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가 5월 24일부터 열린다. 조용필은 4월 16일 서울 중구 프라자호텔에서 콘서트 관련 제작 발표회를 갖고 데뷔 40년을 맞는 소감과 이번 콘서트의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가 가진 파워는 대단했다. 그를 보기 위해 찾은 취재진이 제작보고회 홀(hall)을 가득 메웠다. 좌석이 없는 기자들은 바닥에 앉거나 다른 이의 자리를 몰래 도둑질(?)하는 등 체면 따윈 제쳐놓고 ‘조용필의 영광’을 확인하고자 했다. “오빠, 사랑해요.” 조용필의 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온 해외 팬들과 아줌마 팬들이 회견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입구 바깥에서 ‘영원한 오빠’ 조용필을 열렬히 응원했다. 50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한 아줌마 팬은 몰래 잠입을 시도하다 진행요원에게 발각돼 나가면서 울상을 짓기도 했다. 환갑이 내일 모레인 조용필에게 ‘오빠’라며 젊은 사람이 듣기에는 다소 민망한 호칭을 서슴지 않는 중년 팬들. 하지만, 그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빅뱅’ 등 소위 잘나가는 국내 아이돌 그룹들에게 이처럼 평생을 함께 가고 같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듬을 수 있는 팬이 있을까? 조용필은 “해외 팬들이 많이 왔네요. 기분이 어떠세요?”라는 질문에, “그..그러게요. 어떻게들 알고 왔는지”라며, 쑥스러워 하면서도 기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20주년부터 35주년까지 5년을 주기로 공연을 해왔군요. 35주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 지났습니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 콘서트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저 조용필을 사랑해주는 팬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뭐 40주년 공연이라고 하지만, 저에게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40주년에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수많은 가수들이 스타로 도약하고 다시 쇠잔하게 사라져가는 대중음악계에 스타를 뛰어 넘는 슈퍼스타, 그리고 시대의 거장으로 무게 추를 옮기고 있는 조용필은 지금도 자신의 대표곡을 만들고 싶어 하는 불멸의 현역이다. “이렇게 크게 쓰지 말라고 했건만….” 조용필은 큰 공연 포스터의 정중앙을 꽉 채운 ‘40주년 기념공연’이라는 문구에 괜히 화풀이를 했다. 그는 이어 “데뷔 50주년을 맞은 패티 김 선배에 비하면, 저는 아직 어린애죠”라고 말해 회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번 콘서트는 음악인생 40년 동안 흔들림 없던 조용필의 세월을 종합하는 무대이다. 서구 팝을 맹종하던 시기에 록, 블루스·소울·포크·스탠더드 팝·전통음악 등 거의 모든 현존하는 장르가 조용필이라는 한 명의 아티스트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으로 집약되었다.
■ “음악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40년 음악 자취 조용필은 1968년 록 그룹 ‘애트킨즈’를 결성해 미8군 무대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로도 다양한 그룹을 결성해 다양한 음악 장르를 시도해 왔다. 1980년 3월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명곡이 담긴 1집 앨범을 시작으로 2003년 9월에 낸 18집까지 그는 수많은 히트곡을 제조했고, 대한민국의 음악사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조용필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후 한 번도 그 자리를 내려온 적이 없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국민가수’ ‘슈퍼스타’ ‘신화’ 등의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한류’라는 명칭이 탄생하기도 훨씬 이전, 일본과의 관계가 냉랭했던 80년대에 조용필은 일본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저력을 보여준 바 있다. 1987년에는 일본 최고의 인기가수들만이 출연할 수 있다는 NHK-TV의 ‘홍백가합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출연하였으며 이후 1990년까지 4년 연속 출연했다. 또한, 1988년에는 당시 미수교 상태였던 중공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베이징 장성호텔’에서 공연했다. 조용필은 최초, 최고, 최다의 기록을 가진 가수로도 유명하다. 그는 국내 최초로 100만 장의 앨범을 판매했고, 국내가수 최초로 일본 골든디스크상 수상,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공연, 국내 대중가요 사상 최초로 ‘친구여’가 교과서 수록곡에 오르는 업적을 이뤘다. 또한, KBS 가요대상 ‘20세기 최고가수상’을 수상했으며, 잠실 주경기장 사상 최고의 유료관객(4만5,000명)을 기록했다. 조용필의 ‘최다·최장’의 기록을 보면, 록 밴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 1980년부터 현재까지 국내 최장수 록 밴드로 위대한 업적을 기록 중이며, 방송사 선정 최다 ‘최고인기가수상’ 수상(총 11회), 단독 공연 최다 관객 기록(10만 명, 1993년 해운대비치 콘서트), 일본 내 한국가수 최다 음반판매량(공식집계 600만 장), 일본 내 최다 리메이크 곡(‘돌아와요 부산항에’가 30여 명의 일본 가수에게 리메이크 됨)이 있다. 후배가수 신해철은 대선배 조용필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연구해 보지만, 항상 그 끝에는 조용필 선배님이 있었다. 가왕(歌王)께서 다 해놓아 내가 할 게 없다. 난 그저 가왕의 음악을 흉내 낸 수준에 불과하다. 한때 우리나라에 대중가수라고는 ‘조용필’ 밖에 없다는 착각을 일으키던 시절이 있었다.” 조용필은 “음악은 조용필에게 어떤 존재이며,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짧지만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대신했다. “음악은 그냥 내 인생. 그 이상은 없다.” ■ 이전 콘서트와 다르다…‘The history 킬리만자로의 표범’ 공연 타이틀인 ‘The history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조용필의 수많은 노래 가운데서도 자신의 삶과 철학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곡이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1985년 발표된 이 곡은 당시 20~30대였던 남자들에게는 인생의 지표 같았던 노래였다. 또한, 조용필 자신의 인생을 가장 잘 표현한 곡이다. 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세상의 유혹에 담합하지 않고 고독한 길을 걸어온 조용필의 모습은 노래의 내용 그 자체이다. 이번 공연은 무대를 세우고 장비를 설치하는데 무려 2주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공사를 했다. 록 밴드 ‘위대한 탄생’의 최희선 씨는 “많은 공연을 마치면 항상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절대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초기 조용필의 사운드를 살려 최대한 밴드 음악 사운드를 만들려고 합니다”라며 콘서트에 임하는 각오를 들려줬다. 조용필 콘서트에서는 이번 공연을 위해 3D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으며,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캐릭터화한 영상이 흐를 예정이다. 또, 무대 뒷면과 좌우에 40년의 세월을 형상화한 40m의 거대한 영상 타워를 세워 40년 간의 ‘조용필과 팬’들의 다양한 모습과 사회상을 시시각각 표현한다. 서울 잠실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첫 스타트를 끊는 이번 콘서트 투어는 대전·대구·창원·울산·광주 등 국내 20여 개 이상의 도시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8월에는 미국 2개 도시에서 공연된다. 마지막 무대는 12월 13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