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타계한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각막을 기증하여 마지막까지 나눔의 삶을 실천한 바 있다. 이 사연이 전해지면서 가수 장윤정·박현빈, 그룹 쥬얼리(박정아·서인영·하주연·김은정), VOS(박지헌·최현준·김경록), 탤런트 이채영·정한용, 개그맨 양원경 등 유명 연예인들이 각막 및 조직 기증 서약을 하는 등 장기기증을 하기로 했다. 이 외에도, 장동건·김제동·임은경·김지수·하지원·장혁·테이·김C·김태우·데니안·박준형·손호영 등의 인기 스타들이 장기 기증에 서명했다. 1년 전쯤에는 권투경기 도중 쓰러져 뇌사한 고 최요삼 선수의 장기기증을 계기로 나눔문화가 확산된 적이 있다. ■일일 평균 25명에서 3일 만에 하루 740명으로 이 같은 유명인사들의 움직임에 발맞춰, 장기기증의 물결이 마치 유행처럼 사회 전반으로 번져 가는 모습이다. 한국인체조직기증지원본부 측은 “김 추기경의 선종 이후 이들 연예인이 각막 등 조직 기증의 뜻을 밝혀 왔다”며 “이들 외에도 많은 연예인과 일반인들이 장기기증을 문의해 오고 있다”고 밝혔다.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는 최근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뜻을 전해 온 신청자의 수가 하루 평균 8배 정도 급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센터의 홈페이지를 통해 장기기증에 서약한 사람은 올 들어 2월 초까지 하루 평균 6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 추기경의 각막 기증 소식이 전해진 이후 2월 17일에는 24명, 18일에는 28명, 19일에는 평소의 8배에 가까운 45명으로 하루하루 급증하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평균 40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도 김 추기경 선종 이후 사흘 만에 온라인 장기기증 등록자 수가 평소의 30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평소 장기기증 의사를 밝힌 사람이 25명 수준이었는데, 17일엔 그 6배인 153명으로, 18일에는 10배인 250명으로 늘었다. 19일에는 무려 740명이 등록증을 신청했다. 특히, 김 추기경의 각막이 2명의 환자에게 이식된 뒤로 장기 중에서도 각막 기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각막이식수술을 시술하는 의료센터에는 각막 기증 관련 문의전화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 오고 있다고 한다. 최근 쇄도하는 전국의 각막 기증 신청자는 3만 명을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뇌사자 장기기증 아직 ‘머뭇’ 사실 우리나라는 장기기증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2007년 기준 인구 100만 명당 뇌사자 장기기증률은 미국 26.6명, 영국 13.2명, 스페인 34.3명, 프랑스 25.3명인 반면, 우리나라는 3.1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체에 손을대는 것을 꺼린다는 반증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에 깊이 자리잡은 유가사상(儒家思想)의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그대로 보전해야 한다는 뜻)’ 정신 때문에 장기기증 사례가 적다는 지적도 있다. 장기기증을 권유받은 뇌사 환자들의 경우 가족들이 아직 심장이 살아 있다는 이유로 기증을 꺼리는 사례도 많다. 여기서 말하는 ‘뇌사자’는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의거한 뇌사판정기준 및 뇌사판정 절차에 따라 뇌 전체의 기능이 되살아날 수 없는 상태로 정지된 자를 말한다. 지난해 뇌사자 장기 이식은 836건으로 2000년(159건)에 비해 늘긴 했다. 하지만 이식 대기자도 매년 늘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와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는 지난해 이식 대기자가 1만717명이라고 밝혀, 2000년의 2840명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으로 추산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2146명만 장기를 이식받는 등 장기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각막 이식 대기자도 3600여 명에 이르지만, 지난해 국내에서 각막 기증을 통해 이식받은 환자는 305명에 불과했다. 지난해 장기를 이식받은 환자들은 신장의 경우 평균 3년 6개월을, 간장의 경우 2년 10개월을 기다린 것으로 나타났다. 장기 이식에 관한 법률 등의 제도적인 이유도 있다. 우리나라는 2000년 2월에 뇌사를 합법화했다. 장기기증을 전제로 했을 때만 인정했다. 이때부터 장기기증이 정부 통제로 들어갔다.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를 만들어 거기서 장기 이식의 순서와 절차를 일일이 통제했다. 장기를 둘러싼 음성적 거래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장기이식법이 뇌사자 기증 막는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1999년 162명에 달하던 뇌사자가 2000년에는 52명으로 크게 줄었다. 그 전에는 큰 병원들이 뇌사를 판정하고 장기 이식도 알아서 했다. 교통사고 등으로 뇌사자가 생기면 병원들이 가족에게 장기기증을 적극 권해 자기 병원에서 이식수술을 했다. 하지만 정부가 통제하면서 일일이 대기 번호를 매기자, 뇌사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장기는 살아 있는 사람과 뇌사자가 공급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 이식할 수 있는 장기는 신장이나 간 등에 한정돼 있다. 가족이나 친분이 두터운 사이가 아닌 이상 이 같은 생체기증을 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기 이식의 주 공급원은 뇌사자다. 제도 도입 첫해에 크게 줄었던 뇌사 기증자는 이후 매년 조금씩 늘었지만 수요를 따르지 못했다. 이식 대기자가 줄을 이었고, 이식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신장 이식 대기자만 7641명에 달한다. 국내에서 이식받지 못한 환자들은 거액을 들여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 이식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뇌사판정 절차와 조건을 완화하자는 주장이 2000년 법률제정 당시부터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 일부 조항만 살짝 바뀌었을 뿐 핵심조항은 9년 이상 유지돼 왔다. 뇌사자가 사전에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더라도 가족이 반대하면 장기 이식을 할 수 없다. 자식들이 부모의 신체 훼손을 우려해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뇌사판정위원회를 거치도록 한 규정도 비판을 받아 왔다. 뇌사자는 교통사고 환자가 가장 많다. 밤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위원의 과반수인 위원회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장기가 훼손돼 막상 뇌사판정을 해도 쓸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계명대 동산의료원이 2007년 5~10월에 이 의료원에서 발생한 잠재적 뇌사자 47명을 조사한 결과, 11명만 실제로 장기 이식이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유족의 반대(12명)나 기준요건 미달(15명) 탓이 컸다. 9명은 기증 의사가 명백했는데도 뇌사판정까지 시간이 걸려 장기가 이미 이식에 부적합해 폐기됐다. 한나라당 이애주 의원은 “스페인·미국 등 뇌사자 장기기증이 많은 나라들은 유족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본인의 사전 기증 의사만 확인하면 뇌사자의 장기를 기증할 수 있고, 뇌사판정위원회 없이 전문의의 판단만으로 뇌사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복지부, 5월 중 법 개정 이에 정부는 법을 바꿔 까다로운 뇌사판정 절차를 간소화해 장기 이식 대기자의 적체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지금은 본인이 장기기증을 서약한 뒤 뇌사에 빠질 경우 가족이 반대하면 장기 기증을 할 수 없어, 보건복지가족부는 가족동의 절차를 없애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게 힘들 경우, 동의를 받아야 하는 가족을 두 명에서 한 명으로 줄이기로 했다. 뇌사에 빠진 사람의 장기기증 의사가 분명하지 않지만 가족들이 원하는 경우도 많다. 지금은 가족 두 사람이 뇌사자의 장기기증을 결정해야 한다. 가족 중 배우자-자녀-부모-형제 순으로 의사 결정의 우선권이 있다. 하지만 배우자나 자녀가 연락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앞으로 한 명만 동의해도 기증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뇌사판정 절차도 간소화된다. 지금은 신경과 의사 한 명을 포함해 전문의 두 명이 먼저 뇌사 여부를 판단한다. 여기서 뇌사로 판정되면 뇌사판정위원회를 소집해 2차 판정을 한다. 이 위원회는 6~10명으로 구성되며, 반드시 의료인·변호사·공무원·종교인 등이 최소 6명 포함돼야 한다. 앞으로는 전문의 진단만으로 판정하거나 위원회 구성을 간소화하는 쪽으로 바뀐다. 복지부는 각계 의견을 수렴하여 5월 중에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가을 정기국회에 제출할 방침이다. 복지부는 또 운전면허증을 신규 발급하거나 재발급할 때 장기 기증 의사를 표기하는 방안을 경찰청과 협의하고 있다. 복지부는 이 밖에 한마음한몸운동본부와 전국민적인 장기기증 캠페인을 벌이기로 하고, 복지부 공무원과 소속기관·산하기관 직원 2만여 명을 대상으로 2월 25일까지 장기기증 희망 등록신청을 받았다. ■“서약보다 ‘이식 실천’이 중요” 이 같은 보건복지가족부의 법 개정 노력과 캠페인 등이 장기기증을 활성화하는데 더욱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신현호 변호사는 “장기이식법 도입 당시부터 너무 엄격하게 적용한 측면이 있다”며 “국내 의료진의 높은 윤리 수준이나 국민의 생명윤리 수준을 감안할 때 제도의 완화가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기기증 신청이 실제 이식으로 이어지는 일도 중요하다. 뇌사 장기기증 서약은 2006년(17만7755명)을 정점으로 줄어드는 추세이다. 2007년에는 13만6800여 건으로 줄었고, 2008년에도 10만 건을 넘기지 못했다. 특히 장기기증 서약을 한 뒤에 뇌사 상태에 빠진 경우, 실제 장기 이식이 이뤄진 건수는 5000건에 미치지 못해 이행률은 1%를 밑돌고 있다. 장기이식관리센터 안정임 장기이식기획팀장은 “서약자가 늘어나는 것은 좋은 현상이지만 서약 자체로만 그치는 경우도 많다”면서 “실제로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이 늘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