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울시내 지하상가의 점포 유리창에는 “지하상가 통째 입찰 관리공단 반성하라” “경기불황에 상인들 다 죽이나”라는 항의문이 붙어 있다. 점포 유리창에 이 같은 구호를 써 붙인 영등포 지하상가의 한 상인은 “서울시에서는 우리에게 별다른 대책을 세워주지도 않은 채 우리를 쫓아내려 한다”며 항의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지하도 상가와 서울시 간의 분쟁을 모르는 사람들은 살풍경에 의아해한다. 지하상권의 주도권을 놓고 서울시와 상가 주인들 간의 갈등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상인들 “장사 안돼 죽을 맛…그래도 경쟁입찰 안된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지하도 상가는 하루 수백만의 유동인구를 보유한 시장이다. 하지만, 지하상가의 상인들은 예전보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아 가게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지하상가에서 한몫 잡아 빌딩을 샀다는 영화는 이미 옛날 얘기다. 서울 영등포 지하상가의 한 상인은 “요즘은 불황이라 장사도 안 돼서 먹고 살기가 힘들다”며 “좋아서 지하상가에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한 상인은 “지하상가의 상권이 좋았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라며 “빨리 점포를 청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다”고 말했다. 상인들이 이처럼 점포 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쉽사리 이곳을 뜰 수 없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상인들이 입점 단계에서 들인 비싼 권리금 때문이다. 지금까지 목이 좋은 점포는 권리금이 1억 원을 넘는다. 현재 강남역 지하상가의 자리 좋은 상가는 점포 권리금이 4억~5억 원에서 점포 위치와 크기에 따라 10억 원대에 이른다. 서울시와 지하도 상인들 간의 갈등은 2008년 4월 시내 29개 지하도 상가에 대한 경쟁입찰 방침이 나오면서 시작됐다. 서울시는 당시 “계약기간이 5월 31일로 끝나는 강남역 지하도 상가 35개 점포를 시작으로 계약방법을 일반 경쟁입찰로 일괄 전환한다”고 밝혔다. 노후한 지하도 상가를 현대식 쇼핑센터로 발전시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필요성도 가미됐다. 이에 상인들은 “10년 넘게 고생해 상권을 일궈 놨는데 옛날 보증금만 돌려주면서 내보내고 일반 경쟁입찰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상인들은 “많은 돈을 주고 들어왔는데 경쟁입찰을 하면 빈손으로 쫓겨나게 된다”며 수의계약을 연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경쟁입찰이 도입되면 권리금은 인정이 안 되고, 30년 전 지하상가가 처음 생겼을 때의 보증금 1000만~2000만 원 정도만 받을 수 있다. ■서울시 “모두가 장사할 권리 가져야” 서울시는 1998년에 제정된 지하도상가관리 조례에 임차권 경쟁입찰이 명시돼 있고 지하도 상가에서 장사할 권리를 시민 모두가 가져야 하기 때문에 경쟁입찰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울시는 시내 나머지 24개 지하도 상가에 대해 3년 간 연장계약을 한 뒤 계약이 만료되면 경쟁입찰 절차에 들어가기로 했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은 2월 11일 이사장 명의로 서울시내 지하도상가 임차인 2582명에게 ‘지하도 상가 임대차 계약 관련 안내’라는 공문을 보내 “최근의 경제위기 및 임차인들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인현 등 24개 지하도 상가에 대해서는 일반 경쟁입찰을 유보하고, 계약을 3년 간 연장하기로 했다”며 “개·보수가 필요한 강남역, 강남터미널1·2·3구역 및 영등포역 지하도 상가 등 5개 상가는 민간위탁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는 3월 26일 지하도 상가의 경쟁입찰 방침을 재확인했다. 시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시민의 공유재산인 지하도 상가의 임차인 선정을 경쟁입찰로 진행한다는 것이 기본원칙”이라며 “그 동안 수의계약으로 기존 상인들이 과도한 혜택을 받아 온 점을 개선할 것”이라고 밝혔다.서울시는 1998년과 2003년에 수의계약과 임차권 매매도 허용했다. 이 사이 점포주의 절반 가량이 바뀌었다. 논란 끝에 서울시는 올해 초 강남역과 강남터미널 1~3구역, 영등포역 상가 등 5개만 경쟁입찰을 통해 민간에 관리권을 넘기고 나머지는 3년 간 수의계약을 연장하겠다며 방침을 바꿨다. 갈등이 해결될 조짐이 보이지 않자, 강북 지역의 지하도 상가는 경기불황을 고려해 3년 간 수의계약 유예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에 따라 강남역, 강남터미널 1~3구역, 영등포역 등 5개 상가의 개·보수와 지하보도 개선 및 휴게공간 확충을 조건으로 경쟁입찰이 시작될 예정이다. 서울시는 “상가 단위로 입찰을 진행하되, 기존 상인을 승계할지를 평가항목에 담겠다”며 “낙찰 업체에 대해선 시가 정한 임대료 인상 가이드라인을 어기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권리금에서 비롯된 지하상가 갈등 2008년 4월 경쟁입찰 방식의 발표를 기점으로 서울시와 지하도 상인 간의 갈등이 시작됐다고 하지만, 서울시 지하도 상가를 둘러싼 갈등은 그 이전부터 상존해 왔다. 역사를 살펴보면, 서울에 지하도 상가가 최초로 들어선 것은 1967년이다. 당시 ‘불도저’라는 별명을 지닌 김현옥 시장은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 발달한 지하상가를 모델로 차용한 지하상가 3곳을 건설했다. 그러다가 도심 지하상가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구자춘 시장 때였다. 당시 정부는 전쟁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해 서울을 포기하는 전략에서 서울을 끝까지 지키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전시 수도 사수론’으로 전시전략을 변경했다. 이에 따라,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방공호 기능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춰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이를 위해 마련한 것이 바로 남산 1, 2호 터널이었고, 지하상가도 그 필요성에 따라 개발된 산물이다. 표면적으로는 도심의 보행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전시 등 비상시에 공공기관들이 이곳으로 옮겨 가고 비상식량·용수의 비축시설로 활용하자는 목적도 포함된 것이다.
당시 서울시는 재정이 부족해 기부채납 방식으로 민간자본에 건설을 맡겼다. 건설업체들은 상인들의 분양 보증금을 받아 공사대금을 마련해 지하상가를 완공했다. 그 이후에는 임대료를 받으며 20년을 운영한 뒤 서울시에 기부했다. 그래서 민간기업이 상가를 관리하는 동안 점포의 양수와 양도가 허용되면서 권리금이 관행처럼 오가기 시작했다. 이후 상가를 인수한 서울시는 점포의 양수·양도를 허가사항으로 만들어 운영하다, 이를 금지하고 권리금과 기존 계약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2002년 이명박 대통령이 시장이었을 때 공개경쟁 입찰을 하겠다고 했지만, 상인들의 반발이 거세 5년 재계약에 합의하면서 “5년 이후의 문제는 차기 서울시장과 협의한다”고 해 갈등이 일단락되는 모습이었지만, 결국 분쟁은 오세훈 시장기에 재발된 것이다. ■지하상가, 유통 대기업에게 매력적 상권 서울시와 상인들이 지하도 상가를 놓고 벌이는 입찰 갈등에는 지하상가 자리를 노려 온 유통 대기업이 있다. 오히려 대기업과 일반 자영업자인 지하도 상인들 간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다툼에 서울시가 끼어 있는 형국이다. 서울시는 공공 공간인 지하도 상가에 대해 무작정 상인들의 기득권을 인정할 수는 없고 경쟁입찰로 모두에게 이용 기회를 열어 놓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시설이 낙후된 지하상가 지역에 대기업이 투자하여 민자로 리모델링이 이루어진다면 보다 경쟁력을 갖춘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란 기대도 없지 않다. 지금은 장사가 잘 안 된다는 지하상가에 유통 대기업이 진입을 노리는 것은 도심 백화점·쇼핑몰과 지하상가의 접근성이 좋아 시너지를 만들 수 있다는 이유 탓이다. 이전 같지는 않다고 해도 지하상가의 유동인구의 절대적 숫자는 여전히 많고, 서울시내 주요 지하상가들은 대부분 대기업 백화점들과 바로 연결된다. 지하상가에서 물건을 팔고, 유동인구를 백화점과 쇼핑몰로 끌어들이면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회현 지하상가는 신세계백화점 본점과 연결돼 있고, 강남터미널 지하도 상가는 신세계 강남점, 잠실 지하상가는 롯데 잠실점과 연결된다. 명동 지하상가는 롯데백화점 본점으로 연결돼 있는데, 을지로입구역부터 신세계백화점까지의 남대문로 600m 구간은 하루 유동인구가 200만 명에 이르지만 횡단보도가 없어 지하도 상가를 인수하면 매출이 급상승할 수 있다. ■경쟁입찰, 과연 기회 균등인가, 불균등인가 2008년 4월 23일 신세계백화점은 본점이 위치한 충무로 1가 지하의 회현 지하도 상가에 대한 현황과 관련 자료를 취득하여 회현상가의 업종과 영업현황 등 실태 파악에 나섰다가, 상인들에게 적발돼 서울시와 신세계백화점 담당 직원이 ‘공기업법에 의한 비밀공개및 유출죄’로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정인대 전국지하도상가연합회 회장은 집회를 열어 “신세계 백화점이 서울시의 공개경쟁입찰이라는 방침을 접하고 자체시설 부족을 메우기 위한 조치로 회현상가 전체를 인수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삼성타운과 연결된 강남역 지하상가는 하루 유동인구가 40만 명에 이르는 대형 상권이다. 서울시는 지난 9일 이곳 강남역 지하상가를 비롯해 한강 이남의 지하상가 5곳을 개별 점포 단위가 아니라 상가 전체로 묶어 입찰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경쟁입찰이 이루어지면, 일반 자영업자들이 권리금 부담 없이 지하상가에 점포를 마련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게 아니라, 대기업들의 투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지하도 점포 사용의 기회균등분배는 더욱 멀어지는 형국이 된다. 성균관대 신중진 건축학과 교수는 한 언론을 통해 “서울시가 원칙 없이 몇 차례 수의계약을 연장해주면서 문제를 키운 책임이 있고, 상인들도 목소리만 높이면 주장이 관철되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며 “비슷한 갈등이 반복되지 않도록 원칙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