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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2008] 2008년 불태운 촛불, 내년에는?

개인의 자발적 참여, ‘인터넷 민주주의’ 평가…민의 이반 사안 나오면 촛불 다시 일어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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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98호 박성훈⁄ 2008.12.23 15:10:01

2008년에 온 사회를 뒤집을 정도로 파장을 몰고 온 최대사건은 4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 협상으로 불거진 전국단위의 촛불집회를 들 수 있다. 서울시청 앞 청계광장에서 시작돼 전국적으로 번져간 촛불집회는 5월 말부터 한 달 반 이상 성황리에 지속되면서 연일 뉴스 첫머리를 장식했다. 촛불집회는 수십만 명의 규모도 중요하지만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국민참여 민주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는 의의를 갖는다. 민주화 운동 이후 이어지는 집회가 일부 주최 측에 의해 진행돼 왔다는 점과 대별되는 점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전 국민이 자신과 가족의 건강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일치단결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나, 경찰차를 부수고 폭력을 행사하는 등 일부 단체의 과격성이 시민들의 자발성을 희석시키고 결국 시민들의 관심에서 사안을 멀어지게 했다는 비판론도 있다. ■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100일간 투쟁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처음 열린 날은 5월 2일이다. 인터넷 카페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주최로 서울 청계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회원들과 네티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입에서 입으로, 댓글에서 댓글로 집회 관련 소식을 공유하고 모인 시민들이 연일 1만 명 이상 모였다. 이 중에는 네티즌의 주류를 이루는 교복 차림의 10대 중고교생이 대다수를 차지한 가운데, 아이를 둔 어머니, 연인 참가자, 초등학생, 직장인, 심지어 젊은 연예인 다수가 참여하는 등 구성원에서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보였다. 24일까지 정적인 야간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되던 촛불집회는 일부 군중이 청계광장에서 차로로 나서면서 도심 차로를 점거한 거리행진의 형식으로 전이됐다. 그러다 6월 1일 새벽을 기점으로 치안당국과 시위대 간에 격렬한 물리적 충돌이 연일 반복됐고, 시민과 경찰 간에 갈등이 점차로 심화되기 시작했다. 경찰은 물대포를 동원해 시위대에 무차별 진압을 강행했고, 전의경들이 집회 참가자들을 구타하는 등 강경진압 양상을 보였다. 시민 측에서도 일부 과격파들이 경찰차를 공격하고 주변 가게에 피해를 끼치는 등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현충일인 6월 6일부터 주말을 낀 8일까지 이어진 ‘72시간 릴레이 국민행동’ 집회에는 모두 15만∼40만여 명이 촛불을 들고 참여했다. 집회 참여자들은 당시 요구했던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위생조건 고시 철회에서 대운하 반대와 정권 퇴진으로 요구사항을 진전시켰다. 촛불집회의 최절정을 이룬 날은 민주화 운동의 정점이었던 6.10항쟁의 21주년인 6월 10일 집회였다. 이날 세종로에는 시민 수십만 명이 운집해 도심 일대를 가득 메웠다. 이날 집회에는 각종 시민단체 및 네티즌 카페 회원들과 대학 총학생회 등이 참여해 조직성을 띄었다. 또, 직장 부서 직원들, 친목회 등 단순 모임들의 참여도 두드러졌다. 한국을 관광하는 외국인들의 참여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특히, 경찰이 시위대의 청와대 진입을 막기 위해 세종로 이순신장군 동상 앞에 설치한 컨테이너 장벽은 대통령과 국민 간에 소통의 단절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낙인 찍혔다. 이 같은 국민의 성화에 못 이긴 이명박 대통령은 5월 22일 쇠고기 파동 관련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소홀했다”고 사과하기도 했다. 또, 6.10 집회를 계기로 같은 달 19일 이 대통령은 ‘쇠고기 파동’ 관련 특별기자회견을 열어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한 가지 사안을 두고 두 번의 사과발언을 한 것은 그만큼 ‘촛불의 힘’이 강력했음을 방증한다. 이후 야당의 등원 거부로 정치권까지 가세했던 촛불집회는 ‘공기업 민영화’, ‘언론장악 반대’ 등 요구사항이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촛불집회는 경찰의 ‘과잉 진압’과 소수 시위대의 폭력성 등을 놓고 논란을 빚다, 100회째인 8.15 광복절 집회를 끝으로 사실상 정리 국면에 들어갔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5월 2일부터 8월 15일까지 전국적으로 모두 2398차례의 촛불집회가 열려 연인원 93만2680명이 참석했다. 반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모두 300만여 명의 시민이 촛불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 광우병 우려로 시작…전문가 “반미정서도 작용” 촛불집회의 일차적인 발생 원인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으로 인한 광우병 우려의 확산이었다. 충분한 안전장치 없이 졸속으로 협상을 성사시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합의한데 대한 반감 여론이 끓어오른 것이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선 ‘아줌마’들은 가족들이 광우병 위험물질을 포함한 미국산 쇠고기의 무분별한 수입으로 건강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판단 아래 광장에 나오게 됐다고 한다. 중고등학생을 비롯한 젊은 층의 참가자들이 집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도 자신이 광우병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국가가 건강·생존이라는 일차적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불신감이 국민들을 촛불집회에 참여하게 했다. 식생활 관련 사안에서 국민이 봉기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과거 군사정권의 쿠데타에 의한 정권의 탈취,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등 거국적 시각에서 촉발된 민주운동과 차별화된 점이 이 부분이다. 생활과 직결된 문제에서 국민들이 분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친정부 언론들은 국민들이 제기하는 광우병의 위험 자체를 괴담으로 일축하거나 집회 주최 측이 따로 있다는 배후론을 제기했다. 이로 인해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은 정부에 대한 반감을 더욱 극렬히 나타냈고, 촛불을 끄려던 것이 오히려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됐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촛불집회가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로 진행된 배경은 단지 쇠고기 수입 문제 외에 정부 정책에 대한 반감과 함께 반미정서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직접적 원인은 서투른 졸속 협상이지만, 배경적 원인은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다”며 “`강부자·고소영 내각 등 1% 특권층을 위한 정책에 신자유주의 정책까지 추진하면서 반발을 샀다”고 진단했다. ■ 생활정책 향배 따라 촛불봉기 결정한다 촛불집회가 남긴 가장 큰 사회적 의미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미래형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데 있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과거 사회운동에서 대중은 단순히 동원의 대상이라고 생각됐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참여해 정치의사를 표시하는 21세기적인 직접민주주의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시위라는 형태의 사회운동 자체에만 갇혀, 지속적인 문제제기의 틀을 갖추거나 제도적 견제장치로 안착하지 못한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는 진단도 나온다. 손 교수는 “쇠고기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언론장악’ 등의 사회문제가 제기됐는데도 별다른 결과 없이 끝났다는 것이 아쉽다”며 “그런 것들을 지속적인 힘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제도화를 이루지 못하고 일회성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선출된 권력’이라 하더라도 권한을 사용할 때는 국민의 동의과정이 중요하다는 게 확인된 과정이 촛불집회이다. 정부가 민의에 반하는 정책을 진행할 경우 제2의 촛불이 발생할 개연성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주목하고 있는 사안들은 거국적인 이념이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생활 관련 정책들이다. 예로, 의료 민영화가 추진될 경우 국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이미 예고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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