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윤영상 (ysangyn@naver.com) 학교의 교실 안에 40명 남짓한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지나가던 장학사가 그 교실을 둘러보았을 때는 6학년 3반, 3학년 5반, 혹은 그저 비슷한 아이들의 집단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내 자녀가 그 학급에 속해 있는 경우에는 달라진다. 내 아이, 즉 한 아이의 얼굴에 집중하게 되고, 그 아이가 매우 특별하게 여겨진다. 단체가 아닌 개인의 ‘개별성’에 집중한 결과이다. 서울 양화진의 100주년기념교회라는 곳에서는 매주 목요일 8시마다 종교에 상관없이 들을 수 있는 ‘목요강좌’라는 문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데, 지난주 초빙 강사였던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는 ‘따로 또 같이’의 정신분석적 해석을 통해 ‘개별성’과 ‘공감’의 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졌었다. ‘개별성’이란 무엇일까? 예컨대, 내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내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바라보기를 원하는 부모는 별로 없을 것이다.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를 여느 친구들과 똑같이 대해서는 그 아이에게 심각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또한 ADHD를 가진 아이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원인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기질적인 원인이 있을 수도 있고, 가정환경 등에 따른 후천적 원인이 있을 수도 있으며, 좀 더 세분화하자면 아이마다 다양한 개별적인 원인들이 있다. 그런데 ADHD를 가진 아이들을 같은 원인과 같은 치료법을 가진 아이들로 여겨 한 아이, 한 아이에 대한 개별성을 간과하게 되면, 우리의 아이들은 공감받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심각한 소외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ADHD 자체보다도, 공감받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더 심각한 2차적 문제들을 떠안게 되는 것이다. 소외계층에는 개별성 공감·존중이 ‘보약’ 다문화가족 문제, 북한이탈주민 문제, 독거노인 문제, 노숙인 문제 등 세상의 모든 소외 문제들도 이 개별성에 대한 공감 결여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크다고 본다. 해외에서 왔다고 해서, 북한에서 왔다고 해서, 자녀 없이 생활한다고 해서, 혹은 노숙을 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주위의 도움으로 얼마든지 환경에 적응하거나 극복하고 문제들을 이겨 나갈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공감받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예컨대, 모든 불우아동이 김길태와 같은 극한 범죄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차이는 성장 과정에서 그 아이에게 따뜻한 관심, 즉 개별성에 대한 존중과 공감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차이다. 또 다른 예로, 내 자녀가 공부를 잘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음악을 하든, 미술을 하든, 장사를 하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통해 공부 잘하는 우등생보다도 더 훌륭히 자랄 수 있다. 문제는 공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주위의 시선과, 특히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공감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심리적 스트레스가 헤어나기 힘든 더 큰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는 점이다. 공부를 못하는 다양한 원인들, 예컨대, 체력적 문제, 부모와의 불화, 친구 문제 등 좀 더 근본적인 원인들에 대한 공감과 대화를 건너뛴 채, 대학교라는 획일화된 목표에만 관심을 두게 되면서 그 이전 단계에서 해결해야 할 본질의 문제들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소외계층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노숙인 봉사도, 독거노인 봉사도, 고아원 봉사도 제법 해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디서 봉사를 하든, 정형화되고 도식화된 ‘룰’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예컨대, 노숙인에게는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을 도와 드리면 되고, 독거노인에게는 손을 잡아 드리면 되고, 어린아이들은 안아주면 된다. 이런 일들을 많이 하다 보면 모든 행동들이 꽤나 관습화되어, 노숙인들은 그저 노숙인 무리, 고아원의 아이들이나 쪽방촌의 독거노인들도 그저 집단적인 무리의 개념으로밖에 보이지 않게 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성에 대한 관심을 소흘히 하게 된다. 서울역의 노숙인들과도 잠을 자며 깊은 대화를 나누어보면, 각자가 얼마나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경험을 한다. 따라서 일 만 명의 노숙인이 있다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 역시 일 만 가지라고 생각한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따뜻한 국 한 그릇, 혹은 취업알선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근본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생각대로 해! 그게 답이야!” 어제,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함께 간 목사님을 통해 친구가 많은 위로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 친구를 위로해준 것은 다름 아닌 목사님의 공감 능력이었다. 목사님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는 해법을 제시하겠지만, 자살을 고민할 정도로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그에게 그런 이야기는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그 전 단계로 필요했던 것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공감의 단계였다. 그동안 여러 심리상담가들을 만나보았지만, 매번 그들이 내뱉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세요’라는 말들이 내 친구를 더 힘들게 했었나보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이것은 비단 그 친구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주 느끼는 감정이 아니던가. 최근 지하철에서 ‘생각대로 해’라는 콘셉트의 광고를 보며 마음의 위로를 받은 적이 있었다. 상사에 의한 스트레스로 인해 직장을 옮기고 싶어도 부인의 걱정 때문에 사표를 던지지 못한 채 끙끙 앓으면서 살아가고, 친구들과 음악을 하고 싶어도 부모님의 걱정 때문에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입시학원으로 향해야 하고, 졸업 후 창업을 해서 자유롭게 일해보고 싶지만 친구들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업을 택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우리 아니던가. 살아가면서 “생각대로 해! 그게 답이야!” 바로 이 말 한마디만 들을 수 있어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 행복감과 자신감이면 무엇을 해도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는 모든 인간에게는 ‘현재감각’이라는 개별적인 심리적 안테나가 무의식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찾아 움직이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이야기하는 창조주의 인도가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이는 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어서라도 좋은 결과에 이를 수 있는 상황에서도, 타인의 ‘잣대’와 ‘편견’이 ‘현재감각’이라는 심리적 안테나를 교란시키고 억제해서 결국 우리가 ‘극단적 이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심리학자들은 ‘심리적 숨 참기’로 표현하기도 한다. 산소의 순환이 멈춰버린 것처럼, 나의 상황이 타인에게 전달되지도 못하고, 타인의 생각이 나에게 전달되지도 못한 채,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참으며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다. 숨을 오래 참으면 그것은 ‘심리적 사망’으로 치닫지 않겠는가. 정신과 상담의들이 환자를 대할 때 가지는 기본 원칙은 ‘환자는 항상 옳다’라고 한다. 환자들이 항상 잘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환자의 행동과 생각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원인이 있다는 의미다. 이 ‘원인’, 즉 개인의 ‘개별성’에 대한 공감이 ‘치유’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어떤 특별한 계층의 사람이 아니어도, 우리 모두는 각각 다른 환경과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자라나기 때문에, 누구든지 외로움과 소외감, 더 나아가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우리 모두가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기도 하다. 이 모든 소외 문제와 정신적 질환에 대한 좋은 해결법은 다름 아닌 ‘개별성’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부모로서, 자녀로서, 부부로서, 한 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서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코너의 제목인 ‘제3의 시선’은 바로 타인의 개별성에 대한 공감의 시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