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른바 ‘훈수정치’에 대한 한나라당과 범여권 일각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은 “내 한 몸 편하자고 가만히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하고 있다”며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계속할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31일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지금은 대통합이 대의고 명분”이라고 열린우리당 등이 추진하고 있는 범여권 대통합에 힘을 실어줬다. ■“민주개혁 진영 사분오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뜻을 잘 받드는 것이다. 대통령선거에 있어 직접 후보로 나서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무대를 만드는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다”며 “그런 측면에서 정세균 당의장의 대통합 노력을 잘 알고 있고, 사심 없이 최선을 다한다면 국민들이 평가해줄 것이다.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한 “지도자는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현실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할 때는 몸을 던지는 것도 요구된다”며 “정해진 시점,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데, 그 시점까지 대통합을 위한 최선의 방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되,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더라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차선의 방법을 현실화시킬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을 향한 한나라당 등의 비난에 대해서 김 전 대통령은 “내가 50년 동안 몸담았던 민주개혁 진영이 현재 사분오열 되어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국민들이 많은 실망과 좌절을 겪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만 있겠느냐”며 “나를 지지해준 국민들을 생각하며 많은 책임을 느끼고 있고, 내 한 몸 편하자고 가만히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하고 있다”고 말해 정치적 행보를 그만둘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에 앞서 김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25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혁규 의원과 만나 “국민은 대선에서 여야 1대 1 대결을 바란다”고 했고, 다음 날에는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현재 한나라당 후보들의 지지가 높은 것은 ‘쏠림’이 아니라 여권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허공에 대고 혼자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라며 범여권의 단결을 재차 촉구한 바 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정 전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통합논의가 지지부진한 범여권의 현 상황을 답답해하면서 “누군가 한 사람이 나서서 정국을 리드하거나 사생결단을 해서 돌파해야 한다”며 ‘범여권의 대통합에 있어 꼬인 실타래를 풀기위해 특정 인사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한 것으로 전해져 이른바 ‘김심’ 논란이 불거졌다. 김 전 대통령은 이어 “한나라당(대선주자들)은 지방을 돌며 국민들을 만나고 있는데 이쪽(대선주자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시간만 보내고 있다”며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고 위기감을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범여권 대통합의 현실적 방법론과 관련해서도 “단일정당을 구성해야 하고 그게 안 될 경우 연합체라도 구성해야 한다”며 “둘 다 안 되면 대선은 하나마나한 구도”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훈수정치’보다는 ‘아전인수’ 식 해석이 문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훈수정치’는 그 폭이 넓다. 김 전 대통령은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 외에도, 김한길 중도개혁통합신당 대표, 박상천 민주당 대표,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이해찬 전 국무총리 등을 잇달아 만나 현실 정치와 범여권 대통합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고, 올 연말 대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뜻도 시사했다. 단, 대선의 경우는 범여권이 단일 대오로 뭉치거나 최소한 정책연합 등으로 사실상 단일 후보를 내는 경우에만 도울 것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어법은 흔히 말하는 ‘에둘러 말하는’ 형식이다. 상대방에 대한 비판보다는 덕담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보니, 김 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범여권의 각 주자 간 혹은 정파 간에 해석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아전인수’ 식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강조하거나 해석한다는 의미다. 정작 문제는 ‘훈수정치’가 아닌, ‘해석 정치’ 혹은 ‘아전인수 정치’가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지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김 전 대통령 측은 DJ의 발언이 본의와 다르게 전달되는 것에 대해 몇 번씩이나 해명을 하기도 했다. 그 좋은 예가 지난 5월 29일 김 전 대통령을 예방한 박상천 민주당 대표다. 박 대표는 이날 “김 전 대통령이 (소통합을) 잘하라고 했다”며 “특정 인사를 배척하지 말라는 말씀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마치 김 전 대통령이 박 대표의 ‘소통합’과 ‘특정 인사 배제’에 동의했다는 투였다. 이러한 박 대표의 발언이 보도되자, 당황한 김 전 대통령 측은 “대통합을 강조했고, (특정 인사를) 배척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두 차례나 했다”고 박 대표의 발언을 부인했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DJ 예방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정 전 의장과 김 전 대통령의 만남에 자리를 함께 한 김현미 열린우리당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이 범여권 통합에 대해 ‘사생결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모두 고무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 측은 “(사생결단 발언은) 북핵 실험 당시를 회고하며 한 말인데, 와전됐다”며 불쾌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DJ를 정치판의 전면으로 부른 것은 우리들의 모자람 때문”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범여권 내에서조차 각 정파들의 DJ 예방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장성민 전 의원은 “지역주의, 앵벌이 문고리 정치”라고 각 정파들이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을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비난했고, 김효석 민주당 의원 역시 “DJ를 정치판의 전면으로 부른 것은 우리들의 모자람 때문”이라며 자성을 촉구했다. 반면 김 전 대통령의 현실 정치 개입에 대한 중단 요구 역시 범여권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조순형 민주당 의원은 29일 “김 전 대통령의 최근 일련의 발언은 전직 대통령의 처신으로서 상식선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며 “여야 정파를 초월해 초당적 위치에서 국민통합에 기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김 전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조 의원은 “교훈이나 충고는 가능하지만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실정치에 직접개입해서는 안 된다”면서 “우리나라에서 전직 대통령은 현실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관행이 정착돼 가는데 그걸 지금 깨뜨려서는 안 된다”며 “내년에도 전직 대통령이 한 분이 생기는데 전직 대통령마다 이렇게 현실정치에 개입하면 어떻게 되겠냐”고 김 전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류근찬 국민중심당 대변인도 29일 “DJ가 훈수하고 있는 양당 구도, 1:1 구도란 또다시 영남을 기반으로 한 한나라당과 호남을 기반으로 한 범여권의 대결로 가자는 것”이라며 “국민의 선택권을 제약하는 양당구도는 반민주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 DJ가 뛰니, YS도 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현실 정치 개입이 본격화되자, 덩달아 바빠진 사람이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맞수’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오는 연말 대선 국면에서 범여권과 한나라당 전선이 형성될 것이 확실시 되면서, 두 사람은 양 진영의 키워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최근 범여권 통합과 남북문제 등에 대해 조언을 계속하자, “정권이 바뀌면 죽는 줄 알고 발악한다”며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YS는 또한 지난 4월 10일 북한민주화위원회 창립대회에 참석해서 “김대중·노무현 두 사람이 김정일에게 엄청난 돈을 퍼줘 북한이 핵실험을 하게하고 온 나라를 망쳐놓았다”면서 “올해 대선에서 김정일과 김대중·노무현 세력에게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하고 차기 대통령은 무엇보다 김대중, 노무현이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이 나라를 깨끗하게 청소해 놔야 한다”고 김 전 대통령을 극렬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게다가 4·25 재보선 직후인 지난 5월 1일 대전에서 당선된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는 “지난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10년은 이상한 10년이고 잃어버린 10년이었다”며 “새로운 정권이 탄생해야 하는데 새 정권이 탄생하려면 산고를 겪어야 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창당의 주역이자 신한국당 총재를 지냈던 전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날 심 대표가 “요즘 보수를 자처하는 한나라당이 왔다 갔다 해서 국민이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다”며 “김 전 대통령께서 정치하실 때는 선명성이 뚜렷했었는데 지금은 흐려진 것 같아 아쉽다”고 자신을 칭송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지금 야당은 고민도 안하는 것 같다”며 “국민들이 정치인 머리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결국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지난 1987년 맞붙었던 대선의 연장선으로 올 연말 대선을 의식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한나라당은 역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훈수정치’에 대해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전 대통령이 한국 정치에서 가지는 막강한 영향력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데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라는 한나라당 내의 특정 세력에 경도돼 있는데 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특정 주자가 아닌, ‘향후 나서게 될 범여권의 단일 후보’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이어서 그 폭과 깊이가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지난 5월 27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근 행보에 대해 “국민의 염원을 무시하는 훈수정치”라며, “아무리 훈수를 둬봐야 모래알처럼 흩어진 범여권 주자들이 쉽게 뭉치지 못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나 대변인은 또한 “대권고지를 두고 경쟁하는 정치인들이 원로의 훈수 한 마디에 자신의 욕망을 접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치9단의 자격이 없다”며, “한나라당이 혼자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고 했는데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뒷골목 주먹질에 비유하는 것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답답한 마음이야 이해를 하지만 무능한 좌파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들의 일치단결된 여론”이라며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국민들의 염원을 무시하는 발언은 삼가 바란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 행보는 그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계속될 전망이다. 지리멸렬한 대통합 논의와 이명박·박근혜를 일거에 뛰어넘을 수 있는 범여권 대선 주자가 보이지 않는데다가, 현실적으로 충청과 호남을 잇는 이른바 ‘서부 벨트 복원’에 대한 범여권의 열망이 김 전 대통령을 현실 정치의 세계로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9단’·‘한국 현대 정치사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고, 더구나 존경할만한 정치인이 별로 없는 한국 정치의 현실에서 우리 정치의 거목(巨木)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유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