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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관은 ‘저승사자’ 아닌 ‘피스메이커’

기원섭 씨 저서 <집행관 일기>…채무자·채권자, 대화로 얼마든지 풀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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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09호 박성훈⁄ 2009.03.17 16:39:08

살면서 자주 만나봐야 좋을 것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의사·검사·경찰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자주 아파야 좋을 것 없고, 범죄를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야 더더욱 그렇기 때문이다. 누구나 선망하는 겉모습 반듯한 직업이지만, 이들이 허구한 날 만나야 하는 사람은 환자·범죄자 등이다. 하지만, 의사-환자, 검·경-범죄자(드물기야 하지만) 사이에서도 종종 소중한 인간관계가 맺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집행관’은 어떤가? 두 사람 사이의 채권·채무관계가 원만히 해결되지 못하고 갈등에 갈등을 거듭해 더 이상 합의의 여지가 없어 보일 때 만날 수 있는 사람. 판사가 채무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재산압류·명도처분 등의 판결을 내리면 그대로 이행에 옮기는 사람이 바로 집행관이다. 채무자 입장에서 당장 채무상환 만기가 찾아왔는데 갚을 돈이 없다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사정하기’ 아니면 ‘버티기’이다. 그런데 채권자와 갈등이 심해져 세간살이와 집이 죄다 압류될 상황에 처한다고 가정해보자. TV며 냉장고 등에 ‘빨간 딱지’(압류표목)를 붙이는 집행관 일행이 곱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는 유리가 깨지고 멱살잡이가 난무하는 아사리판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한번 당해본(?) 사람들은 집행관이라는 직업을 ‘집달리’ 혹은 ‘집달관’이라고 낮잡아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다음의 <집행관 일기>(기원섭 지음)에서 엿보이는 집행관이라는 직업의 이미지를 선입견은 잠시 접어두고 살펴보자. ■ <삼형제 이야기> “당신들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무단침입했습니다, 형법 제319조 1항의 주거침입죄에 의거하여 징역 3년에 처해집니다” “보세요, 젊은 양반.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처벌받기 싫으면 당장 여기서 나가주세요. 우리 집에서 나가시란 말입니다.” “허어, 참~ 그러지 말고.” “당신들은 집주인이 나가라고 하는데도 안 나갔습니다. 형법 319조 2항의 퇴거불응죄를 저지른 겁니다. 역시 징역 3년에 처해집니다.” “젊은 양반, 난 판사님의 판결을 받고 온 집행관입니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더 이상 집행을 미룰 수가 없습니다” “당장 나가라는 말 안 들려?” 오늘 저는 어느 삼형제 때문에 식은땀깨나 흘렸습니다. 남의 땅을 거의 20년 간이나 억지로 점유하면서 그곳에서 구멍가게로 생계를 이어 온 한 남자의 무허가 건물 철거를 지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구멍가게 주인의 세 아들, 그러니까 삼형제가 쇠파이프를 들고 아버지와 구멍가게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나서면서 일이 복잡하게 꼬였습니다.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곳간에서 인심 나야 한다고, 생계유지형 구멍가게 따위야 더 가진 사람이 몇 푼 보태주는 심정으로 봐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동정론이 일 수 있겠지만,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동정론으로 무마하기만도 쉽지 않은 형편이었습니다. 판사의 판결도 20여 년이나 그곳에서 구멍가게로 자식을 다 키워냈으면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이제 땅 주인이 원하는 대로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이미 이렇게 판사의 확정판결이 내려진 상태였고, 하루 속히 판결을 이행하고 싶은 땅 주인의 바람이 컸던지라, 집행관인 제 입장에서는 구멍가게 남자와 세 아들의 시비를 무시하고라도 집행을 강행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끝까지 땅 주인과 구멍가게 남자가 원만히 합의하기를 내심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정든 곳을 떠나는 대가를 바라는 구멍가게 주인과 20여 년의 세월 동안 딱한 사정을 봐준 땅 주인의 입장은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원만한 합의를 바라던 제 바람이 쇠파이프를 들고 막아선 삼형제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판결의 공신력을 지켜내야 하는 집행관인 저는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나오시면 집행을 강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기만 해! 다 죽여버릴 거야!” 쇠파이프를 머리 위로 치켜든 삼형제가 저를 사납게 노려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분노 뒤엔 한없는 약함이 숨어 있다는 걸 아는 제 눈에 삼형제의 들끓는 분노에 가린 슬픔이 함께 보였습니다. “거기 둘째 아드님이라고 하셨죠?” 누그러진 제 목소리에 맨 앞에서 집행관 일행을 막고 있던 둘째 아들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거 잠시 내려놓고 저랑 얘기 좀 나누실래요?” “무슨 말이요?” 투박한 대답이지만, 둘째 아들도 한풀 기세를 꺾고 되물었습니다. “갑자기 담배가 당기네. 둘째 아드님도 담배 태우시죠?” 이렇게 삼형제 중 둘째 아들과 말을 텄습니다.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은근히 물어봤습니다. “둘째 아드님, 설마 그 쇠파이프 진짜 휘두를 생각은 아니죠?” “…….” “세상엔 말이에요. 되돌릴 수 없는 일도 있어요. 아버님과 그 쪽 형제들이 20년 넘게 살아온 이 가게가 소중하고 놓치기 싫은 마음을 판사님이 모르셨을까요?” “글쎄요….” “둘째 아드님, 들어보세요. 희망이라는 건 남의 땅에서 키울 수가 없는 겁니다. 척박하고 좁더라도 자기 땅에서 키워야 해요. 설사 남의 땅에서 키워냈다 하더라도, 그건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삼형제가 모두 이렇게 건장하게 컸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아버님하고 형제들을 설득해 보는 게 어떨까요. 이런 식으로는 아무 것도 얻는 게 없어요. 얻기는커녕 오히려 큰 후회만 남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둘째 아들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요. 사실 영문도 몰라요. 아버지가 이 허름한 가게에 너무 애착을 가지셔서 자식된 도리로 어쩌겠어요. 이렇게라도 아버지 뜻을 따를 수밖에요.” 체념한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둘째 아들이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습니다. 방법이 잘못됐기는 하나 아버지의 뜻을 지키려고 맨몸으로 집행관 일행에게 맞선 삼형제의 우애가 장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둘째 아들과의 대화 내용을 알리 없는 두 형제는 멀리서 집행관 일행과 땅 주인이 부른 경호원들을 쇠파이프로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아드님, 저것 좀 보세요. 한발 물러나니 어떻게 보입니까?” “…….” “이제 가서 뭘 하셔야 할지 아시겠죠?” “담배 잘 피웠습니다.” 형제들끼리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삼형제는 쇠파이프를 버리고 담장 앞에 서서 말없이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며 슬픈 눈으로 집행 과정을 묵묵히 지켜봤습니다. 함석으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무허가 집에 불과하지만, 어린 시절 대부분의 추억이 담겨 있는 집이 철거되는 광경을 지켜보기란 힘든 일이지요. 현장을 수습하고 돌아가는 차 뒷자리에 앉자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오늘 같은 현장은 저도 감당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는 걸 그대로 믿어선 안 되는 일들이 꼭 생기게 마련입니다. 특히, 사람의 감정이 그렇습니다. 오늘 제가 만난 삼형제가 그렇듯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의 속에 숨은 감정을 헤아려야만 진정한 감정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연인의 미소 뒤에, 친구의 눈물 뒤에, 형제의 침묵 뒤에, 부모의 꾸중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헤아려 살핀다면, 껍데기 감정이 아닌 알맹이 감정과 만나게 되겠죠. 저는 이 알맹이 속마음들과 만나야만 진정한 사랑도 우정도 가능해진다고 믿습니다. 그래야만 생의 마지막 저울 앞에 섰을 때 저와 여러분 인생의 무게가 제법 묵직하게 달려 삿된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지 않을까요. 언제 어디가 될지 짐작할 수 없지만, 오늘 힘겨운 고통을 이겨낸 삼형제가 남의 헌 땅이 아닌 자기들의 새로운 땅에 심게 될 희망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나길 저와 함께 응원해주십시오. ■ 대화를 통해 해결되지 않을 분쟁 없다 위에 소개된 일화에는 폭력사태로 자칫 부상자가 생길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집행관의 부드러운 중재로 평화롭게 마무리되는 일련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물론, 모든 집행현장이 이처럼 깔끔히 정리되지는 않는다. 이 책에 실린 60개의 일화에 소개되듯, 집행관들이 마주치는 일상은 이보다 살벌하기도 하고, 가슴 짠한 일도 벌어진다. 채무자의 격한 저항으로 끝내 강제압류가 불가피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경제불황으로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가 여느 때보다 많이 발생하는 요즘이 집행관들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집행사건의 의뢰인이 지불하는 수수료를 수입으로 하는 집행관으로서는 채무분쟁이 많을수록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다. 집행관이란 직업은 채무자의 적이 아니라 둘 사이에 선 중재자라는 게 기원섭 집행관의 생각이다. 기 집행관은 “집행을 강행해야 공연히 비용만 드는 일이거나, 마음이 약해 남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채무자의 진심어린 사과와 딱한 사정을 들은 채권자의 요청에 의해 현장에서 집행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다”며 모든 집행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기 씨는 집행보다는 가급적 채무자와 채권자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하기 위한 대화를 권유한다. 설득과 설복의 과정을 거쳐 양자가 원만하게 합의만 할 수 있다면, 그날 빈손으로 돌아가더라도 아까울 게 없는 것이다. 기 씨는 검찰 수사관 출신이면서도 “법대로 하자는 말이 가장 싫다”고 말한다. 법이란 잣대가 없어도 대화로 풀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서로 노력이 부족해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집행관 일지>에 나오는 집행관의 이미지는 법을 앞세워 채무자의 재산을 빼앗는 ‘저승사자’가 아니다. 화가 난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 갈등을 풀고 화해하도록 중재하는 ‘피스메이커(peace make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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