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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바보 노무현’의 출생 → 정치역정 → 서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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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20호 심원섭⁄ 2009.06.02 11:26:22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5월 23일 새벽, 북한의 핵폭탄보다 더 큰 폭발력을 가진 청천병력 같은 소식으로 전 국민의 귀를 의심케 하며 새벽잠을 깨웠던 노무현 전 대통령(63세)이 자살 직전에 남긴 마지막 유서 내용이다. 이에 노 전 대통령과 35년 간 생을 같이 했던 평생동지 권양숙 여사는 25일 새벽 슬픔을 뒤로 한 채 남편 노 전 대통령의 염을 마친 뒤 의연한 모습으로 “다 비우고 편하게 가시라”고 마지막 작별을 고한 것으로 전해져 주위를 숙연케 했다. ■75년 고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사시 합격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 6일 경남 김해에서 아버지 노판석 씨와 어머니 이순례씨 사이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형제 자매로는 큰형 영현 씨와 둘째형 건평 씨(현재 구속 중), 누나 명자 씨, 여동생 영옥 씨가 있다. 그의 두 형은 1967, 1968년 각각 당시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세무공무원이 되어 노 전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다. 김해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봉하마을이라는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진영대창초등학교(1959년)와 진영중학교(1963년)·부산상업고등학교(1966년)를 졸업하는 등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성장한 노 전 대통령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68년 3월 육군에 현역으로 입대하여 당시 강원도 원주에 있는 육군 1군사령부에서 부관부 행정병으로 복무한 후 만기제대하기에 이른다. 노 전 대통령은 군 제대 후 73년 1월 고향 친구였던 부인 권 여사와 결혼해 아들 건호 씨와 딸 정연 씨를 낳았다. 그러다가 고졸 출신에게 사법고시 응시자격을 주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한 노 전 대통령은 두 차례 낙방 끝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고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합격한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1977년 대전지방법원에 판사로 부임하지만, 7개월 만에 그만두고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혐의로 대학생 20여 명을 기소해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으로 알려진 소위 부림사건(釜林事件) 변론을 맡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면서 검찰과 마주 서기 시작했다. 이후 학생·노동자 등이 연루된 각종 인권사건에 뛰어들어 점차 인권변호사로 인식됐으며, 특히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가 시위 도중 사망한 사건에 연루됐다가 제3자 개입 혐의로 검찰에 구속돼 그때부터 검찰과의 악연을 쌓기 시작했다. 당시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받기 위해 하룻밤에 담당 판사와 법원장 등 3명의 집을 찾아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추천으로 부산 동구에서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는’는 5공 정권 ‘3허’중 한 명인 허삼수 씨를 꺾고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특히 초선의원 시절인 1989년 국회 5공청문회에서는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져 ‘청문회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다. ■‘바보 노무현’의 청와대 입성 그러나 1990년, 정치에 입문하게 해준 김영삼 총재가 민정당·통일민주당·공화당의 ‘3당합당’을 감행하자 이를 반대해 당에 남았다가, 이후 ‘김대중’이라는 간판을 달고, 당선 확률이 희박했지만,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면서 부산에서 14대 총선(1992년), 부산광역시장 선거(1995년), 15대 총선(1996년)에 연이어 출마해 모두 ‘고배’를 마셔 지지자들로부터 출마‘바보 노무현’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노 전 대통령은 2000~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당내 비주류임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세력을 기반으로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투표 하루 전날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일방적인 지지철회로 후보 단일화는 깨졌지만, ‘노사모’ 등 팬클럽의 지지를 얻어 당선돼 화제가 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순탄치 않았던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검찰 개혁을 화두로 올리면서 취임 후 당시 김각영 검찰총장보다 한참 후배였던 40대의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에 앉혀 서열 중심의 인사가 이뤄지던 검찰 조직의 강한 불만을 샀다. 인권변호사로서 펼친 활동과 수감 경험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노 전 대통령이 검찰 개혁의 칼을 빼드는 계기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노 전 대통령은 개혁 드라이브에 대한 검찰 내부의 반발이 거세지자, 국민이 보는 앞에서 처음으로 대통령과 평검사 간 대화를 시도했으나 불신은 더해 갔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일부 검사들이 수사에 외압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등 ‘뾰족한’ 질문을 이어 가자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고 언급하면서 검찰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기도 했다. 검사와의 대화가 끝난 직후 김 검찰총장이 참여정부의 검찰 개혁 방향에 공개적으로 반대를 표하며 자진사퇴하는 등 노 전 대통령과 검찰 사이의 갈등이 증폭됐다. 그러다가 노 전 대통령은 선거법 중립의무 위반, 국정·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16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04년 3월 12일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 14일까지 63일 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기도 했다. 재임기간 중에는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안희정 씨와 최도술 씨 등 소위 386세대로 불려진 측근들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검찰에 구속수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2월 25일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서울에서 퇴임식을 가진 후 열차를 타고 1만여 명이 넘는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고향으로 돌아와 안착하는 모습을 보여 우리 정치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귀향 당시 47분 간의 연설을 통해 “지난 5년 간 대통령직을 좀 잘했으면 어떻고 못했으면 어떠냐. 그냥 열심히 했으니 예쁘게 봐 달라”는 애교 어린 말문을 연 뒤 연설 끝 부분에서 “야~ 기분 좋다”는 말로 사상 처음 귀향한 퇴임 대통령의 심경을 표현해 퇴임 후 생활의 첫발은 그만큼이나 경쾌했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은 귀향 직후인 지난해 3월부터 봉하마을 주변 하천에서 직접 쓰레기를 줍고 습지인 화포천 환경정화 활동을 벌이면서 봉하마을의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에 주력하는 등 친환경운동 실천으로 분주한 행보를 보였다. ■퇴임 후 친환경쌀 개발해 ‘농부 노무현’ 안착 특히 노 전 대통령과 봉하마을 주민들이 작목반을 구성해 재배한 ‘노무현표 봉하 오리쌀’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면서 불티 나게 팔리며 봉하마을이 친환경재배를 통한 주민소득 증대의 모델이 될 가능성을 확인하는 등 노 전 대통령의 귀향이 가져온 큰 성과라는 평가를 받으며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이 같은 활동 덕분에 봉하마을은 경남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이 되었음은 물론, 실제로 봉하마을은 하루 최고 1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할 정도로 전국 유명 관광지로 떠올랐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귀향 4개월여 만에 불거진 국가기록물 유출 논란 등 잇따른 정치적 논란에 휩싸여 자신의 위상에 일대 타격을 받으면서 마음고생을 겪어야 했다. 이 일로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이 노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고, 전·현직 대통령 주변 인사들 간의 설전 끝에 경기도 성남의 국가기록원 산하 대통령기록관에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을 반환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 밖에도, 한나라당이 ‘사이버 상왕 정치’라고 비판한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 개설이나 노 전 대통령의 사저 공시가격 논란 등 각종 정치적 이슈가 불거지면서 노 전 대통령은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끌려 들어갔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한 해를 고향 주민의 지지 속에서 시작했으나, 결국 귀향 첫해의 마지막을 사실상 ‘칩거’라고 할 정도로 대외활동을 극도로 자제해야 하는 상황을 맞기에 이른다. 친형인 건평 씨와 자신의 오랜 후원자로 알려진 박연차 태광실업 전 회장이 세종증권 매각 비리에 연루돼 각각 지난해 12월 4일과 같은 달 12일에 구속됐기 때문이다. 검찰과의 28년 악연 자살로 종지부 이로 인해 노 전 대통령은 형 건평 씨의 구속 직후인 지난해 12월 5일을 마지막으로 방문객들과 인사하는 일정을 없애고 외부 행사 참석을 자제하면서 사실상의 ‘칩거’에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친형과 자신의 오랜 후원자를 구속한 ‘박연차 게이트’에 부인 권 여사와 건평·정연 씨 등 자식들까지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노 전 대통령은 ‘가족형 비리’라는 여론의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은 5월 7일 자신의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을 통해 ‘권 여사가 박연차 전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발표한 이후 설 자리를 잃었고, 같은 달 30일에는 역대 대통령으로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소환되는 비운의 전직 대통령이 되기에 이른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어느 정권보다도 도덕성을 강조했던 자신과 가족들이 부정한 돈에 연루된 상황에 침통해했고,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도 사실상 폐쇄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이 권 여사를 비롯해 아들 건호 씨, 딸 정연 씨 등 가족 모두를 소환한데 이어, 권 여사를 다시 소환하고 자신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검토하는 등 계속적으로 압박해 들어오자, 결국 영욕으로 가득찬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비극적 선택을 했다. 이로써 노 전 대통령과 28년 간 이어졌던 검찰과의 질긴 인연도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다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둘러싼 검찰의 수사일지를 재구성한 것이다 2008년 12월 22일 = 대검, ‘세종증권 비리의혹’ 중간 수사결과 발표 검찰, 노건평 씨 특경가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기소 검찰, 노건평 씨 특가법상 조세포탈 혐의 및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기소 2008년 12월 29일 = 대검, 노무현 전 대통령 15억 원 차용증 확보 2009년 3월 14일 = 대검, 박연차 정관계 로비의혹 본격 수사 2009년 3월 19일 = 대검, 이정욱 전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 구속(노건평이 ‘박연차 돈’ 5억 원 전달) 2009년 3월 20일 = 대검, 송은복 전 김해시장 구속 2009년 3월 21일 = 대검,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 체포·민주당 이광재 의원 소환조사 2009년 3월 22일 = 대검, 추부길 전 비서관 영장 청구·이광재 의원 2차 소환조사 2009년 3월 23일 = 대검,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장인태 전 행자부 2차관 체포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 2009년 3월 25일 = 대검, 장인태 전 행자부 2차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 대검,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 특경가법상 뇌물 혐의로 구속 2009년 3월 26일 = 대검, 이광재 민주당 의원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 2009년 3월 27일 = 대검, 박진 한나라당 의원 조사 2009년 3월 28일 = 대검, 서갑원 민주당 의원 조사 2009년 3월 31일 = 대검, 장인태 기소 2009년 4월 2일 = 대검, 박정규 기소 2009년 4월 3일 = 대검, 이정욱·송은복 기소 2009년 4월 6일 = 대검, 박관용 전 국회의장 소환조사 대검, 김덕배 전 열린우리당 의원(김원기 전 국회의장 비서실장) 체포 대검, 박 회장 ‘비자금 세탁소’ 홍콩 현지법인 APC 계좌자료 확보·분석 돌입 2009년 4월 7일 = 대검,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 체포 대검, 김원기 전 국회의장 소환 및 박관용 전 국회의장 재소환 노무현 전 대통령, 홈페이지에 사과문 게재 “권양숙 여사 부탁으로 받아 사용, 검찰 조사 응하겠다.” 2009년 4월 8일 = 김원기·박관용 전 국회의장, 박연차 돈 수수 시인 검찰 “사과문 진실 밝히겠다‘...…노 전 대통령 소환 예고 2009년 4월 9일 = 검찰,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 영장 청구 검찰, 박연차-노 전 대통령 측 돈거래 10억 확인·50억 추적 2009년 4월 10일 = 검찰, 노 전 대통령 조카사위 연철호 체포 검찰, ‘박연차 상품권’ 5000만 원어치 민주당 안희정 의원에 전달 확인 검찰,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기소 검찰, 이상득·정두언 의원이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의 태광실업 세무조사 무마 청탁을 거절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힘 2009년 4월 11일 = ‘500만 불 의혹’ 노 전 대통령 아들 노건호 씨,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출석 검찰, 부산지검에서 권양숙 여사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조사 2009년 4월 13일 = 검찰, 연철호 재소환...노 전 대통령 미국 방문 행적 추적 위해 시애틀 총영사 조사 2009년 4월 14일 = 검찰, 노건호·연철호 재소환...63억 용처 추궁 임채진 검찰총장, 대검찰청 부장검사들에게 “검찰의 수사가 오해받지 않도록 검찰의 진정성을 설명하라”고 지시 검찰, ‘박연차 경남은행 인수 시도’ 수사 2009년 4월 15일 = 대검, 강금원 조사...노 전 대통령 퇴임 전 ‘3자회동’ 주목 검찰, ‘라응찬→박연차 의문의 50억’ 본격 수사 2009년 4월 16일 = 검찰, ‘박연차 투자금’ 노건호 우회투자사 압수수색 대검, 노건호 재소환·강금원 직접 조사 문재인 변호사, 노 전 대통령과 5시간 면담 검찰 “정상문, 정대근 전 농협회장 돈 수수 추가 확인” 2009년 4월 17일 =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봉화에 투자한 70억 원 중 일부가 부동산 거래 방식으로 노 전 대 통령의 형 건평 씨에게 건네진 사실이 검찰 조사 결과 밝혀짐 2009년 4월 19일 = 검찰, 정상문 소환조사 중 긴급 체포 박 회장과의 돈거래와 관련 노 전 대통령 측의 해명에 대해 검찰이 일부 거짓임을 확인했다고 밝힘 2009년 4월 20일 = 검찰, 정상문 공금 12억 횡령 확인 ‘뇌물수수 혐의’ 영장 재청구 검찰, 노건호 다섯 번째 소환...‘500만 달러 운용 추궁’ 2009년 4월 21일 = 검찰, ‘대통령 특수활동비 횡령’ 정상문 구속 정상문 “노 전 대통령은 몰랐다...국민께 죄송” 2009년 4월 22일 = 검찰, 노 전 대통령 측에 서면질의서 발송 정상문, 1억 상품권 파쇄기로 파기한 사실 검찰 통해 밝혀짐 박연차 노 전 대통령 부부에 억대 명품시계 선물한 사실 알려짐 2009년 4월 25일 = 검찰, 노 전 대통령 측 답변서 수령...검토 개시 2009년 4월 26일 = 검찰, 노 전 대통령 30일 오후 1시 30분 검찰 출두 확정 발표 2009년 4월 30일 = 노 전 대통령 검찰 출두 2009년 5월 9일 = 권양숙 여사, 100만 달러 사용처 검찰에 이메일 제출 2009년 5월 11일 = 검찰, 노 전 대통령 딸 정연 씨 부부 소환조사 2009년 5월 12일 = 검찰, 정연 씨 박연차 돈 40만 달러 추가 수수 정황 포착 2009년 5월 23일 = 노 전 대통령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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