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호 박성훈⁄ 2008.12.23 14:28:09
“법치주의를 표방하고 법질서의 준수와 법을 통한 분쟁해결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시민들이 법률 전문가로부터 적절한 법률 서비스를 공급받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서민들이 변호사로부터 유급 법률상담을 쉽게 받을 수 없는 이유는 경제적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는 게 많은 이들의 생각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법률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을 통한 구조활동, 변호사 단체와 변호사의 무료 법률상담 등 법률 서비스의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경제적 요인 이외에도 법률 서비스에 장애를 야기하는 요인이 지리적 근접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 변호사 사무실이 집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거나 소속 행정구역에 없어 적절한 법률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리적 근접성이 또 다른 법률 서비스 장애요인으로 부각된 가운데, 참여연대에서 의미 있는 조사보고가 발표됐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12월 11일 한국과 일본의 ‘무변촌’실태와 양국 변호사 단체의 활동을 조사해 이슈 리포트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5만5415명의 인구규모 이상 지방자치단체(시·군·특별시와 광역시의 구) 178곳을 조사해 법률사무소의 산재 여부를 따져보았다. 조사는 지난 6월 현재 국내 변호사 1인당 인구 수가 5541.5명임을 감안해 이것의 10배인 5만5415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지자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 지자체 셋 중 하나는 무변촌 이슈 리포트에서는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 3개 중 한 개 꼴로 변호사가 한 명도 없는 무변촌(無辯村)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조사대상 시·군·구 178곳 중 61곳에 등록된 변호사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에는 수도권 지역인 경기 양주시와 안성시도 포함됐다. 특히, 대구 북구(46만 명), 서울 중랑구(42만 명), 부산 북구(32만 명) , 광주 광산구(31만 명) 등 인구가 30만 명 이상인 광역시 지역에서조차 변호사가 아예 없는 것으로 확인돼 눈길을 끌었다. 변호사가 1명에 불과한 지역도 경기 남양주시와 경남 진해시·대구 동구·광주 북구 등 12곳에 이르렀다. 변호사가 전혀 없거나 1명에 불과한 지역을 합하면 73곳으로 전체의 41%에 해당한다. 해마다 변호사의 수는 늘고 있지만, 무변촌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2004년부터 올해까지 불어난 변호사는 2,565명이지만, ‘무변촌’ 딱지를 뗀 지역은 겨우 12곳에 불과했다. 변호사가 한두 명 있던 대구 북구·동해시·과천시·부산 금정구·양산시 등 5곳은 도리어 무변촌으로 전락했다. 반면, 같은 기간에 서울중앙지법 관할구역의 개업 변호사는 1,865명으로 늘어 전체의 72.7%나 차지했다. 새로 임용된 변호사들이 법률 서비스의 사각지대인 무변촌 지역이 아닌 서울 지역의 개업을 선호하는 지역적 편향성이 있다는 반증이다. 대한변호사협회는 “1000 명 수준의 사법시험 합격자를 배출하는 경우,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지역의 극심한 경쟁을 벗어나기 위하여 지방이나 고향으로 내려가는 ‘향토화’가 가속되어 무변촌이 대부분 사라질 것”으로 예측한 바 있다. 하지만, 대도시와 수도권 등 변호사가 많은 지역에만 머물려는 지역적 편향성이 변호사들 사이에 만연한 상황에서 무변촌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은 억측일 수 있다. 참여연대는 “2004년 이후 변호사가 증가해 모두 2,565명에 이르지만, 변호사 지역편중 문제는 개선이 안 되었다”며, “대한변협과 지방변호사회에 질의한 결과 교통발달과 전화 및 인터넷상담 등이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말했다. 변호사 지역편중 문제가 여전히 개선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 변협 “수요 없는 지역에 굳이 머물 필요 있나” 변호사 협회들은 무변촌 문제와 관련, 변호사가 법률 서비스 수요가 적거나 없는 지역에 굳이 상주할 필요가 있는지의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협회들은 “법률분쟁 등이 거의 없는 지역에 변호사가 개업하라고 하는 것은 부당한 요구”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고 한다. 무변촌 지역에는 소송 등 법률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대한변협은 2006년 6월 30일 “변호사가 사무소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법률 분쟁이 없는 지역에서 무조건 변호사 사무실을 개설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사업자이기도 한 변호사에게 지나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협회는 “무의촌의 경우 특별히 거리의 영향을 받지만, 무변촌의 경우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화·인터넷 등을 통해 일상적인 법적 문제에 대한 조언 또는 조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단순 비교할 수 없다”며 무변촌의 법률 서비스 공백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주장했다. 더욱이, 지원 및 지청이 곳곳에 있어 법적 수요의 공백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무변촌으로 거론되는 전남 장흥의 경우 장흥지원이 있고 지청의 관할 행정구역이 장흥군·보성군·완도군·진도군·해남군·강진군의 6개 군이었으나, 농어촌 인구감소와 인근 해남지원, 지청의 신설에 따라 완도군·진도군이 해남지원에 편입되고 보성군이 순천지원에 편입돼, 현재 장흥군과 강진군만을 관할하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지원·지청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는 참여연대가 11월 25일 질의한 ‘무변촌’ 문제에 관해 “법원 소재지에는 대부분 변호사들이 활동하고 있고, 무변촌이라 하더라도 편리한 교통수단을 이용하거나 인터넷·전화 상담 등을 통해 적절한 법률상담을 받을 수 있다”며 무변촌이 법률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협회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등이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공익 법무관을 무변촌에 파견하는 것도 무변촌의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 중의 하나로 검토할 수 있다”고 전했다. 광주지방변호사회에서는 소속 변호사들이 각 시·군의 법원을 찾아다니면서 변론을 하고, 각 시·군의 행정관청 등에서 무료 순회법률상담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협회 측은 참여연대의 ‘무변촌’ 관련 질의에 대해 “지역 법원에서는 국선변호인·소송구조 등을 통하여 법률적 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고, 광주지방변호사회에서는 지역적 편협성 등을 고려하여 소속 변호사들이 사무소의 위치와 상관없이 다른 시·군에서 변론을 해오고 있으며, 이러한 활동을 장려하고 있다”면서 광주 지역에는 ‘무변촌’이라는 개념은 의미가 없다고 일축했다. ■ 무변촌 법률 서비스 수요,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무변촌과 변호사가 한 명인 지역의 법률 서비스 수요는 결코 적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변호사가 없는 지역의 주민들이 원고 또는 피고인이 되는 민사(소액) 재판과 형사 재판의 현황을 파악한 결과, 법률 서비스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인구 5만 명의 전남 장흥군과 강진군 주민들이 당사자인 민·형사 사건은 지난 5·6월 동안에만 각각 70여 건, 30여 건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 기간, 인구 15만 명 이상이면서도 변호사가 한 명도 없는 경기도 포천시와 제주도 서귀포시의 경우에도 지역 주민이 당사자인 판결 사례가 각각 380여 건과 550여 건에 달했다. 합의나 소(訴) 취하 사례까지 포함하면 법률 서비스 수요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됐다. 참여연대는 “조사결과는 판결이 선고된 사건만을 대상으로 했고, 합의(화해) 또는 소가 취하된 민사 사건, 기소유예 사건, 가사 사건, 행정 사건은 빠져 있는 만큼, 이것들을 포함할 경우 ‘변호사 제로 지역’ 주민들이 법률 서비스를 받아야 할 상황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어 “재판까지 이르지 않는 여러 법률 서비스(상담·계약 등)도 있는 만큼, 이 수치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법률 서비스 수요의 일부분에 그치는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고 전했다. ■ 일변협, 1996년부터 무변촌 해소에 발벗고 나서 참여연대는 일본의 경우처럼 공설 법률사무소 설치, 변호사 과소 지역 변호사의 개업 비용 지원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한변호사협회와 같은 격의 일본 변호사 단체인 ‘일본변호사연합회(이하 일변련)’는 1996년 5월 24일 열린 정기총회에서 ‘변호사 과소 지역의 법률상담 체계 확립에 관한 선언(나고야 선언)’을 통해 변호사의 지역별 편중에 따른 무변촌 문제 해결에 발벗고 나섰다고 한다. 일변련은 무변촌 문제가 국민들의 법률 평등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법률 서비스 제공의 독점권을 갖고 있는 변호사와 그 단체의 긴급한 현안이라고 평가했다. 이 같은 문제인식아래 1996년 이래 지금까지 변호사의 지역별 편중(무변촌)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간의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일변련은 특히, ‘변호사 제로·원 지역’을 모두 없애고 변호사 과소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해바라기 기금’을 조성했다. 이 기금은 매년 4억 엔 정도가 조성되었으며, 2007년에는 특별회비 총액이 3억8266만 엔, 이자수입이 19만9000엔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변호사연합회는 2000년부터 6억 엔 정도의 기금을 마련해 전국 중소 도시 93개소에 공설 법률사무소를 설치했다. 그 결과, 2008년 10월 기준으로 인구 3만 명 이상의 모든 지역에 변호사가 자리 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변호사 과소 지역에 개업하는 변호사들에게도 같은 기간에 2억 엔 가까이 지원했다. 그 결과 1996년에 47곳에 달하던 일본 내 무변촌은 올해 10월 현재 모두 사라진 것으로 파악됐다. 해바라기 기금이 지원하는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미노다 케이고 변호사는 일변련의 웹사이트에 소개된 수기를 통해 “나 자신도 강하게 느끼는 것은 ‘변호사가 없는 지역에는 법률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는 “국민을 보호하는 각종 법 제도는 준비되어 있는데, 변호사가 없는 지역에서는 그것을 실현할 수단이 없어 지역 주민들이 그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부연했다. 후쿠오카 현 치쿠고 시에 있는 치쿠고 법률사무소에 근무하는 이토 슈이치 변호사도 수기를 통해 “가까운 곳에 상담할 수 있는 변호사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크다”고 전했다. 그가 근무하는 야메 지부는 변호사가 수십 명 있는 쿠루메 시와도 가깝고, 후쿠오카 시에도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으므로, 변호사와 접촉하기 어렵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참여연대는 “일본의 경우 변호사연합회 주도로 10년 간 무변촌 지원활동을 벌인 결과 해당 주민들의 법률 서비스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됐다”면서 “대한변협도 무변촌 해소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