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 가면 초가집을 쉽게 볼 수 있었어요. 얼기설기 이엉을 엮어 지붕을 올린 모습이 엉성해 보여도, 옛날부터 서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켜켜이 쌓인 짚더미 덕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지붕 속의 짚이 썩으면서 생기는 열이 초가집을 따뜻하게 유지시켜주었죠. 장애인 예술가들이야말로 바로 초가집에서 열을 내는 짚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불편해 집 밖에서 왕성한 활동을 할 수는 없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궁한 창작성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장애인 예술가들이죠.” 강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를 표현한 연작시집 <섬진이야기>의 저자 오헌(梧軒) 박재홍 시인(40)은 장애인 예술가의 가능성을 초가집의 보온기능을 하는 ‘썩은 짚더미’에 비유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기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가들의 창작력이 있다는 설명이다. 뜨겁게 발열하는 예술도 초가집처럼 보이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보면 장애인 예술가들이 있다. 하지만 창작 역량이 있어도 몸이 불편하거나 경제적 제약 때문에 예술 활동을 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 많다. 박 시인은 “집 밖에 나오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창의력이 발현되면 세상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창의적이고 뜨거운 부분을 볼 수 있다. 이를 끄집어낼 수 있는 역할은 인터넷이 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들의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해 숨어 있는 창의력을 캐고자 한다. <섬진이야기> 등 4권 시집 발매 박재홍 시인은 두 다리로 곧게 설 수 없는 장애인(지체장애 2급)이다. 어릴 적부터 목발에 의지해 유년을 보낸 그는 장애인 예술인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에 동네 축제였던 학교 운동회에서 마음껏 뛰어놀지 못했던 기억, 불편한 몸으로 친구들과 다투었던 기억 등 어린 시절의 아픔들은 그의 시에 고스란히 녹아 흐른다. 그렇게 기억의 언어가 하나 둘씩 차올라, 1977년 그는 내무부 주최 현상공모에서 산문부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였다. 그 후 25세가 되던 1993년에는 그의 이름 석 자를 내건 첫 시집 <낮달의 춤>을 발간했다. 하지만, 막상 첫 시집을 발표하고 나니 말문이 막히고 글 쓰는 일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침묵의 시간을 보내면서 서예와 그림에 심취했다. 박 시인은 “시는 작가가 자신의 심연에 빠져들어 진리를 끌어내는 과정과 같다”며, 이후 석헌 임재우 선생을 만나 서예를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박 시인은 “서예를 하기 위해서는 선조들이 이룩해놓은 학문과 고전에 대한 해박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데, 석헌 선생님을 만나 글을 익히면서 학문의 깊이와 사물을 보는 눈이 깊어져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첫 시집 발간 후 10년을 넘는 시간을 보낸 그는 2006년 두 번째 시집 <사인행(四人行)>을 냈다. 세 사람이 같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에서 따온 제목으로, 삼인행에서 한 사람이 더 끼게 됐다. 여기에서 추가된 한 사람은 그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2008년에는 시화집 <섬진이야기>와 시집 <연가부>를 발간했다. <섬진이야기>는 충남대 국문학과 손종호 교수의 발문과 함께 임재우 서예가(제목 글씨), 이성순 화백(표지화), 김효정 화백(삽화) 등이 협력해 만든 시집이다. <연가부>는 ‘갈대로 이어 띄운 다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시인 박재홍은 “섬진이야기를 통해 하기 어려웠던 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이제는 근현대사에 없는 이야기를 장시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다졌다. 왜 하필 섬진강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풀어냈을까? 섬진강과 서해가 맞닿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에 더해 신체적 결함이 주는 고통과 슬픔을 섬진강 물에 풀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섬진강가에 기대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갤러리 예향’으로 장애인 문화예술 지원한다
박재홍 시인은 대전 지역에서 ‘갤러리 예향’을 운영하고 있다. 이 갤러리는 다소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장애인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영업 장소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에서 전국 최초로 ‘갤러리’ 사업자로 선정된 것이다. 장애인으로 우리나라에서 창업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 지원하는 창업 부문도 음식점이나 미용실·안마시술소 등이 주를 이룬다. 아직 장애인의 예술활동 지원보다는 생계 유지에 초점이 맞춰진 우리나라의 사회풍토 탓이다. 그런 현실에서 박 시인의 갤러리 사업장 승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장애인고용촉진공단으로부터 지원받은 금액은 가게 전세금 9000만 원. 사업 운영비나 인테리어·인건비 등은 박 대표가 부담한다. 갤러리 예향은 사단법인 대전예술단체총연합회와 도서출판 한밭예술과 업무협약을 맺었다. 40여 평의 갤러리에는 개인 전시를 할 수 있는 전시공간과 표구 작업실·사무실 등이 있어 다양한 업무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예향은 역량 있는 장애인 작가들이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별도 심사를 거쳐 무료로 대관하고 있다. 그림 가격도 일반 갤러리보다 50% 이상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그림 선별 전문가들의 손을 거쳐 작품의 질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된 작품들을 내놓기 때문에 가격을 낮출 수 있다고 한다. 갤러리 예향은 작품 창작 비용 절감을 위한 간접지원 방식을 홍보비 절감으로 구현하고 있다. 월간지에 전시 안내 또는 전시 리뷰 수록, 대전예술총연합회 홈페이지와 카페를 이용한 홍보, 도서출판 한밭예술의 e-book 제작, 대전도시철도공사 대전지하철 PDP tv 광고 등 다양한 방식의 홍보 패턴을 사용하고 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 동등한 문화향유권 누리길” 박 시인은 ‘갤러리 예향’을 장애인 작가와 일반 작가들의 쉼터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꾸미고자 한다. 그가 장애인들의 문화예술 지원을 본격적으로 결심한 이유는 전시회를 하고 싶어도 만만치 않은 비용 때문에 전시를 망설였던 기억 탓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자립도가 약한 장애인들은 비용적인 문제 때문에 공모전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전시회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말했다. 박 시인은 “소외 지역을 찾아가는 문화예술은 지역 작가와 수준 높은 장애인 작가를 발굴 소개하는 역할을 해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막론하고 문화 향유권을 누리기 바란다”고 말했다. 박 시인은 시를 지어 책을 발간할 때 나오는 수익과 갤러리 사업에서 발생하는 수익 일부를 장애인의 문화 발전을 위해 사용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박 시인의 책 발간은 2008년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부문 창작지원금을 받게 되면서 이룰 수 있었다. 박 시인은 2007년에도 국무총리 복권위원회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으로 시각예술분야 창작지원금을 받은 바 있다. 갤러리는 장애인고용촉진공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게 되면서 개관할 수 있었다. 이같이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장애인 예술가에게 환원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박 시인은 시화집으로 냈던 <섬진이야기>의 디지털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시문학과 멀티미디어를 연계한 디지털 컨텐츠를 연계하는 사업이다. 더 많은 장애인들이 집에서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고자 하는 데서 구상한 아이디어이다. 그는 이를 통해 수익이 창출되면 장애인들의 문화 발전 기금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는 “시 낭송 테이프와 섬진강 사계가 들어간 시디를 제대로 제작해서 장애인 단체들에게 판권이 됐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발생하는 모든 수익은 장애인 예술가를 육성하고 문화 발전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위한 후원금으로 쓰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재홍은 누구인가? 시인이자 칼럼니스트. 한국문인협회와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07년 국무총리 복권위원회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으로 장애인 인식 개선 모임 '오늘'의 대표로서 시각예술분야 창작지원금 수혜를 통해 새로운 문화예술의 대안을 제시했다. 월간 한올문학 자문위원, 한국문인협회 회원과 동양서예학회 초대작가 등을 역임해 문학과 미술 분야에서 다양한 이력을 갖고 있다. 또, 자선음악회였던 바이올리니스트 마영님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회를 기획하는 등 문화기획자로 활동한 경력도 갖고 있다. 여러 종류의 문화 공연들이 사회복지의 의미로 문화 소외계층에게 좀 더 다가서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현재 ‘갤러리 예향’의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