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호 박성훈⁄ 2009.02.03 14:47:58
뉴타운으로 선정된 지역의 세입자들이 “어려운 서민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지난 1월 20일 서울 용산에서 일어난 철거민 사망사건으로 재개발·뉴타운 사업에 대한 점검의 필요성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는 모습이다. 집값 하락과 부담금의 증가로 집주인들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지난해 총선에서 공약을 남발한 정치권에 역풍이 불고 있다. 뉴타운 사업은 정비지구 지정을 통한 개발이익으로 도시기반시설 건설비를 충당하는 재개발사업이다. 뉴타운에서 공익시설 건설비는 입주자가 부담하게 된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제공해야 할 도로·공원 등 각종 편의시설과 세입자 주거안정비·영업보상비 등을 조합원인 주민들이 부담해야 한다는 점에서 세입자들과 개발주체 간의 마찰이 발생하게 된다. 게다가 분양가가 오르고 주민들이 짊어질 부담금이 늘어나 재정착이 힘들어지면서 반대가 더욱 거세지는 형국이다. 서울에서 추진되고 있는 뉴타운 사업이 현재 추세대로 진행되면 향후 2년 동안 130여 개 구역에서 15만 채 가량이 철거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와 내년부터 본격적인 철거작업이 진행될 예정인 뉴타운 지구 곳곳에서 생기는 마찰은 정치권의 적절한 조치가 없을 경우 ‘제2의 용산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야기하고 있다. ■ 여기저기서 “뉴타운 중단하라” 반발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참화가 발생한 1월 20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서울 지역 150여 구역의 뉴타운 및 재개발 지역 주민들이 구성한 ‘비상대책위원회’ 주최로 1000여 명이 모여 뉴타운 반대를 주장하는 집회가 열렸다. 50~60대 연령층의 집회 참가자들은 “주민들은 통곡한다. 서울시는 각성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서울 동작구 흑석동 7구역에 사는 최영국씨는 “단독주택 30평을 가지고 있는데, 30평대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2억여 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며 “집값은 떨어지는데 높은 이자를 부담하면서 어떻게 새 집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서울 성동구 옥수 13구역에 사는 김경택 씨도 “50평 짜리 집을 가지고 40평대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3억 원 이상을 부담해야 하는데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했다. 이들은 1월 18일 성명서를 내고 뉴타운 사업의 전면 중단 등 보완책을 요구했다. 재개발 과정에 주민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할 것과 주민들에게 개발사업에 대한 자료를 충분히 공개할 것 등을 요구했다. 또, 조합이 각종 자료나 정보를 숨겨 주민들이 입을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법적 장치의 마련도 촉구했다. 실제로 서울시가 최근 북아현 3구역을 감사한 결과, 조합이 주민들에게 재개발사업에 대한 자료를 충분히 공개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재건축·재개발 사업의 무리한 추진에 제동을 거는 판결도 나오고 있다. 동작구 방배 2-6재건축구역 주민들이 재건축조합이 사업 내용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제기한 조합 설립 무효소송에서 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14일 주민들이 승소한 1심 판결에 대해 조합 측이 낸 항소를 기각했다. 이에 앞서 서울행정법원은 동대문구 전농 7재개발구역과 은평구 응암 7구역 주민들이 낸 소송에서 주민들에 대한 보상금을 확정하고, 이주 및 철거를 조합이 구청으로부터 허가받는 절차인 관리처분인가에 대해 각각 지난해 12월과 11월에 취소 판결했다. ■ 제도개선 없이 공약 남발한 정치인 원망 지난해 18대 총선에서는 뉴타운 사업이 정치권의 화두로 떠오른 바 있다. 뉴타운을 유치해야만 당선될 수 있다는 듯이 수도권의 대다수 총선 후보들은 이를 최대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제도개선이 선행되지 않은 채 뉴타운 추진에만 몰입하는 정치인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뉴타운 논란이 일었던 서울의 한 지역 주민 한모 씨는 “정치인들은 인기 발언으로 일단 당선되고 보자는 식의 약속만 한다”며 “1~2년 후에 문제가 발생하면 사회적 책임으로 돌리기 일쑤”라고 비판했다. 정치권에 대한 제도개선 요구도 거세다. 서울 관악구의 오모 씨는 “현행 제도는 조합설립이나 관리처분인가의 요건이 너무 느슨하다”며 “건설사와 결탁한 조합장 등이 불법을 저질러도 감시할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뉴타운 사업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내년 지방선거에서 이 문제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뉴타운과 관련된 문제가 내년 지방선거의 핫 이슈가 될 가능성이 크다”며 “시장 후보나 구청장 후보가 뉴타운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 부각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책 대안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MB 서울시장 시절 뉴타운 25개 지정 서울시 뉴타운 사업은 2002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현 대통령)이 청계천 복원사업과 함께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정책 중 하나이다. 서울시는 2002년 10월 시범 뉴타운(1차) 3개 지구를 지정한 뒤, 다음해 11월(2차) 12개 지구와 12월(3차) 11개 등 모두 26개 지구를 뉴타운으로 지정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4년 재임기간 동안 25개 지구가 뉴타운으로 지정됐다. 가재울 뉴타운 4구역 조합에 따르면, 조합원 2200세대가 세입자 3000세대와 1500여 개 상가에 건네줄 보상금은 600억 원이 넘는다. 조합원 한 세대당 평균 2500만 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조합원의 부담이 커지면서 분양가가 높아져 뉴타운을 취소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흑석 1·2·7·9 재정비촉진구역)의 뉴타운 주민 200여 세대는 지난달 ‘뉴타운 지정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중랑구 중화동 주민들도 뉴타운 재개발을 반대하고 있다. 서대문 가재울동과 동작 흑석동 등 7개 지역 뉴타운대책위와 주거권연합 관계자들은 1월 16일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별관 앞에서 ‘뉴타운 재개발 지역 세입자 공동집회’를 개최하고 세입자 80%가 강제퇴출되는 뉴타운 사업 추진 반대와 세입자 주거대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들은 “낙후된 지역에서 공익성 사업과 환경개선으로 지역 주민들의 이익을 함께 보장하는 것이 뉴타운 개발이지만, 쥐꼬리만한 보상금과 오를 대로 오른 전세값 때문에 주민들은 안락한 보금자리는 꿈도 꿀 수 없이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고 있다”며 “서울시 뉴타운 사업은 서민 주거를 불안정하게 하고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사업”이라고 비난했다. 뉴타운 사업의 허점은 세입자들을 배려하는 대책이 없을 뿐 아니라 재입주 때 부담이 높다는 점이다. 여기서 원주민의 재정착률이 낮아진다. 원주민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에 앞서 대형 건설사와 조합원의 이해가 먼저 반영돼 재건축이 추진되는 양상이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뉴타운 사업을 추진한 배경이 대통령 출마를 위한 정치적 계산이었다는 지적도 여기저기서 불거지고 있다. 뉴타운 지역은 세입자들에 대한 대책이 미비하다는 문제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다.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채 뉴타운 사업이 계속될 경우 갈등의 여지가 남아 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로 남게 된다. 서울시도 재개발 사업에서 세입자 보상과 주거 대책이 부실하다며 개선책을 내놨다. 서울시는 지난 21일 내놓은‘재개발 제도개선 추진방향’에서 점포세입자에 대한 보상금 산정이 제한적이며 사업별로 차이가 있는 등 현행 재개발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시 관계자는 “도시계획사업에 적용하는 방식을 조합에 맡겨 세입자와의 대립이 상존한다”며 “민간주도형 공익사업이기 때문에 공공 지원을 확대 추진하는 등 세입자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시는 또 재개발사업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관련 법 체계도 정비하는 등 종합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 “뉴타운·재개발 중단” 요구 확산 가옥주·세입자 모임 회원들과 민주노동당은 1월 22일 용산참사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뉴타운·재개발 중단을 촉구했다. 이들은 “이번 사건의 근원적 문제는 개발이익만을 앞세워 세입자들이나 원주민들에 대한 대책 없이 진행되고 있는 뉴타운 정책”이라며 “이명박 정부의 막가파식, 포크레인식 개발을 당장 중단하고 올바른 재개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보신당 서울시당도 이날 서울시청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오세훈 시장에게 뉴타운·재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대표는 이날 용산사건에 대해 “서울시가 무리하게 추진한 뉴타운·재개발 사업의 예정된 결말”이라며 “뉴타운·재개발은 소수 강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약자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15일 서울시 주거환경개선정책 자문위원회가 발표한 ‘서울시 주거환경개선정책 종합점검 및 보완발전 방안’에 따르면, 35개 뉴타운 사업에서 2011년까지 발생하는 멸실주택은 최대 15만 가구에 달한다. 특히, 2010~2011년에 철거의 전단계인 관리처분인가가 집중될 것으로 예상돼 내년의 멸실가구가 2008년의 3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길음 4구역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 조합원의 재정착률이 15.4%에 불과했고, 세입자까지 포함할 경우 10.9%로 떨어졌다. ‘용산참사’의 원인이 됐던 철거과정의 보상 갈등과 이해관계 충돌이 서울 전역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뉴타운 사업은 △아파트 중심의 획일적인 주택 공급 △기존 도시의 흔적을 송두리째 없애는 도시 설계 △주민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조장하는 사업방식 등 수많은 병폐를 안고 있다. 문제의 근본 원인은 뉴타운 사업의 추진구조에 있다. 형식적으로 정비사업의 시행자는 조합이고 시공사는 도급업체이지만, 실제 관계는 역전돼 있다. 자금조달 능력이 떨어지는 조합과 정비사업 관리업체는 필연적으로 시공사인 건설업체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민주거안정이라는 목표보다 건설업체의 이익실현이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작동하는 이유다. 이주원 뉴타운바로세우기연대회의 국장은 “용산참사에서 보듯 대부분의 뉴타운 사업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시 주민으로 구성된 뉴타운 비상대책위원회는 주거환경개선 정책자문위원회의 주거환경 개선 보완발전 방안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서울시의 방안이 “피해를 당하고 있는 지역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지적하면서 “진행 중인 모든 뉴타운·재개발·재건축 등의 사업을 전면 중단하고, 주민들이 참여하는 감사와 사업성 사전검토 및 주민 의견 수용절차를 거칠 것”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