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강력한 실세 총리’로 불렸던 이해찬 전 총리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전 총리를 대선 후보로 낙점했다’는 설(說)부터,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 전 총리의 킹메이커를 자임할 것’이라는 설까지, 여의도 정가는 온통 이 전 총리의 일거수일투족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이 전 총리의 대선 출마설이 어느 정도 기정사실화 하면서 가장 긴장한 것은 이른바 ‘범여권’ 내의 대선주자들이 아니라, 한나라당이다. 이 전 총리는 총리 재직 당시 한나라당을 향해 “차떼기 정당”이라고 정면으로 공격한 바 있다. 한나라당의 입장에서는 가장 두려운 상대는 바로 자신들과 정면으로 공방을 주고받는 정치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러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전 총리는 이들 두 명의 전·현직 대통령을 차례로 ‘모신’ 사람이다.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신임이 남다르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유시민의 복귀와 거의 동시에 나온 이 전 총리의 대선 출마설 자타가 공인하는 노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참여정부와 함께 임기를 마치고 싶다”는 자신의 평소 지론을 뒤집고 열린우리당으로 복귀하는 시점도 예사롭지 않다. 사실 유 전 장관이 여의도로 복귀하기 이전부터 정치권에서는 노 대통령이 이 전 총리를 대선 후보로 점찍었다는 ‘설 아닌 설’이 무게감 있게 나돌았다. 노 대통령의 비서관 출신인 이화영 열린우리당 의원도 “이 전 총리가 대선후보가 됐으면 좋겠다”며 한동안 김혁규 의원을 돕던 행보를 중단했고, 노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리는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도 “노 대통령은 유 전 장관이 대선후보로 나서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이런 시점에서 이 전 총리 주변에서는 “이 전 총리가 대선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특히 지난 5월 22일에는 이 전 총리가 김종률·김형주·백원우·서갑원·윤호중·이화영·한병도 등 이른바 ‘친노 직계’ 의원들과 회동을 가진 직후부터 참석자들로부터 “이 전 총리가 대선에 출마하려는 것 같다”는 발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복수의 참석자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 전 총리는 이날, 최근 열린우리당 상황과 통합에 대한 복안, 대선 국면에서의 역할 등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대선 출마 여부와 관련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친노 직계 의원들의 ‘이해찬 띄우기’에 ‘적극적인 역할론’을 거론하면서 화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참석자들이 한 목소리로 “당은 물론 민주개혁 진영이 어려운데 시대적 소명에 답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 전 총리의 대선 관련 결단을 촉구하자, 그는 “20년 정치역정을 겪으면서 한국정치의 현실에 책임을 느낀다. 개혁세력의 분열로 한국 정치사에서 개혁의 축이 사라지는 죄악을 범하지 말자”고 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전 총리는 특히 “"민주화세력은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며 “선진국 진입을 앞두고 연말 대선이 있다. 한반도 평화, 민주주의 성숙, 사회적 대통합, 국가 경쟁력 강화 등 ‘4대 국가경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역할이나 노력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전 총리는 또 “참여정부를 계승하지 못하면 한국사회에 미래는 없다. 참여정부가 실패했다고 하는 어떤 정당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한 참석자는 “이 전 총리가 사실상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한 것 같다”며 “남북관계 개선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만큼 남북관계가 급반전되면 이 전 총리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실 이 전 총리는 올 들어 남북문제에 집중하며 열린우리당 386의원들에게 ‘정치과외’를 하며 본격적인 정치적 행보를 재개한 바 있다. 이후 한나라당의 참패로 끝난 4·25 재보궐 선거 이후 ‘절망이 아닌 희망’을 확신한 친노 진영에서 이 전 총리가 대선 후보군 중 한 명으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대선 주자들인 정동영·김근태·천정배 등의 반발을 낳은 것은 불문가지다. ‘범여권 대통합’에 대한 이 전 총리의 발걸음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박상천 체제가 들어선 이후 민주당에 내에서는 ‘소통합론자’인 박 대표와 한화갑 전 대표로 상징되는 ‘동교동계’ 사이의 심각한 반목이 있어왔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뜻대로” 발언이었다. 이 전 총리는 이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동교동계의 맏형’이라 할 수 있는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과 최근 출소한 박지원 전 비서실장과 잇따라 접촉하며, ‘범여권 대통합’에 속도감을 더했다. 게다가 이 전 총리는 북한을 방문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최승철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김영대 민족화해협의회 위원장 등을 만나 남한 방문을 요청했고, 평화협정 체결문제 등을 심도 있게 논의했고, 관심을 모은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교감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한나라당의 거품이 빠지면서 가장 강력하게 한나라당과 대립각을 세워온 이 전 총리의 존재감이 그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끈끈한 인연’은 이 전 총리를 ‘포스트 노무현 급’으로 격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의 ‘호남 지분’과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 지분’을 삼투압 시킬 수 있는 최상의 카드로 친노 진영 내에서 손꼽히고 있다. ■ 한나라당의 ‘악몽’, 이해찬 이 전 총리는 1988년 5·18청문회 당시 노무현 의원과 더불어 냉철하고 논리적인 질문으로 국민적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떠오른 소위 ‘청문회스타’ 출신이다. 그는 또한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기획을 맡았던 여권의 대표적인 선거기획통이다. 정치권에서는 이 전 총리의 맞수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윤여준 전 한나라당 의원 밖에 없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건국 이래 가장 권한이 강했던’ 실세 총리이기도 했다. 이 전 총리 이전의 국무총리들이 ‘대독 총리’라는 비아냥을 들은 것과는 달리, 그는 뛰어난 논리와 체계적인 시스템 구축, 그리고 강력한 추진력이 밑바탕이 된 카리스마로 총리에 임명되자마자 순식간에 관료 조직을 장악했다. 그는 또 보수정당인 한나라당과의 대립각을 가장 확실하게 세운 정치인이기도 하다. 이 전 총리는 총리 재임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이 자신을 비난할 때마다 전직 총리들의 고유언어인 “유념하겠다”는 말 대신, “한나라당은 차떼기 정당”이라거나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가 퇴보한다”는 말을 한나라당 의원들 면전에서 거침없이 해왔다. 한나라당이 이 전 총리의 대선 출마설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이 전 총리가 ‘대선출마’ 가능성을 시사하자, “이 전 총리는 언감생심 꿈꿀 것을 꿈꾸기 바란다”며 강하게 비난했었다. 나경원 대변인 명의의 이 논평에서 한나라당은 “이 전 총리가 ‘대선출마에 생각이 없지만 불가피하게 요구한다면 나라도 나가서 흥행에 도움이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것은 불쏘시개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용꿈을 꾸고 있음이 분명하다”며 이 전 총리를 격렬히 비난했다. 나 대변인은 “이 전 총리는 국민들에게 싸움꾼, 안하무인, 오만방자의 대명사가 돼 있다. 지도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국정파탄의 주범인 이 전 총리는 자중해야 한다”며, “이 전 총리는 민주당까지 기피하는 국정실패, 좌편향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나라를 만신창이로 만든 주범 중에 주범”이라고 혹평했다. 한나라당은 “이 전 총리에게는 ‘나라도’ 나서겠다는 용기보다는 ‘나만은’ 자중하고 반성하겠다는 태도가 필요하다”며 “올망졸망한 여권 대선후보군 중에 한 사람이 늘어났다는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전 총리는 이러한 한나라당의 비난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의 한 대선주자 진영의 관계자는 “이 전 총리의 직선적인 성격에 비춰볼 때, 한나라당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며, “이 전 총리가 한나라당의 비난에 신경 쓸 분이라면 애초 대선 얘기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함경도 속담을 빌리자면, ‘동네 개가 짖어도 황소는 제 갈 길을 간다’는 식이다. ■ 노 대통령은 이 전 총리에게 마음을 두고 있을까 이 전 총리의 거침없는 대선 행보가 시작되자, 정치권의 또 하나 관심사는 ‘과연 노무현 대통령이 이 전 총리를 마음에 두고 있느냐’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 전 총리의 재임 시절 골프 파문이나 대정부질문 답변태도 등을 문제 삼으며 ‘주기적으로’ 그의 해임을 요구해온 한나라당의 주장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 이 전 총리는 열린우리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시민 의원을 보건복지부 장관에 추천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때 나온 말이 ‘노-해-민’이다. 이 말은 노무현 대통령과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 그리고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을 한 데 묶어 부르는 것으로 이들 3인 간의 정치적 유대관계가 매우 높은 결속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노 대통령과의 관계가 남다른 이 전 총리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범여권의 대선주자 진영에서 급부상하자, 노 대통령의 ‘진심’에 범여권 주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은 이에 대한 일체의 추측을 거부한다. 다시 말해, “특정인에 대한 ‘노심’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노 대통령은 특정인을 경선 과정에서 도와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단지 지금 자천타천으로 후보군에 진입해 있는 여러 인물들 중, 당내 경선이나 범여권 통합경선 등의 방식을 통해 ‘살아남는’ 사람들은 대선에서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최근 정치권 외곽에서 친노 세력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참여정부평가포럼의 한 핵심 인사는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성과와 차기 국정운영의 아젠다를 이어갈 수 있는 인물을 원할 수 있고, 자신과 확실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이 전 총리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특정인을 대권주자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의 한 측근도 최근, “물론 원하는 후보가 잘되면 좋은 일이지만 ‘노심’이 작용해서는 안 되고, 작용할 수도 없다”며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이 특정인을 낙점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주장도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그런 추측 자체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또 그간 노 대통령은 “대세를 거역하지 않겠다”고 말해왔고, 이 전 총리의 보좌관 출신인 유시민 의원은 이 전 총리에 대해 “대통령이 되면 국정운영을 무척 잘하실 분”이라면서도 “일 잘하는 사람이 꼭 뽑히는 건 아니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친노 진영 의원들의 ‘역할 분담론’에 관한 얘기도 여의도 정가에서 심심치 않게 들린다. 즉, A의원이 한명숙 전 총리를 돕고, B의원이 이 전 총리를 도우며, 또 C의원은 김혁규 의원을 돕는다는 식이다. 한 마디로, 범여권 후보 선출에서 친노 그룹이 주도권을 행사함과 동시에, 흥행에서도 바람몰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한을 행사한 실세 총리’에서 ‘유력 대선 후보’로 순식간에 뛰어오른 이해찬 전 총리. 그가 가진 최고의 장점인 카리스마와 명확한 논리가 범여권 진영 내에서 ‘태풍’을 불러일으킬지, 아니면 ‘정치권 전체의 쓰나미’를 불러올지 이래저래 이 전 총리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반응은 뜨겁다. -유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