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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주지 않는 부드러운 집행

‘참 아름다운 동행’ 운영자 기원섭 법원집행관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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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87호 박성훈⁄ 2008.10.07 16:03:34

“서초동에서 봅시다. 아니, 계신 곳이 어디죠? 아, 그럼 여의도나 영등포 근처에서 보면 되겠네요. 기자님 괜찮은 시간이 언제인가요?” “이제 연락을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잘 아는 곳이 한 군데 있는데, 북창동에 있는 참치집에서 봅시다.” 어렵사리 만난 법원 집행관 기원섭 씨(60).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의 연락처는 용케 알아냈다. 하지만, 만나는 장소를 잡는 일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약속장소 바뀌기가 이 동네에서 옆 동네 정도로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이쪽 구에서 저쪽 구로 넘어간다. 채권자의 강제집행 신청이나 법원의 명도집행 명령이 언제, 어느 곳으로 떨어질 지 모르는 집행관의 업무특성 때문이다. 때때로 일하는 현장이 바뀌다 보니, 기 씨 스스로도 몇 시에 어느 장소에서 일을 하고 있을지 예측하기 힘들다. 기 씨는 “대신, 만나는 시간을 기자가 편한 대로 맞춰주겠다”며 미안한 말을 마무리 짓는다. 편안한 대화 중에도 그의 비공개 사연 하나 듣기가 쉽지 않았다. 구체적인 설명이 기사화되면 사건 당사자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미 한 일간지의 기사로 언론의 영향력을 뼈 속까지 체험한 기 씨는 말 한마디도 조심하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무던히도 말을 아끼던 그의 태도만큼이나 기자 역시 조심스레 그의 이야기를 글로 엮어본다. (기자주) TV 드라마를 보면 흔히 법원 집행관이란 사람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족속인 듯 비쳐지곤 한다. 구둣발로 기세 등등하게 집에 쳐들어가 살림살이에 차압 딱지를 붙여 대는 사람들. 채무자들이 울며불며 애원해도 아랑곳 않고 가재도구를 밖으로 끄집어 내는 사람들. 아마 드라마 속 주인공이 채무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 이번엔 눈을 돌려 집행관들을 주인공으로 세워보자. 명도 처리될 집 앞에서 자신을 막아서는 채무자를 바라보는 집행관들. 명도 처리할 가구 집기를 지목하는 채권자를 바라보는 집행관들. 주인공 자리에 선 그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갈등의 양 극단에 서 있는 채권자와 채무자를 보고 있을까? 기계처럼 차가운 마음일까, 질화로처럼 따뜻한 인정일까? 법원집행관 기원섭 씨가 운영자로 활동하는 ‘참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카페에 가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 씨는 법원집행관으로 만난 사건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 카페 게시글에 콩트 형식으로 풀어냈다. 둘도 없이 막역한 사이였다가 단돈 45만 원으로 원수지간이 된 친구, 1000만 원 빌려주고 500만 원만 돌려받자 나머지도 몽땅 받아 내겠다고 달려드는 채권자, 남편 몰래 사채를 썼다가 가게를 저당 잡혀 남편에게 두들겨 맞던 여자 등등…굳이 드라마에 나오는 악덕 사채업자와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그가 만난 군상은 다양하다. 그는 이 같은 사람들의 곁에 서서 방관하기도 하고, 말없이 강제집행을 하기도 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두 사람 사이의 다툼을 말리기도 했다. 필요할 경우에는 설득을 하기도 했다. “집행관이 오만 직업 중 최고”라며 집행관 찬가로 입을 뗀 기 씨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있어요. 줄 사람이랑 받을 사람. 악감정이 부풀대로 부푼 그 사람들 사이에 내가 끼어들잖아. 채무자는 ‘내가 안 갚는 게 아니고 가난해서 못 갚는데 이럴 수 있느냐’ 하고, 채권자는 ‘나는 너한테 돈을 못 받아 가난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결국 둘 다 어렵단 말이야. 그 가운데 집행관이 들어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마음을 달래주는 부분도 있단 말이죠.” ■ ‘사람냄새’ 풍기는 법원집행관 카페는 원래 검찰 수사관 시절의 인연과 법원 집행관 동료들, 그의 문경중학교 동창 등 지인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였는데, 한 유력 일간지의 ‘집행관’ 관련 보도 이후로 카페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어 어느새 회원 수 1000명을 바라보는 카페가 됐다고 한다. 기원섭 씨는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를 ‘동행’이라고 부른다. 그가 ‘동행’들과 공유하는 이야기는 그의 업무 일상을 담은 ‘집행관 일지’와 검찰 수사관으로서의 공직생활을 기록한 ‘수사관 일지’ 만이 아니다. 여정을 통해 느낀 감상을 담은 기행문이 있고, 생활 속에서 떠오르는 영감을 적은 일종의 수필도 게재돼 있다. 물론, 그의 지인들이 남긴 글들과 함께. 이 같은 글들은 서슬 퍼런 집행관들에게서 무취(無臭)함이 아닌 ‘사람냄새’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 중 나그네의 발걸음을 붙잡는 ‘사람냄새’ 풍기는 글은 단연 기 씨가 작성한 ‘지영이에게 띄우는 편지’를 꼽을 수 있다. 12포인트에 장장 247쪽 분량의 원고로 된 이 편지는 기 씨가 그의 장남 재윤 씨와 며느리 황지영 씨가 결혼하기 전 가족으로 맞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을 담기 위해 쓴 것이다. 일부러 100권 한정판(?)의 단행본으로 제작한 이 편지는 오직 며느리 황 씨와 지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고 한다. 이 책에는 시아버지로서의 집행관뿐 아니라, 청년·아버지·남편 그리고 한 남자로서의 집행관 모습이 담겨 있다. 이에 덧붙여, 차남 재중 씨의 미지의 며느리에게 보내는 ‘아기야’라는 제하의 편지도 그의 범상치 않은 감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참 솔직한(집행관으로서는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성격의 기원섭 씨. 그가 카페에다 이 같은 일지나 습작들을 남기기 시작한 것도 자신과 타인에게 보다 솔직해지고 싶어서이다. “우리 큰 며느리도 가끔 카페에 놀러 오는데도 나는 어릴 적 거짓말한 것까지 글로 쓰는 사람이거든요. 어릴 적, 동생이 내가 거짓말을 해 두들겨맞는데도 나서지 않았을 정도로 내가 불의한 사람이야. 나 스스로를 열지 않으면 내 행동들이 다 거짓이거든요. 집행관 일지나 여행기를 쓰다 보니까 옛날에는 참 때묻게 살았더라고. 옛날 조무래기 때에는 어렵다 보니, 내자신의 과거에 게으르고, 나태하고, 불의에 영합하던 부분이 후회스럽더라고요.” 그도 원래부터 자신에게 솔직하기를 쉬이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화 ‘I’m Sam’을 보고, 며느리 황지영 씨를 집안에 들이면서 스스로 묻은 때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고. 그러면서, 그는 기왕이면 눈물이 담긴 ‘부드러운 집행’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는 카페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이 참 많아요. 그 감정들을 나 혼자 향유해선 안 돼요. 내가 여행을 가서 루벤스의 그림 한 장을 보더라도 눈물 방울 하나하나에 담긴 루벤스의 정성을 본단 말이죠. 루벤스가 특별히 찍어 놓은 여인의 눈물에서 온기가 전해오는 것이죠. 그런 감동이 일고 눈물이 나면, 이 감동을 20~30대들에게 전해줘야 할 필요가 있는 거죠. 그 감동을 먼저 느낀 수사관이 눈물 담긴 수사를 한단 말이죠. 또, 집행을 하더라도 쫓아내는 과정에서 상처받지 않게 하는 법을 알게 되는 거죠”라고 말했다. ■ “벼랑에 선 사람들 대하기란…” 물론, 집행관이 ‘착하게’ 명도집행이나 강제명령을 수행할 만한 환경이 갖춰진 경우는 거의 없다. 채무관계가 법원에서 강제집행 명령을 내릴 정도라면, 이미 채무자와 채권자 간의 갈등은 ‘갈 데까지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 집행관은 두 이해관계의 양측을 “벼랑 끝에 선 사람”이라고 부른다. “성질이 좋지 않은 채무자(법원의 강제집행 명령을 당하는 자의 총칭)도 많아요. 채권·채무자가 서로 밀고 당기다 결말이 안 나면 집행관이 나서는데, 이미 감정대립이 심해져 있지. 그런데, 꼭 채권자는 집행관을 앞세워 뺏으려 하고,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빌면 되는데, 애먼 집행관에게 저항한단 말야. 집행관은 채권자나 판사의 신청이나 명령이 있으며 반드시 (집행을) 해줘야 하는데, 채무자가 막는다고 멈추면, 법은 어떻게 되죠?” 이날에는 특히 점심 먹고 나서부터 힘을 뺐다. 이날 다녀온 집은 채무자가 출입문을 산소용접기로 용접을 해 놓았다. 그래서 문을 여는 데에만 한참 애를 먹었다고 한다. 열쇠수리공을 불러 문 따는 비용에 용접 뜯는 비용까지 전부 채무자에게 청구되는데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악의적 집행면탈시에는 형사처벌을 받거든요. 근데 그걸 떠나서, 못 먹는 감 찔러보는 심보도 아니고, 어차피 집행당할 집에 용접은 뭣하려고 하겠어요? 용접 뜯고 가져가라는 것 아니에요? 용접 한방한방에서 (고생이나 더 시키자는) 채무자의 마음이 읽히잖아요.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자는 것이죠.” 집행과정에서 채무자에게 얻어맞는 일도 다반사이다. 이 경우, 공무집행방해죄가 성립되지만, 대부분의 집행관들은 “그냥 맞아주고 만다”고 한다. 기원섭 집행관은 깨진 소주병을 손에 든 채무자가 집행현장을 지키고 서 있던 아찔한 순간을 회상하기도 했다. “엄청 무섭고 신경 쓰이죠. 안 그래도 속상한 사람이 혹시 나나 동료들을 찌르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나죠.” 한번은 아침에 사전조사를 위해 한 집에 찾아갔다가 머리에 라면 세례를 받은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게 라면을 퍼부은 채무자가 온전치 못한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일용할 아침식사인 라면을 아무렇게나 버려도 될 정도로 형편이 넉넉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어찌나 마음이 짠하고 속이 상했는지, 겉으로는 못 울고 속으로 울었어요”라고 말했다. 기 집행관은 이때 느낀 감정을 계기로 집행관 일지를 쓰게 됐다고 한다. ■ 임대아파트 집행 땐 눈물 흘리기도 험한 얘기 말고 짠한 에피소드가 듣고 싶어 “그래도 한 가지 이야기만…” 부탁하자 기 씨는 한 임대 아파트에 명도집행을 갔을 당시를 떠올리며 얘기를 꺼냈다. 눈두덩도 살짝 붉어졌다. “문을 두드렸는데, 사람이 없어요. 아무 기척이 없으니까, 안에서 문을 안 열어주면 열쇠를 강제로 따게 돼 있거든요. 열쇠 수리공을 부르면 5만 원인데. 따려고 하는데 안에서 소리가 딸까닥 소리가 나더라고. 문을 열고 나니까 암에 걸린 여자가 저 안에서 기어오고 있어. 머리를 빡빡 깎아서 남자 아이인줄 알았지. 난 이미 들어왔는데, 여태 기어 오는 중이야. 문은 열어야 되겠는데, 힘이 없으니 주저 앉아 기어 오고 있는 거예요. 이런 장면을 내가 그렇게 서서 보고 있어요. 그러면서, 내가 뭘 생각했겠어요. 집행관은 뭐 기계인가? 눈물 안 나나? 내가 얼마 들어갈지 뻔히 아는데. 열쇠 땄으니 5만 원 들어갔지. 그 여자한테 또 짐 지워지잖아. 채권자는 열쇠 딴 비용 또 청구하게 돼 있거든요. 집행도 끝난 게 아니라고요. 보니까 곧 죽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도 집행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기어 오는 동안에 대답할 힘도 없어 대답 못해서 기어 오는 도중에 우리가 따고 들어갔단 말이에요. 이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나, 대책이 없어요. 그냥 돈 주고 싶어. 그래도 줄 수 없잖아. 나야 신문에라도 났지, 매번 그런 상황에 돈 주면 집행관들은 다 거지 돼. 그런 아픈 부분이 있다고. 그런 일들이 숱하게 있어.” 유독 휠체어를 탄 사람이 많은 임대아파트촌. 이처럼 임대아파트에서 길바닥에 나앉게 되는 기초생활 수급자급의 사람들은 당장에 갈 곳이 없다. 본의 아니게 이들을 밖으로 쫓아낸 격이 된 기 씨는 “임대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은 집행돼 나오면 어디 가야 하느냔 말인지 대책이 없다”며 오지랖 넓은(?) 고민을 해본다. “임대보조금을 압류당해서 쫓겨나는 것인데, 임대아파트라고 안 쫓아낼 수도 없는 일이에요. 임대주택 들어오려는 사람이 줄을 섰어. 빨리 안 내보내면 뒤에 줄 선 사람이 들고 일어설 판인데.” 기 씨는 임대 보조금을 압류당한 ‘불쌍한’ 서민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과거 종사했던 수사관에서 집행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무는 결국 “설득과 설복의 과정”이라고 기원섭 집행관은 강조했다. 수사관이 수사활동을 벌이거나 증거수집 등의 활동을 통해 기소자가 피의사실을 자백하게 하는 과정도 엄밀히 설득의 과정이다. 이 설득의 과정에 따라 양형이나 정상 참작도 결정이 된다. 채무관계에 있어서도, 채권·채무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강압이 아니라 설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기 씨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제 나름의 잣대”라며, 이게 편견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집행관은 나쁘다’는 편견 말이다. 기 씨는 이 설득의 과정을 통해 “서로 간 마음에서 정성과 진심이 우러나게 된다”며 이것이 곧 휴머니티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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