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장사동에 위치한 세운(현대)상가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건물 철거작업이 한창이다. 세운상가는 우리나라 주상복합건물의 비조이자 근대화의 상징이다. 원래, 종묘와 남산을 잇는 길은 소개도로였다. 세운상가가 시작되는 종묘는 왕을 모시던 사당으로, 장례촌과 판자촌이 즐비하게 형성돼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판자집이 붙어 있어 불이 날 경우 대화재로 이어질 우려가 컸기 때문에 판자집의 구획을 나누는 넓은 도로가 필요했다. 당시의 큰 도로는 대부분 화재 예방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 개발바람이 몰아치던 1968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소개도로 자리에 길다란 상가를 지었다. 각종 도색잡지와 포르노 테이프가 횡행하고, 상인들 몇 명만 모이면 잠수함과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농담이 사실인 듯 통용되던 곳. 굴지의 기업 LG(금성사)가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 이곳이 세운상가이다. 서울시는 최근 ‘도시재창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세운녹지축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우선, 세운4지구로 지정된 현대상가 건물 부지에 녹지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건물을 철거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17일 종묘공원에서 오세훈 시장과 국회의원 등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녹지축 조성사업 착공식’을 성황리에 마쳤다. 이날 오 시장은 “세운녹지축 조성사업은 ‘도심재창조 프로젝트의 꽃’이라며, 이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된다면 서울 도심의 경쟁력을 일거에 높이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서울시 균형발전추진본부 관계자는 “현대상가 상인들의 이주가 100% 자진 이루어지고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며 의의를 설명했다. ■ 한쪽은 허물고, 다른 쪽은 “100년도 더 영업하겠다” 서울시는 착공식 이후 ‘흉물 세운상가 역사 속으로’라는 제하의 보도자료를 내고 “서울시는 40년이 경과돼 도심의 흉물로 인식돼 온 노후건축물 세운(현대)상가를 철거하고 도심 속에 새로운 숲길을 조성한다”며 서울시의 공원조성 계획을 상세히 설명했다. 각 일간지와 방송도 ‘세운상가, 40년 역사 속으로’ ‘세운상가 굿바이(Good bye)’ 등의 제목으로 이날 근대사를 함깨 해 온 세운상가를 추억하고 향후 서울시의 계획을 소개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곳 상인들의 목소리는 서울시와 언론이 설명하듯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준비가 돼 있어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12월부터 철거가 시작된 상가건물 밑에 공사용으로 쳐진 펜스에는 크고 작은 현수막과 인쇄물이 나붙었다. 이 선전물들은 “현대상가 공사 중에도 세운상가는 20년 더 정상 영업합니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대상가와 청계천 방향으로 맞붙어 있는 세운전자상가에서는 여전히 모든 점포들이 영업 중이었다. 칸칸이 불을 켠 점포에서 상인들은 홀로 가게를 지키거나, 삼삼오오 몰려 서서 방담을 나누고 있었다. 다만, 오가는 시민들은 많지 않았다. 안에서 물건을 보는 손님도 없었다. 현대상가의 철거작업을 영업시간을 피해서 한다는 약속이 서울시와 상인회 사이에 이루어진 터라, 공사장 특유의 소음도 없이 분진방지용 펜스만이 침묵을 지키고 서 있었다. 피뢰장비를 취급하는 한 상인은 20년 더 영업 한다는 게 무슨 말이냐는 질문에 “20년이 아니라 50년, 100년이든 여기에서 계속 장사를 할 생각”이라며 분노했다. 그는 “가끔씩 언론사 등에서 ‘어디로 이사를 갔느냐’고 전화문의가 온다. 거래처에서도 혼란스러워한다. 이게 우리더러 고사하도록 압박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 나머지 7개 상가 ‘현대상가’ 여파로 경영난 세운상가 상인들은 ‘세운녹지축 조성사업’ 착공 관련 보도가 마치 종로 세운상가 전체가 철거되는 듯한 인상을 주어 영업에 손실을 입었다며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시에서는 당장 현대상가 부지만을 철거하기로 했지만, 언론상에서는 세운상가 단지 전체가 헐리는 듯한 인상을 주게끔 보도가 나간 터라 시민들도 영업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세운상가의 모든 점포가 문을 닫은 것으로 오인하는 시민들이 많다고 한다. 안길수 세운상가시장협의회 2층 회장은 “예전에는 100% 운영되던 점포 운영률이 현재 60%가 깎여 나가 40% 정도밖에 운영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는 세운상가이고, 철거하는 쪽은 현대상가”라고 확실히 구분 지었다. 이 같은 어려운 상황은 세운상가뿐 아니라 퇴계로까지 길게 이어진 청계·대림·신성 등 다른 상가도 마찬가지라는 게 안 회장의 전언. 그는 “다른 상가도 마찬가지다. 많은 내부점포들이 도산하거나 문을 닫아 적은 수만으로 연명해 나가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기계·전선·배관자재·공구를 파는 청계상가도 세운녹지축 사업관련 보도 때문에 영업 손실을 입고 있었다. 김종국 청계수표산업용재 상가협의회 회장은 “언론보도 이후 예년에 비해 수입이 반으로 줄었다”고 전했다. ■ 간판하강식, 상인들 불만 더 키워 `12월 17일 있었던 착공식 마지막에 연출된 간판하강식은 상인들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당시 고딕체로 선명하게 ‘종로세운상가’라고 쓰여진 간판은 오색 빛깔의 연막과 함께 철거 인부들에 의해 서서히 아래로 내려졌다. 40년 간 우리나라 전자산업을 지켜 온 세운상가가 21세기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고 형상화하듯 말이다. 세운상가시장협의회는 일반 시민들이 세운상가와 현대상가가 혼동할 우려를 예측해, 공사가 시작되면 현대상가 전면에 붙어 있던 ‘종로세운상가’ 간판을 제거할 것을 서울시에 미리 요청했다고 한다. 서울시도 상인들의 거센 반발에 못 이겨 간판을 떼어놓았다고 한다. 이렇게 제거된 줄만 알았던 간판은 착공식 당일이 되자 다시 걸렸고, 이날 착공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퍼포먼스에 그대로 사용됐다. 정광길 세운상가시장협의회 회장은 “간판이 아예 치워진 줄 알았는데, 아침 8시에 출근을 해서 보니 간판이 다시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착공식에서 보란 듯이 간판을 내렸다. 이제 세운상가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이어 “서울시를 대상으로 소송을 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서울시, “8개 상가 통칭해 ‘세운’이다” 서울시는 종묘부터 퇴계로에 이르기까지 늘어선 상가를 통칭해 ‘세운’이라고 부르고 있다며 명칭을 둘러싼 시비를 일축했다. 서울시의 설명에 의하면, 세운(世運)은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세상기운 다 모이라’는 취지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서울시 균형발전추진본부 관계자는 “8개 상가가 서로 다르게 불리는 것은 건물 시공사의 이름을 따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세운녹지축 조성사업상에도 세운상가의 나머지를 철거하는 것도 아니고 현대상가 부분만 철거하는 것으로 표시했다”고 덧붙였다. 또, 이 관계자는 “세운상가의 상권은 70~80년대 이후로 점차 쇠락기를 맞아 왔다”며 착공식 이후 상권이 침체기를 맞았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실, 세운상가는 70~80년대만 해도 전자산업의 메카로 불렸으나, 용산전자상가가 생기고 백화점이 서울 곳곳에 들어서면서 점차 상권이 쇠락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낙후된 세운상가 주변의 개발 필요성을 환기해 왔다. 세운녹지축 조성사업은 지난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된 바 있으나, 당시에는 상권이 활발해 추진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2002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2005년 착공을 목표로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서울시는 장지동에 대체상권을 마련해 세운상가 상인들을 이주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사업은 양윤재 전 서울시 행정부시장의 청계천 비리 등으로 추진이 막혔으나,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당선되면서 세운상가 녹지화에 주력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장지동 유통단지도 비싸서 못 간다” 시 관계자는 “오래 전부터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상권과의 협조가 안돼 추진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의 세운녹지축 조성사업을 통해 녹지축과 주변 재정비가 되려면 8개의 상가가 모두 철수해야 한다. 일단 현대상가는 소유자와 세입자 모두의 동의하에 이주가 완결된 상황이었고, 우선매수청구권과 이전비·영업손실보상금 등의 보상이 주어진 상태이다. 일단 종묘공원 옆 구 전매청 자리에 임시이주상가에서 5년 간 무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송파구 장지동 동남권 유통단지도 마련돼 있어, 일부를 제외하고는 상인들의 입주가 대부분 완료된 상태이다. 서울시는 나머지 상가에 대해서도 장지동 유통단지에 대체상권으로 입주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상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비싼 분양가를 지불할 여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권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아 경영상 어려움을 무릅써야 한다. 청계상가 김종국 회장은 “3개 지구단위 개발로 세운상가동 양변으로 서울시 계획이 있어 점차적으로 떠나야 하지만 이주대책이 현재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우리도 장지동에 가는 것을 희망했는데 분양가가 비싸서 원가로 특별분양해준다고 해도 갈 수가 없다”며 “7평 공간을 분양받으려면 적게는 2억5000만 원에서 4억 원 가까이 지불해야 한다”고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