객상담원으로 일하는 인원이 2002년 25만명에서 올해 40만명으로 늘어났다. 우체국 노동자와 택배 노동자들도 파견제법이 허용하는 파견허용업종에 포함돼 이들의 고용불안도 전망된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사용자들의 힘에 굴복해 비정규노동자 확산에 앞장서고 있고 비정규보호법이 아닌 비정규 확산법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규모를 860만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는 기업이 인건비 절감을 이유로 비정규직을 남용했기 때문”이라며 “비정규직 남용을 막기 위해 사용사유제한이 필요함에도 전문자격자라는 이유로 핵심업무나 상시업무 가릴 것 없이 모두 기간제 사용을 허용함으로써 합법적으로 비정규직 사용을 확대할 수 있게 됐다”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 비정규직철폐운동본부는 “노동부는 자본부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며 “노동부의 기간제 예외조항 확대, 파견범위 확대 시행령 개악안을 보면 비정규확산법인 모법을 뛰어넘는 독소조항으로 가득 차 있어 또다시 자본의 하수인이 되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고 노동부를 강력 비판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도 “결국 파견대상은 대폭 확대하고 정규직 전환대상은 대폭 축소하여 대한민국 사용자들에게 정규직을 쓰면 바보라는 사회적 풍토를 공고히 자리잡게 하는 것이 이번 법의 목표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권 의원은 “사회적 위기를 불러올 비정규직 관련 시행령은 폐기되어야 하며 현행 비정규직 법안은 전면 재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비정규법안이 저지되지 않으면 비정규직은 정말 우리사회 고용의 정상형태로 상식화되며 비정규직의 현재 규모는 우리사회의 합리적 비정규 규모로 공인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비정규직의 차별은 점진적으로 개선을 기대하며 불합리성을 시정해 나가면서 대부분 인정해야할 합리적인 차별이 된다”며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는 문제인식은 어디로 가고 비정규직 존재와 차별에 대한 합리화만 남았는가”라고 말했다. -오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