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화가 종함(鍾涵)은 오승우의 작업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만의 독특한 창작방식인데, 오랜 시간을 들여 한 가지 주제의 연작-시리즈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오승우의 작업은 종함의 언급대로 하나의 주제를 오랫동안 다루다가 다음 주제로 옮겨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같은 독특한 작업 태도는 이미 데뷔 시절부터 발견된다. 1957년부터 1960년에 이르는 국전 특선 작품의 주제가 한결같이 불전과 불사였다는 점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법당 내부>(1957), <고찰>(1958), <팔상전>(1959), <금강계단>(1960) 등 네 차례의 국전 특선작이 불전과 불사를 다루었다는 사실은 그의 최근에 이르는 한 주제에 대한 연작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네 차례의 연속 특선을 통해 추천작가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이후에도 불전과 불사의 주제는 간단없이 이어져오고 있는 편이다. 아마도 1990년대의 <동양의 원형> 시리즈는 그 뿌리가 불전과 불사의 연작에서 이미 배태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 시작된 산(山) 그림도 10년 이상 다루었으며, 이후 민속 시리즈도 오랜 시간을 두고 천착해온 바 있다. 한 주제에 매달린다는 것은 주제를 에워싼 문화적 배경, 그것의 내밀한 안의 정서를 집요하게 파악해가는 방법정신의 치열함을 반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백산(百山)전>은 전국의 명산을 주제로 한 시리즈로서 단순히 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산으로 에워싸인 조국 강산의 내밀한 속살을 감동적으로 기록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상으로서의 산이 아니라 산으로 대변되는 이 땅의 기운을 자기 나름으로 체화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의 연속에서 <동양의 원형>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백산전>이 침중한 색채와 안으로 파고드는 힘에 떠받쳐 있었다면, <동양의 원형>은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색채의 난무와 무르익어 철철 녹아 흐르는 색채의 기운에 의해 감동적인 물결을 이루었던 사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1년 간 북경에 체류하면서 완성해내었다는 중국 고전 건축의 장대한 시리즈는 화가로서의 그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전시였다고 생각된다. 주로 사원과 궁전이 중심이 된 <동양의 원형>은 거대한 중원(中原)의 문명과 찬란한 역사를 유감없이 기록해준 작업으로, 그것은 어떤 기록보다도 더욱 감흥을 자아낸 것이었다. 그는 중국에만 머물지 않고 주변 국가의 빛났던 문명의 정화(精華)들을 추적해가면서 동양의 문화가 서양의 문화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득해 갔다고 피력하고 있다. 정신문화를 대변하는 종교 건축과 세속권력의 중심이랄 수 있는 궁전 건축은 동양을 이해하는 데 더 없이 귀중한 모델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새롭게 시도한 또 하나의 시리즈는 <십장생도>이다. 산이나 고적은 구체적인 실상을 답파하면서 구현해낸 것임에 비해, 십장생도는 일종의 관념의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을 통해 구현된 동양인의 유토피아적 관념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산이나 고적에 비해 다분히 추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장생도는 그 어떤 구체적인 대상보다도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염원의 상징이다. 불변하는 자연과 오래 산다는 동·식물은 유한한 인간의 삶에 대응된 기원의 대상으로 상정된 것이고, 그러기에 동양인들에게 영원의 관념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십장생도는 귀천을 초월해서 동양인이면 누구나 염원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궁전에서부터 일반 서민의 안방에 이르기까지 장식되고 있는 터이다. 특히 조선조 후기 민간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었던 민화의 주제로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기도 하였다. 십장생도는 그림의 기술적 수준과는 관계없이 강한 상징성 때문에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와서는 쉽게 소재로서 다루어지고 있지 못한 편이다. 관념의 유산이요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화가로선 운보 김기창이 민화풍의 <바보산수> 시리즈에서 십장생을 다룬 것이 유일하지 않나 생각된다. 유화로서 이 주제를 다룬 것은 오승우가 처음이다. 200년대 들어서면서 그는 십장생이란 주제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보에 따르면 65년인가 국전 출품작 가운데 <십장생도>가 있는 것을 참작컨대, 작가의 관심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잠재되어온 것임이 틀림없다. 주제의 기호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가 추적한 주제가 한결같이 정신의 뿌리, 문화의 원형에 가 닿아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산 시리즈가 그렇고, 동양의 원형 및 민속적 내용물이 그렇다. 십장생도 역시 말할 나위도 없다. <십장생도>는 자연과 동식물이 구체적인 대상으로 현현된다는 점에서 구상적인 영역에 속하지만, 관념의 사상 체계를 띠고 나타났을 때 추상이 된다는 묘한 역설을 내장한다. 사슴과 학과 거북은 현실적인 동물이지만, 그것들이 특수한 사상 체계의 공간 속에 흡입되었을 때는 단순한 동물로서의 위상을 탈각하고 영원 관명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들은 현실적 공간이 아닌 신비의 영역에 노니는 영적 존재가 된다. <백산>이나 <동양의 원형>에서와 같이 <십장생도> 역시 거대한 스케일과 장대한 구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동양의 원형>에서와 같이 보여주었던 넘치는 활력과 강렬한 원색의 조화로 인해 화면은 감동적인 물결로 넘쳐난다. 붓질은 힘차면서도 때로 거칠다. 경쾌한 속도감이 이미지를 부단히 앞질러 화면을 누빈다. 생을 노래 부르는 환희의 가락이 간단없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십장생도>는 하나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주제이지만, 그의 화면에 등장되었을 때는 새로운 인식과 해석이라는 독특한 계승의 차원을 지니게 된다. 단순한 과거의 유물을 주제화한 것이 아니라, 주제 속에 내장된 가치 체계를 오늘에 되살리는 작업이야말로 올바른 전통의 계승이며, 오승우의 작업은 실로 그러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해가는 도정이라 할 수 있다. <미술평론가·오광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