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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의 집’에 대학생들 몰린다

취업하느라 피 뽑고, 등록금 버느라 피 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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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89호 박성훈⁄ 2008.10.21 15:14:42

베트남 하노이의 중앙혈액병원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생계와 자녀들의 교육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매혈(賣血)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하노이 교외나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피 350ml당 12.5달러 정도씩 받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피를 상습적으로 뽑아 파는 ‘전문 매혈자’들과, 건강한 사람들을 찾아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고 자신에게 피를 팔 것을 제안하는 ‘매혈 브로커’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중국 광둥성에는 아예 매혈자가 집단 거주하는 마을이 있어 세상에 충격을 준 적이 있다. 매혈촌이라 불리는 광둥성의 한 도시에는 매혈을 직업으로 한 혈노(血奴, 피노예)가 500~600명 가량 집단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1개월에 10여 차례씩 성내 지역을 돌며 피를 팔고 있다. 개중에는 15~16차례씩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들이 모두 매혈조직에 소속돼 있다는 사실이다. 매혈조직은 두목과 행동대장으로 구성돼 있고, 각 행동대장들은 10~20명의 혈노로부터 피값을 착취해 한 달에 6000~4만 위안(약 960만 원)의 수입을 낸다고 한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횡행하는 매혈 행태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황에서 일어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양국 모두 피를 파는 사람들은 극빈층이거나 빈곤지역의 주민인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 산업화 시절 매혈 성행하다 99년 금지 우리나라에도 매혈이 성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경제가 발달한 지금 피를 팔아 돈을 구한다는 발상은 우리에게 지극히 생소한 이야기이지만, 60~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매혈의 상처를 확인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기에 매혈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 나가는 이들이 많았고, 심지어 과도한 매혈로 몸이 쇠약해져 목숨을 잃는 사례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통상, 헌혈은 2개월에 1번씩 해야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지만, 피 팔아 ‘입에 풀칠해야 하는’입장에서는 2개월이라는 긴(?) 세월을 견디기 어렵다. 또한, 당시만 하더라도 오늘날처럼 헌혈이라는 개념이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매혈을 통하여 부족한 혈액을 수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사회 풍경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 급속도의 성장가도를 자랑하던 경제와 보조를 함께하며 헌혈문화도 점차 확산되었다. 따라서 매혈의 필요성도 줄어들었고, 더 이상 매혈로 인한 부작용도 방치할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과도한 혈액 추출에 따른 건강 쇠약도 문제지만, 혈액을 매개로 한 감염이 더 쉽게 이루어지고, ‘매혈 앵벌이’가 생기는 부작용도 문제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 1990년대 말에는 ‘혈액관리법’이 제정되면서, 결국 문화 차원을 넘어 법적으로 매혈행위를 금지하게 된다. ■ 대학생 헌혈, 군인 헌혈보다 많아 최근 취업 전형에서 헌혈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기업들이 늘면서 헌혈의 집에 청년 구직자들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올해에는 대학생 헌혈이 ‘군인 헌혈’을 제치고 헌혈기여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일부 대기업이 자원봉사 경력에 헌혈을 포함하자 ‘대학생 헌혈’이 급증한 것이다. ‘피를 팔아’ 직장을 구하는 셈이다. 그 덕에, 8월 이후 혈액 보유량이 크게 떨어졌던 예년과 달리, 올해 8~9월의 혈액보유 수준은 최근 5년 동안 가장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혈액보유량은 6.6일분으로, 지난해 동기 2.5일분에 비해 2배 이상 상승했다. 지난해 9월 0.4일분까지 떨어져 비상이 걸렸던 농축적혈구 A형 예비량도 적정량인 7일분에 근접한 6.6일분을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혈액 수급의 안정세는 헌혈자 수가 급증한데 따른 것이다. 올 들어 9월 말까지 누적 헌혈자 수는 173만1361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155만6428명에 비해 무려 11%가 늘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대학생 헌혈자수가 지난해의 42만8995명에서 무려 7만 명 가까이 늘어난 49만1961명에 달했다는 점이다. 군인과 회사원·공무원 헌혈자도 늘었지만, 증가폭에서는 대학생이 압도적이어서 전체 증가분의 약 35%를 차지했다. 대학생 등 청년 헌혈자가 증가한 것은 최근 취업 전형에서 헌혈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기업이 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장기 경기침체와 미국발 금융위기 등의 여파로 어느 때보다 극심한 취업난이 매년 되풀이되는 혈액수급난 해소에 보탬이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동부화재·KTF 등 취업용 봉사활동에 헌혈 포함 실제로 동부화재, KTF, CJ, 한국조폐공사, 한국관광공사, 국민연금관리공단 등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 헌혈자를 우대하고 있다. 헌혈을 사회봉사활동에 포함시켜, 헌혈증서를 내면 1장 당 봉사활동 2시간을 인정, 서류전형에서 최고 5%의 가산점을 주는 식이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고객들과 접촉이 많은 분야일수록 사회봉사활동 반영도가 높다”며 “예전보다 입사지원 서류에 헌혈 기록을 첨부하는 구직자들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 대학원생은 “취업전선을 뚫는데 토익과 학점뿐만 아니라 사회봉사활동도 중요해졌다”며 “대다수 구직자들은 봉사활동을 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헌혈을 통해 봉사활동 점수를 따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헌혈의 집 관계자도 “과거에도 대학생의 헌혈기여도가 높긴 했지만 올해는 더 눈에 띄게 대학생들이 찾아오고 있다”며 “취업에 필요한 봉사활동 점수도 얻고 무료로 건강검진을 받으려는 대학생들이 많아지면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청년층의 헌혈 증가는 긍정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헌혈증서가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의 하나로 비쳐지는 현실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구로디지털단지 헌혈의 집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준혁(23) 씨는 “가끔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실제로 헌혈증이 취업에 도움이 되는지 문의를 해온다”면서 “헌혈이 취업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모습에 씁쓸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 매혈 등 생동성 알바생도 급증 또한,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생물학적 동등성 실험(생동성)’에 피실험자로 참가하는 아르바이트가 유행하기도 한다. 인터넷 사이트에는 “2~3일만 투자하면 수십만 원을 쉽게 벌 수 있다”는 추천 글이 돌기도 하는데, 모두 의학실험의 피실험자 아르바이트이다. 여기에 대학생들이 몰리는 이유는 당장의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주거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피를 뽑아서라도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려는 대학생들이 급증하면서 ‘생동성’ 알바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 이상의 신청서가 접수되고 있고,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대학생들이 몰리면서 서버가 마비되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한다. 고지혈증 치료제 등의 의약품 테스트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의료실험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사람이 워낙 많아 피실험자로 채택되면 ‘행운아’로 불릴 정도라고 한다. ‘생물학적 동등성 실험’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혈액병리검사·혈액화학검사·오줌검사 등 다양한 건강검진을 통과해야 한다. 개중에는 30~40대 중장년층 지원자도 있다고 한다. 보통 실험에서 채혈하는 양은 120㎖ 정도이고, 수고비는 15만 원이다. 2박 3일 동안 실험에 참여한 대학생 한모 씨는 “공복 상태에서 약을 먹고 매시간 채혈을 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며 “생동성 실험이 식약청의 승인을 받아 안전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심리적 스트레스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단기간에 비교적 많은 돈을 벌려는 사람들에게는 생동성 알바가 더없이 매력적”이라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대학생들이 생동성 알바에 많이 몰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중국의 작가 위화가 쓴 ‘허삼관 매혈기(許三觀 賣血記)’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허삼관은 피를 판 뒤 반년 동안 일해도 벌 수 없는 거금 35위안을 손에 쥐고 영양 보충을 하기 위해 돼지간볶음 한 접시와 황주(黃酒)를 먹는다. 그리고 그 돈으로 결혼을 하고, 세 아들을 얻는다. 이후 기근이 들어 가족들이 57일 동안 옥수수죽만 먹자, 허삼관은 다시 피를 판다. 세월이 흘러 큰아들이 간염에 걸리자, 허삼관은 큰아들을 상하이의 병원에 보내기 위해 매혈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병원비를 벌기 위해 상하이에 이르는 동안 거쳐가는 도시마다 피를 판다.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피를 판 허삼관은 돼지간볶음과 황주 생각이 간절한 나머지 또 피를 팔려 하지만, 결국 거절당하고 만다. 실험에 참가한 적이 있는 대학생 이슬기 씨는 한 언론에 게재한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중국소설 ‘허삼관 매혈기’의 허삼관은 피를 처음 뽑은 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 잔을 먹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 잔을 사 먹기 위해 피를 뽑는다. 나 역시 허삼관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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