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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시선]처음 만난 사람들과 자유를 갈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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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78호 편집팀⁄ 2010.07.12 16:11:20

지난 일요일, 필자는 공단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 인근의 어느 교회에서 아프리카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불법체류자였다. 필자가 그곳의 불법체류자들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그 지역 소방서에 근무할 때였다. 당시 우리 관내에는 3개의 공단이 있었는데, 야간 공장 화재나 야간 사고의 경우 그 피해자들 중에는 불법체류자들의 비율이 꽤나 높았다. 컨테이너 박스와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화재와 각종 사고의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그들은, 때때로 얼굴과 전신에 화상을 입고 구급차에 실려 후송되기도 했고, 더러는 한국에서 애써 모아둔 재산과 생활 터전을 한순간의 화마로 송두리째 잃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신분상의 약점 때문에 신고하지 않고 스스로 대충 처리해버린 사건·사고가 훨씬 많을 것임은 자명하다. 현재 국내 불법체류자 수는 감소 추세에 있다. 국내에 체류 중인 외국인 115만 명 가운데 올해 3월까지 불법체류자 수는 17만8000여 명으로, 이는 2007년 22만3000여 명, 2008년 20만400여 명에 비해 상당히 감소한 수치이다. 다만, 2009년의 불법체류자 수는 17만7000여 명으로 금년 3월 수치와 거의 같았다. 이는 2008년부터 실시된 ‘불법체류자 감소 5개년 계획’의 결과이다. 그리고 지금은 집중단속기간이기도 하다. 집중단속기간인 지금, 그들은 빵을 먹고 싶어도 슈퍼에 가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외출을 하려면 강제송환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고로 다치거나 고용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참아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법체류자들을 두려워하거나 혐오하거나 무관심하다. 그들에 의해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을뿐더러, 범죄의 빈도수가 꽤나 높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로, 불법체류자들을 향한 범죄 역시 부지기수다. 그래서 그들은 단속의 대상이 되고, 사회적 약자가 된다. 그들에 대한 집중단속이 너무 가혹하다거나 그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여기서 하려는 뜻은 아니다. 불법체류자 문제가 그리 간단한 문제도 아니거니와, 제도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날 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주해온 탈북민(북한이탈주민) 친구들이 생각났었다. 북한에서 고초를 겪다가 어렵사리 탈출한 동포들은 중국 혹은 몽골 등의 어딘가에서 한국의 불법체류자들처럼, 아니 그 이상의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 좋게 한국에 정착한 후에도 주위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보다는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는 현실이 어쩐지 그곳에 모인 힘없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과 교차되었기 때문이다. ‘소통’ 갈망하는 탈북민과 불법체류 외국인들 독립영화 중에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영화는 탈북민들의 사회적응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교육을 마치고 이제 막 대한민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후 아파트숲 사이에서 자신의 집을 잃어버린 진욱이라는 청년과, 십 년째 택시를 몰고 있지만 아직도 서울 지리가 서툴기만 한 또 다른 탈북민 혜정, 그리고 베트남 출신의 이주노동자 팅윤이 낯선 서울 땅에서 우연히 만나 이루어내는 매우 서툴고도 고단한 동행길을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말이 안 통하고, 모든 것이 서로 낯설기도 했지만, 공유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소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필자나 독자나, 사람은 누구든지 자유를 갈망하며 살아간다. 필자가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랬고, 우리 역시 그렇다. 그렇다면 서로가 삶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터치하지 않고 놓아주며 살아간다고 해서, 혹은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집중단속을 중지한다고 해서, 그들 혹은 우리 자신이 원하던 자유가 얻어지게 될까? 불행히도 아닌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는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아닌,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 안에서 누려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가족에게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어 가출을 해보기도 하지만, 정작 집을 나와서는 가족의 관심과 사랑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 혹은 혼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필자는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에서는 ‘성악설’을 믿는다. 교리에 따르면, 태초의 창조질서와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타락으로 훼손되었고,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으며, 언제나 죄의 속박과 고통의 속박과 외로움의 속박 등에 억눌리며 살아가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경험상 굳이 종교인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성은 다름 아닌 사랑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만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와 같은 종교인들은 신의 사랑 혹은 사람에게 투영된 신의 사랑을 갈망하게 되고, 비종교인들도 사람 사이의 사랑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때리지 마세요, 나도 인간입니다” 그날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은 경찰의 집중단속이 두려워 빵과 물 한 병을 사고 싶어도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날 함께 예배드리는 시간만큼은 누구보다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집중단속의 위험이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아니, 공공장소이기에 단속의 위험도는 평소보다 더욱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불완전성을 채워줄 신의 사랑 혹은 인간 사이의 사랑이 그곳에 충만해 있었기 때문이라 믿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자신만의 영역에 담을 쌓고 컨테이너 박스에 만들어진 작은 방 안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놓았을 때보다, 타인과 살과 마음을 부대끼며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자유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관계의 단절이 아닌 소통 가운데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처음 만난 사람들>에서, 주인공 진욱은 한국말을 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리고 서로 말도 통했지만, 그것이 소통이 되지는 못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낯선 진욱을 차갑게 외면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자유를 갈망하는 그를 점점 더 옭아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던 불법체류자 팅윤이 친구가 되어주고, 소통을 통한 자유와 행복을 느끼게 해주었다. 팅윤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유일하게 한마디 한국말을 내뱉는다. “때리지 마세요, 나도 인간입니다!” 분명히 불법체류자는 범법자일 수도 있고, 추방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와 공존하는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들에 대한 관심과 소통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를 빼앗고 빼앗기며 서로를 속박 가운데 두는 행위이다. 불법체류자와 시민 사이의 만남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만남이며 소통이다. 우리 모두 자유를 원하는가? 밖으로 나가 낯선 사람들과 소통을 시도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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