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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홍역’에 비친 우리나라 교육열의 단상

‘대학만 잘 가면 된다’는 풍토가 전국을 ‘수능광풍’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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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93호 박성훈⁄ 2008.11.18 23:02:36

한국이 한차례 수능이라는 큰 행사를 치렀다. 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13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된 듯한 모습이다. 사무실과 모든 가게는 시험 보러 가는 학생들이 러시아워 교통체증에 시달리지 않도록 평소보다 1시간 늦은 10시에 문을 연다. 수험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학교는 휴교를 한다. 또한, 영어 듣기평가가 있는 시간에는 비행기들의 이착륙이 금지되고, 입국하는 비행기들도 이 시간만큼은 고도 1만 피트 상공에서 대기하도록 관제탑의 지시를 받는다. 한국전력은 4000명의 기술인력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정전사태에 대비해 1000곳 가량의 시험장 전선을 점검하면서 대기한다. 59만 명이 시험을 치른 올해에도 시험이 끝난 직후 언론은 시험지 문답을 정리해 내보낸다. 시험 당일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는 각종 사업들이 번창하고 있으며, 시험 전 신문과 TV는 수험생들의 학습 태도와 음식물 섭취 등에 대한 팁을 제공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9월부터 서울 근교의 사찰과 교회는 수험생 부모들의 100일 기도를 위한 각종 이벤트가 열린다. 수험생 가정이 있는 집에서는 TV를 시청할 때도 헤드폰을 낀다. 수능철만 되면 되풀이되는 기현상(?)에 대해 미국의 저명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2일 “한국은 대입 수능 날만 되면 전국이 시험을 치른다”며 1면과 15면에서 대서특필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런 현상에 대해 “한국인들에게 대입시험은 사회적 신분을 끌어올릴 수 있는 보루로 인식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험 한번 잘 치르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대기업이나 정부의 취업이 용이하게 되는 발판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물론 외국인들의 시각에서는 매우 기이한 장면일 수 있겠지만, 전국이 숨을 죽이는 이 같은 모습은 매년 수학능력 시험날마다 연출되는 장면들이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익숙하기까지 하다. 저널의 보도대로 ‘시험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미역국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등의 미신에 근거한 금기까지 있는 상황은 대학입학 하나에 인생의 판로가 바뀌는 우리나라의 사회구조에 기인한다. 우리나라 학부모의 허리를 휘게 만드는 고액과외 등 사교육 열풍, 조기 해외유학, 일반 학교의 야간자율학습 등 제반의 모든 교육들은 모두 수학능력시험, 곧 대입을 향해 집중돼 있다. ■ “언론도 한국 입시지옥에 책임있다” 수능철이 되면 수능 관련 기사들이 신문과 TV에 봇물을 이룬다. 수험생들의 학습 집중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 마지막 수능공부 방법, 수험생의 건강관리법·영양관리 등 유형도 여러 가지이다. 수능시험 당일이 되면 학교 앞에서 벌어지는 응원전과 수험생들의 시험장 입장 장면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학교 앞에 구름떼같이 몰린다. 문제의 난이도와 변별력에 대한 보도도 후속으로 이어진다. 시험이 끝나면 수능 답안 보도와 예상되는 수능 결과에 대한 보도가 따라 붙는다. 수능성적에 비관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는 매년 언론을 통해 공개돼 듣는 이로 하여금 ‘대학이 뭐길래’라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하재근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은 한 언론에 게재한 칼럼에서 “국가가 수능 이벤트에 열광하고, 언론이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는 보도만 내보내고 있으니, 국민이 대학서열 체제와 입시경쟁을 불가항력의 자연법칙처럼 느끼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언론은 때때로 과도한 입시경쟁을 탓하지만, 수능보도에 열을 올리는 한 언론도 입시지옥의 원인제공자일 수밖에 없다”고 언론의 책임도 문제 삼았다. 교육선진국으로 알려진 핀란드는 학력 경쟁력에 있어서는 세계 1위이지만 입시경쟁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 미국과 일본의 대학서열 구조도 우리나라에서처럼 능력의 순위를 줄세우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않는다. 능력의 판단기준을 학벌로 기준 삼는 우리나라의 입시풍토가 이 같은 기현상을 연출하게 한 것이다. ■ 이제는 ‘교식주’…교육도 생활 필수사항 우리나라에서는 의식주(衣食住)라는 말 대신 교식주(敎食住)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입을 거리보다 교육이 더 우선시되는 사회현상에서 불거진 말이다. 북한에서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인지 식(食)을 강조해 식의주(食衣住)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따지면 우리나라 국민이 살아가는데 교육과 먹을 거리와 집 중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교육인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이 생활의 기본 요소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얼마 전에 발표한 우열반 편성, 0교시수업 허용 등의 교육 분야가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많이 끌고 있는 것을 보면 교육문제는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중학교 1학년생이 경기도권의 동네 영어학원을 찾아 등록을 하려면 월 수강료를 39만 원씩 내야 한다. 영어수준 측정비용도 3만 원에 교재값은 별도로 나간다. 매번 IBT(Internet-based TOEFL Test)도 응시해야 한다. 수학 한 과목도 월 25만 원에 이르러, 수학·영어만 사설학원에서 교육시키려면 월 70만 원 가까이 사교육비를 들여야 한다. 서울 강남지역의 비싼 사교육비는 말할 것도 없다. 서울에서 고등학생 자녀를 두고 있는 집안의 부모들에게서는 월 100만 원에 육박하는 사교육비 때문에 힘들다는 하소연이 자주 들려온다. 자녀를 둘 이상 키우기 힘들다는 사회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데에는 이 같은 교육풍토가 한몫 했을 것이다. ■ 지필고사에 가리워진 수험생 ‘잠재력’ 지난 11월 5일 공개된 미국의 도리스 데이비스 코넬대 입학처장의 서울대 학생 선발방법에 대한 상담 결과는 여러 모로 주목된다. 데이비드 입학처장은 학생선발에서 고교 때의 성취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복잡한 입학전형을 단순화하라고 서울대에 조언했다. 그는 “학생을 선발할 때 고등학교에서 이룬 성취도를 1단계 선발 기준 및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전했다. “지원서 검토의 첫 번째 단계는 지원자의 고교 성적 평가를 포함해야 한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대학 수학능력시험 점수 등 외부 평가자료보다 고교 성적과 봉사활동 등 일선 학교에서 평가한 자료를 입학전형의 중요한 요소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다. 성취도 평가 반영, 내신 확대 등 교육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대입에서 수능 점수를 포함한 지필고사 실력을 우대하고 있다. 하지만, 사교육과 조기유학·연수로 실력 차이가 갈리는 지필고사에서 정작 중요한 학생의 품성이나 의지, 사고력과 창의력 등 잠재력이 평가받을 길은 없다. ■ ‘한국의 오바마’ 위한 입시제도 시급 수능 당일이었던 13일 세종로에서 울려 퍼진 일성은 수능에 집중된 우리나라 교육열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는 13일 오전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후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열화와 불평등을 조장하는 현행 입시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회견장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를 거부한 고교 3학년 김모 양(18)이 나와 “청소년의 삶을 황폐화하는 대학입시를 철폐하라”며 입시폐지와 대학평준화를 위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현행 교육 시스템과 학벌사회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청소년의 삶은 너무 가혹해진다. 나부터라도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오늘 실시된 수능시험을 거부했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입시경쟁으로 인해 다시는 공부하는 기계가 되고 싶지 않다”며 과도한 입시경쟁과 대학 서열화를 비판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인은 고교 시절만 해도 술과 마약에 손을 댄 문제아 학생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옥시덴탈 칼리지는 그를 학생으로 받아주었고, 명문 콜롬비아 대학은 그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해 정치외교학과에 편입시켰다. 오바마는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인권변호사·정치가에 이어 현재의 대통령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처럼, ‘오바마의 기적’은 미국 대학입학제도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학생들 중에도 미래의 ‘오바마’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의 잠재력을 키워줄 입시제도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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